< 화과산 >
지금까지의 신들을 상대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
발전이라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허나 그것은 대부분 합리적으로 놈들의 팔다리를 묶어 버린 채 싸웠기 때문이다.
태호는 두 악신을 추궁하며 얻은 정보들을 떠올렸다.
-사, 사도들은 우리보다 족히 두세 배는 강하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역풍도 거의 받지 않지.
역풍을 거의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완전체 신 두세 명을 함께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이 필요했다.
‘분신이 늘어나면 전략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 있게 돼.’
[분신을 늘리는 것 말이구나.]
로키는 태호의 말에 즉각 흥미를 보였다.
[그건 일리 있는 방법이다. 허나, 문제가 하나 있다. 분신은... 보통 능력 중에서도 매우 까다롭고 희귀한 편이거든.]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럼.]
허나 로키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
[내 다크랜드의 흡혈군주 말고도 하나 그 능력을 보유한 녀석을 안다.]
태호가 눈을 반짝 떴다.
“누굽니까?”
[흐응... 너 요즘 너무 날로 먹는 데 익숙해진 것 같다?]
로키의 말에 태호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사실이었다.
로키는 아군이 된 이래 아주 유용한 전략 전술, 그리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태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인벤토리 창에서 에픽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악신 아자무스를 사냥한 뒤 획득한 방어구 에픽이었다.
로키는 그것을 하나 챙기더니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꼭 뭘 달라고 그러는 건 아니야. 알지?]
그 모습이 마치, 손자와 놀아주는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친한 동네 형 같기도 했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그럼요. 진심으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작 챙겨 드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오냐. 좋다, 그럼 넌 지금 당장 동방 대륙으로 가라.]
“동방 대륙이요?”
[그래.]
로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곳에 분신술이라면 제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고, 또 그게 틀린 생각은 아닌 원숭이 한 마리가 살거든.]
“원숭이...?”
태호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원숭이, 라는 말을 되뇌었다.
태호가 아는 원숭이 중 분신술에 능한 것은 바로...
“손오공 말입니까?”
손오공이었다.
[알고 있구나? 너희 세계에선 꽤나 유명인사인 모양이던데.]
“어... 허나, 전생에서는 손오공은 존재하지 않았었는데요?”
[흐음... 그래? 내 듣기론 승려 하나를 만나 서역행을 한다는 말이 있더라.]
손오공이 서역행을 시작한다는 건 굳이 리얼 포스가 아니어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어릴 적부터 봐 오던 서유기가 그런 내용이었으니까.
“......”
[일단 가 봐. 너 전생에서 동방 대륙 가 봤냐?]
“가 봤죠.”
[그럼, 거기 화과산이란 곳도 알겠네?]
안다.
한때 유저들의 관광 명소로 꼽히던 곳 아니던가?
원숭이들이 잔뜩 살며, 과실이 풍성하게 열리던 산이었다.
손오공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혈안이 되어 찾는 탐험가들도 많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손오공은 이쯤 시간대에서 서역행을 떠났기 때문이군.’
태호는 씩 웃었다.
“감사합니다.”
......막시무스와 아르카네가 헥헥 숨을 몰아쉴 무렵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유니크 던전의 리스폰 타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막 절망하려던 그때.
샤아악-!
두 녀석이 소환해제 되었다. 그리고 분신체도 사라졌다.
다시 녀석들이 나타난 것은 유령선 위였다.
‘아주 편리해.’
분신체는 태호의 모든 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때문에, 소환수들을 소환해제하고 소환하는 것도 역시 자유자재.
[응? 여긴...?]
막시무스의 말에 태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간 고생했다. 이제 조금 쉬어 둬. 이 배는 현재 동방 대륙으로 가고 있어.”
[동방 대륙... 그렇군.]
막시무스는 지쳤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상처가 남아 있었고, 지독히도 피곤한 얼굴이었다.
반면, 아르카네는 아직도 쌩쌩했다.
[뭐해야 해? 낚시해야 해? 더 안 싸워?]
태호는 빙긋 웃었다.
“그래. 조금 쉬어 둬.”
두 녀석이 발라당 드러누울 무렵, 태호는 더욱더 유령선을 쾌속 전진시켰다.
노펜시아 동쪽 바다 끝에서 시작된 항해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이어졌다.
쏴아아아아아악-!
동쪽 바다에는 한참 동안이나 유저들이 즐비하게 보였다. 저마다의 배를 타고 항해하던 유저들이, 유령선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언노운이다!
-언노운님! 여기 한번 봐 주세요!
태호는 그쪽을 보며 쓰게 웃었다. 어느새 발라당 누워 있던 아르카네가 벌떡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그들을 지나쳐 동쪽 바다로 더 깊숙이 나아가자 이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동쪽 바다 한복판에는 거대한 조류가 있어, 현시대의 유저들은 쉽게 넘어가기 힘들 거다. 조류는 강해서 웬만한 크기의 범선도 쉽게 집어 삼킨다.
허나 태호의 유령선은 그런 것은 아랑곳 않고 쾌속 질주하며, 결국 저편 거대한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갔다.
해무 저 너머, 신비의 동방 대륙의 모습을 드러냈다.
[동방 대륙]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바다는 더없이 청명한 에메랄드빛!
산의 생김새나 나무, 그리고 풀과 꽃까지. 본대륙과는 판이하게 다른, 어찌 보면 익숙한 동양풍의 땅이었다.
* * *
화과산은 동방 대륙에서도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큰 산이었다.
태호는 유령 표범을 소환해 달리기 시작했다.
동방 대륙은 크게 세 개의 거대 국가로 나뉜다. 동북부의 중원 무림, 그리고 서북부의 쥬신. 남부의 마상 제국이 바로 그것이다.
태호는 그대로 마상 제국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벌판!
아직은 유저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 땅에, 간간이 NPC들이 말과 마차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던 태호는 멀찍이서 거대 도시를 발견했다.
‘마상 제국의 북부 도시, 마칸.’
과거에는 저곳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동방 대륙에도 당연히 에픽이 있다.
다만, 동방 대륙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이곳의 에픽들은 대부분 ‘특정 세력’과 연관이 있다. 즉, 단기로 얻을 수 있는 에픽은 거의 없고 대부분 꾸준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물론, 개중 단기간에 얻을 수 있는 에픽도 분명히 있었다.
태호는 머릿속으로 챙겨갈 수 있는 종류의 에픽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릴 즈음.
저편에 거대한 산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곳이 바로 화과산이다.
일정 거리를 분기로, 사방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여기저기 솟아 있는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것은 탐스러운 과실들이었다.
형형색색의 풀과 꽃이 피어 있으며, 한가로운 분위기와 따사로운 햇빛이 느껴졌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느껴진다. 현재의 태호는 감각 세계에 들어와 있기에, 향긋한 과실 냄새와 봄바람 그리고 짐승 냄새까지 느껴졌다.
한없이 평화로운 휴양지에 온 기분이 들어 어쩐지 긴장감도 동시에 탁 풀려 버렸다.
끼익 끽끽! 끽!
여기저기 원숭이들이 보였다. 서로의 털을 골라 주던 녀석도, 과실을 따 통통한 배를 두드리며 먹어 대는 녀석도, 새끼와 어미도 있었다.
그들의 두 눈에 호기심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태호의 두 귀에는 그들의 언어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건 뭐지?
-원숭이인가?
-아닌데? 더 큰데?
원숭이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유령 표범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카르르릉!
유령 표범이 울자, 원숭이가 펄쩍 뛰며 놀랐다.
태호는 그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돌려보냈다.
쪼그려 앉아 원숭이와 시선을 맞춘다. 녀석은 가만히 서서 태호를 보다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주변을 알짱거리다가 태호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인벤토리창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내미니, 녀석은 그것을 홱! 낚아채 뒤로 물러서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사방의 원숭이들에게 사과를 적당히 나눠 주며 태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 정상에 동굴이 하나 있었지.’
수렴동이라 불리던 동굴이었다.
어렵지 않게 그곳에 손오공이 있을 거란 추측이 가능했다.
화과산 정상.
태호는 그곳의 동굴 주변에 원숭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태호가 다가서자, 원숭이들이 벌떡 일어나 우끽끽! 끽끽! 소리를 내며 경계했다.
-누구냐!
-처음 보는 생김새인데, 어느 구역 원숭이냐?
-저건 원숭이가 아니다! 사람이다!
‘어쩐다.’
무력 제압도 방법은 방법이나, 솔직히 좋은 방법이라 할 수는 없다. 손오공에게 적대감을 심어 주어 좋을 것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태호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점점 더 태호에게 다가왔다.
-당장 꺼져라!
-대장님 주무신다!
여기저기서 원숭이들이 합류하더니, 그 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어느새 화과산 정상에는 원숭이가 수백 마리는 족히 모여 태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끽끽!
끼끼끽!
저마다 요란하게 소리칠 무렵.
[웬 소란이냐!]
동굴 속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호는 동굴로 시선을 돌렸다.
곧, 그곳에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과산의 원숭이 왕]
[손오공]
머리 위의 글자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증명해 주었다.
손오공은 인간과 거의 흡사한 형태를 한 원숭이였다. 전신에 갈색 털이 복슬복슬 나 있으며, 귀이개를 들고 귀를 후비적거리고 있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손오공은 태호를 보았다. 그리고 원숭이들을 보다, 태호를 한 번 더 보았다.
“너도 사람인가?”
동방 대륙의 언어였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현장(玄?)이 누가 온다고 말 한 적은 없는데... 넌 대체 뭐냐?”
현장.
태호는 그 이름이, 삼장법사를 뜻함을 금세 알아차렸다.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만나 서역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바다 건너 본대륙에서 온 사람입니다.”
“이쪽 땅 말을 할 줄 아네?”
눈 한 번 깜빡이자, 손오공은 어느새 태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손오공은 킁킁거리며 태호의 냄새를 맡았다. 흥미롭다는 듯 귀를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기도 했다.
그의 금색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어쩌다 보니.”
문득.
그 두 눈이 일순 빨갛게 물들었다.
오싹!
태호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땅을 차고 뒤로 쭉 빠졌다.
휘이이잉!
손오공의 주먹이 방금 태호가 서 있던 공간을 스쳤다.
‘갑자기?’
태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릴 무렵.
“어허, 오공아! 내 그토록 일렀거늘!”
지긋한 목소리가 그 사이를 갈랐다. 극도로 차분하지만, 묘한 힘이 서려 있는 목소리였다.
어느새 동굴 앞에 서 있는 것은 한 명의 승려였다.
“가만있어 봐라, 현장. 이 녀석 아주 재미있어 보인다.”
손오공이 손을 내저으며 씩 웃었다.
“냄새가 난다.”
“......”
“강자만이 풍길 수 있는 냄새다. 다른 것은 다 숨겨도, 내 코는 숨길 수가 없지.”
어느새 손오공의 얼굴엔 투기(鬪氣)가 가득 서려 있었다. 호승심, 그리고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쭈우우욱-!
귀이개로 쓰던 물건이 일순간 거대해졌다. 쭈욱 늘어나더니, 봉의 형상이 되었다. 황금빛 음각이 새겨진 봉의 이름을 당연히 태호도 알고 있었다.
“여의봉?”
“이걸 알아? 아하하하! 이거 아주 좋지.”
손오공은 여의봉을 빙글빙글 돌리다 어깨에 걸친 채 반대편 손을 까닥였다.
“자, 덤벼!”
“......”
태호는 물끄러미 손오공을 보다, 저편의 삼장법사를 보았다.
삼장은 못 말리겠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은 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소승, 귀인께 큰 폐를 끼쳤군요.
문득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방 대륙 특유의 전음이라 불리는 대화술이었다.
-저 녀석의 친해지는 방법이 잘못됐음을 소승이 진작부터 가르쳤으나 도통 말을 듣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제압할 터이니, 귀인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삼장이 손을 쓰려던 그때, 태호는 손을 저었다.
“아뇨.”
태호는 씩 웃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화과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