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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속 서큐버스-58화 (58/95)

00058 <-- 신입 던전 마스터와 신입 모험가 조합 지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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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나는 핑크핑크한 머리카락을 가진, 온몸을 가린 판금 깽판소녀와 테이블에서 싸늘한 분위기로 대치하고 있다.

르테아 언니는 홍차와 밀크티를 타러 뒤로 갔다.

아리에타 언니가 타주는 게 맛있기는 하지만, 아리에타 언니는 위쪽에 대기하고 있는 이 깽판소녀의 파티원들을 억제해야 한다.

“던전은 재미있었습니다.”

“제 생업인데요? 왜 다 부숴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죠?”

내가 까칠하게 말하자 얼굴에 마법 봉인진을 그리고 있는 핑크머리 깽판소녀가 지금까지 잡은 스켈레톤의 마법석을 내준다.

아…… 저 가장 큰 건 스켈레톤 킹의 마법석이다. 죽어간 스켈레톤…… 이미 죽어서 만들어진 언데드지만 두 번 죽은 스켈레톤 킹의 마법석을 보니 나를 호위해 준 때가 생각난다.

대체 저 깽판소녀가 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왔는지 노려보았다.

“듣던 대로 귀여우시네요.”

“무슨 소리야! 이 아이들을 죽여놓고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네”

“…….”

직접 본다고 저 깽판소녀의 정보 창을 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내 말을 부정하면 할 말이 없다. 정말 강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 테이블은 협상 테이블인지조차 의심이 든다.

시엘이 부들거리는 내 주먹을 잡아주고, 같이 저 깽판소녀를 노려봐 준다.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시엘이 정말 좋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 이 던전 위에 모험가 지부를 설치할 거랍니다. 저는 그 지부의 지부장이 될 거라고요.”

“…….대체 무슨 의도죠?”

“말했잖아요.”

여유를 가지고 미소 짓는 깽판소녀. 저 미소가 부드럽고 어떤 악의도 없는 순수한 아이의 미소 같아서 더 기분 나쁘다.

이쪽의 시엘이 그런 미소를 지어주면 좋은데, 저쪽이 여유를 더 많이 갖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죽은 마법석은 대체 어떤 의미로 내놓은 거죠?”

“그저 저는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 왔을 뿐, 그 마력석은 제가 가져가기 위해 회수한 게 아닙니다. 그래요, 인간과 몬스터 사이에는 매울 수 없는 골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불러내기 위해 다소 무력행사는 어쩔 수 없었지요.”

“……”

검도 없고, 마법도 못 쓰는데, 평범한 소녀정도의 힘밖에 없을 텐데 분위기가 너무 여유롭다.

설마 인간이 아리에타 언니와 레벨 50 이상 차이가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이상하다. 인간들은 우리 마력석을 가져가서 마력을 뽑아내는 게 보통 있는 일이다.

“거래일뿐입니다. 당신은 던전 마스터, 그리고 저는 당신 던전의 모험가 지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거래의 내용은?”

“이해가 빠르시네요. 프란시아 왕국은 세상에 있는 모든 던전 마스터들과 상생하는 게 목적. 모험가들을 보호하고 최대한 던전 마스터의 편의를 봐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인간의 아래로 들어가라는 건가요?”

말만 들으면 그렇다.

마치 내가 몬스터가 아니라, 그저 그들의 도구가 되어 놀아나라는 소리.

인간과 몬스터 사이의 골은 이렇게 깊은지, 이런 몸이 되고 나서 생겨난 관념 같은 것이 나를 지배하기에 그렇게 생각이 왜곡되는 것 같다.

그래도 크게 다른 내용은 아닐 것이다.

내 던전에 있는 몬스터들을 이용하면 이 연약한 인간을 쓸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꾸준히 DMP를 지급받는다면 다르다.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왠지 다른 마스터들을 배신하는 느낌이 든다.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지요. 저희가 어떻게 자연에 대항하겠습니까?”

“……”

“그저 서로 이용할 뿐입니다. 당신들은 저희 감정을 먹고 살잖아요? 저희는 꾸준히 적당한 수준의 모험가를 내려보내고, 인간들을 보내 당신의 던전에 제공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꾸준히 적당한 수준의 몬스터를 내 주면 되는 거고요.”

당장 나를 보호하기 위한 던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아양 떠는 던전을 만들라는 소리.

분노에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쥔다.

시엘이 걱정하는 듯 내 손을 잡이서 분노가 조금 가라앉지만, 깽판소녀는 긴장된 분위기를 풀고 싶은지, 머리를 낮춘다. 그것도 바닥까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저희 왕국의 모험가들은 당신을 위해 발바닥까지 핥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은 징그럽잖아, 그 전에 당신의 정보를 모두 알려줘.”

“네, 이름은 엘타리스, 레벨은 162. 나이가 어려지는 저주를 받고 이런 몸이 되었습니다. 이전 몸을 포함하면 지금 나이는 134세네요. 직업은 전사이고, 특수 스킬은 검성. 이 정도면 당신이 원하는 정보는 다 알려드린 것 같습니다만, 그 외는 저희 가족력까지 알려드릴까요?”

“아니, 그 이상은 됐어.”

내가 왜 인간의 정보까지 알아야 하겠는가?

그런데, 잠시. 아리에타 언니와 50레벨 차이가 나지 않으면 마법 봉인은 지우지 않는 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타락까지 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 정도 레벨의 인간이라면 쉽게 되지 않을 것 같다.

“하…… 제약을 걸어도 되겠습니까?”

“[피의 서약]인가요?”

정확한 스킬 이름까지는 몰랐지만, 나에게 이렇게까지 무릎 꿇고 빌 필요가 있을까?

인간들에게 던전이라는 존재가 무한한 자원을 생산하는 공간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 기저에는 DMP의 회수가 인간들이 가져가는 자원보다 더 많이 형성된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위배하는 이 세상 특유의 법칙의 탓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내 던전 위에 마을이나 모험가 조합이 형성된다면, 차라리 내 밑에 두는 게 낫지 않을까?

르테아 언니가 밀크티와 홍차를 내오고, 나는 밀크티를 마시며 눈앞의 분홍머리 소녀를 일으킨다.

저 여자는 반항이라고 해야 할지, 나를 무시하려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어 어깨로 떨어지는 흰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바라본다.

“마셔도 됩니까?”

“독은 없어요.”

“감사합니다.”

홍차를 들이켜는 분홍 머리 여자는 어떤 빈틈도 드러내지 않는다.

조금 전 이야기가 나온 [피의 서약]이 뭔지, 아리에타 언니에게 감각 공유를 걸어 물어보았다.

언니는 인간들의 무기를 회수하고, 해변 필드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묶어서 눕혀두었다.

‘언니, [피의 서약]이 뭐에요?’

‘아, 피를 물들이는 저주네요. 적어도 육체를 전부 녹여내는 저주지요. 서로 약속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한쪽의 생명력, 혹은 마력을 소멸할 때까지 상대방의 아래에 두는 최상위 약속입니다.’

‘……. 쓰는 데 마력은 얼마나 들어요?’

‘그저 서로의 피 한 방울씩만요.’

‘인간들은, 지금 반항할 수 없는 거지? 지금 내려와서 봐줄 수 있어요?’

아리에타 언니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시선이 좌우로 흔들리는 걸 바라보고는, 나는 알았다고 남기고 다시 돌아왔다.

“당신이 저에게 거는 조건은 뭡니까?”

“없습니다.”

“네? 몸을 죽이는 저주인데요? 당신의 몸은 소중하지 않다는 거예요?”

“……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은 막대합니다. 어떤 왕국이라도 던전 하나를 더 얻기 위해 영토를 뻗어 나가지요. 더군다나 여긴 원래 인간이 잘 살지 않지만, 던전의 위치가 상당히 좋기 때문에 조건이 좋아 도시가 형성되기 쉬운 조건.”

“겨우 다른 인간들을 위해, 당신의 몸을 버리겠다고요? 물론 저는 당신을 믿을 수 없으니, [피의 서약]을 걸기는 해야겠습니다.”

재빨리 돌지 않는 머리로 조건을 생각해 낸다.

상대가 절대 반항하지 않도록, 가장 쉬운 방법은 타락시키는 거지만, 아리에타 언니의 말을 들어선 [피의 서약]도 꽤나 강력한 도구다.

하지만 자기 나라를 위해 몸뚱어리 하나 바치는 인간이다. 얼마나 고귀한 정신인지는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인간들을 아래로 두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된다.

마법진 자체는 마력이 없어도 없어도 그릴 수 있다.

시엘이 마법진을 계속해서 옆에서 확인하면서, 엘타리스 씨는 마법진을 완성한다.

“여기, 각자의 자리에 서서 상대에게 맹세하고, 서로의 피를 떨어트리면 됩니다.”

“[타락]하고, 저를 마스터로 섬기세요. 그러면 모험가 지부는 허락합니다.”

“네……?”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제 조건은 당신의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고 지금 바로 행할 것.”

나는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떨어트린다.

상대도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떨어트리고, 마법진이 빛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 참, 내 정수.”

나는 멍청하게도, 다른 이를 타락시키는데 정수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2시 40분경에 올린 이 화에 무리수가 많았던 걸 다시 읽고 깨닫고,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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