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 신입 던전 마스터와 신입 모험가 조합 지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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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병약 속성을 지닌 채로 살기는 싫은데, 또 회복하기도 전에 정수를 내어야 한다.
이미 몸을 녹여버린다는 [피의 서약]을 걸어버렸고, ‘지금 당장 행할 것’이라고 엘타리스 씨가 말했기에 빠르게 타락시켜야 한다는 건 확실하다
내 정수는 얼마나 낼 수 있는가, 8개월이 지나긴 했지만, 이전에도 여러 번이나 정수를 낸 탓에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일을 저지르고 이야기하는 건 역시 무섭지만, 역시 타락에 대해 잘 아는 아리에타 언니에게 헬프를 외쳤다.
‘언니, 저 타락을 시켜야 하는데 말이죠…….’
‘뭐라고요! 지금 당장 그만두세요.’
‘그게…… [피의 서약]으로 걸어버린지라……’
‘휴…… 그래요, 지금 낼 수 있는 데로 전부 짜내세요. 죽는 건 싫으시죠?’
‘……. 알겠어요.’
당장 답이 없는 건 확실하다.
나는 또 병약한 흰머리 소녀로 바닥에 쓰러져서 보내야 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르게 인간들을 던전으로 받아들이면 레벨도 오를 테고, 강한 마스터인 리림이 와서 마력을 나눠줄 거다.
……리림은 먹으러 온다고 했으니까, 분명히 쓰러진 날 일으켜 세우고 마력을 넣어 내 DMP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거다. 과연 오긴 할까?
그래, 생각해보면 저 인간은 레벨이 161이나 된다. 타락시키면 레벨업이 되는지, 레벨다운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세상에서도 상당히 높은 사람인 건 확실하다.
여러모로 외부에서 DMP를 벌어들이고, 던전 마스터로서 레벨업을 할 수 있는 수도꼭지를 트는 꼴인데, 다소 아픈 것쯤은 참을 수 있다.
나는 정수를 손에서 내뿜는다. 과연 마음을 꺾지 않고 타락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피의 서약]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냐는 생각이다.
내 온 힘을 다해 내는 시간의 정수와 꿈의 정수.
시간의 정수는 어차피 내 네임드로 타락하게 되면 알 테니까, 얼마 전에 만든 리파가 자꾸 시간의 정수를 바라는 듯 바라보기는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앞으로 내민 혼합 정수는 꽤 양이 많다. 온 힘을 다해 내자, 시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말리려다가 만다.
시엘은 마법에 대해 배웠으니까, [피의 서약]에 대해서도 알 거니까 이게 오히려 낫다는 판단이다. 전에도 정수를 뽑다가 기절한 적은 있지만 소멸하지는 않았다.
“이걸 마셔라.”
“네…….”
드럼통 하나 정도 뽑혀 나온 혼합 정수, 나는 가볍게 정신을 잃을 뻔하기에 정수 내기를 그만두었다.
눈을 뜨고, 시야가 희미해지는 가운데 확인하는 모습. 깽판소녀 엘타리스는 그 드럼통 크기의 정수를 마시며, 몸이 꿀렁거리며 보라색으로 물드는 게 보인다.
너무 내 시야가 확실하지 않기에, 감각 공유로 시엘의 눈으로 바라본다.
“으흣……. 흐아앗……. 뽀르르”
계속해서 마시면서, 정수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끈기 있게 이어져 엘타리스 씨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저 양의 액체가 대체 어떻게 들어가냐 궁금하기도 하지만, 시엘의 마음속은 저 여자에 대한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크흣…….”
점점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엘타리스 씨는 고통스러운 듯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친다.
나는 완전히 쓰러졌고, 다행히 기절한 건 아닌지라 감각 공유 통로를 통해 시엘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나 좀 눕혀줘, 시엘.’
‘알겠습니다. 주인님. 다음부터는 절대로 정수를 내면 안 돼요, 알겠죠?’
‘그래…….’
“크하……아읏……아아아!”
꿀렁거리는 엘타리스의 몸.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던 몸은 다시 희게 변하기 시작한다.
원래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으면 인간들의 속에서 숨어 살 수 없기에 그렇게 원했다.
아니었으면 정말 보라색 피부로 고정되어 같은 인간들에게 토벌당했을지도 모른다.
“살려……줘……”
“죄송합니다만, 당신은 아직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으흐극, 흐읏…….”
고통스러운 듯이 목을 감싸고 뭔가 내뱉으려 하지만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점점 몸의 변화는 심해져 간다. 퉁퉁 불어 살덩이가 되었다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순순히 변화했던 르테아 언니와는 다르게, 엘타리스는 너무 힘들게 변화하고 있다. 아마 레벨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끄아아앗……”
“마스터에게 충성을 바쳐야지요. 살려달라고 빌지 마십시오. 그저 받아들이세요.”
시엘은 설마 엘타리스의 마음을 꺾으려고 하는 걸까?
나는 별말을 직접 입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시엘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마치 내 말을 시엘이 대신해 준다는 느낌이다.
“하…… 알겠습니다. 저는 마스터에게 충성…… 흐읍…….”
“말만?”
내 의식이 흐려진 탓인지, 마치 시엘이 내가 된 것 같은 느낌.
시엘을 내가 조정하는 건지, 내가 시엘에게 조정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시엘이 잠시 돌아본 자리에는 새근새근, 행복한 얼굴로 자는 어린 서큐버스만 있었을 뿐이다.
“케헥…… 켈록……. 으하……”
“어서, 마음까지 바치세요. 저기 있는 분이 저의 주인님, 그리고 당신의 마스터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엘타리스의 변화는 점점 안정화 되어간다.
과연 전사가 타락하면 타락전사가 되는 건지, 어떤 종족인지 종족명이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메뉴도, 정보 창도 열 수 없다.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과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를 보면, 레벨은 이전과 비슷한 것 같다.
얼굴에 새겨진 마법 봉인의 인장도 사라졌다.
“마스터,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그래, 그럼 돌아가거라.”
그리고 내 의식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잠겼다.
……
아마 한 주쯤 지나고 나서일 것 같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리림은 오지 않았다.
폭신폭신한 감각에 일어나 보니, 내 곁에서 타피와 시엘이 껴안고 자고 있고, 위쪽에는 이불 대신 따뜻한 붉고 넓은 꼬리가 나를 덮어주고 있다.
“리파?”
“주주, 주인, 일어났어?”
“응, 일어났어.”
머리가 띵하고 아프긴 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리파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지만 어떤 표정도 짓지 않는다.
괜히 장난을 부르는 얼굴이다. 꼬리 끝으로 살짝 찔러볼까도 생각해 보았다.
“세이나님, 일어나셨나요? 죽부터 드세요.”
“고마워요, 르테아 언니.”
탁자에 르테아 언니에게 안긴 채로 앉혀지고, 내 곁에는 왠지 리파가 앉았다.
불여우 리파의 귀는 뾰족하게 위로 솟았고, 꼬리도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무표정.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드러나는데, 얼굴만 가면을 쓴 듯 숨기고 있다.
“리파, 걱정했어? 걱정한 거야? 그래서 이 석굴까지 일을 때려치우고 온 거지?”
“아, 아니야, 주인.”
딱딱하게 국어책을 읽는 듯한 말투로 말하는 리파.
꼬리가 동요하듯 빠르게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봐선, 분명 내가 기절한 걸 걱정한 것일 테다.
시엘과 타피는 피곤한 지 서로 껴안고 자고 있기에 건드리지 않는다.
내 꼬리 볼살을 만져보니, 여전히 민감하긴 하지만 껍질이 살짝 까진 거로 봐선 분명히 두 아이가 엄청나게 만졌을 것 같다.
“참, 엘타리스는?”
“인간들의 수도로 돌아가서, 오늘 중으로 온다고 합니다.”
“잠깐, 그러면 정말 타락시킨 거야?”
“네,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그래도 갑작스레 감각 공유를 거는 건 아닌 듯하다.
DMP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 메뉴를 여니 101485 DMP라는 수치를 가리키고 있다.
A등급 모험가인 엘타리스를 죽인다면 16000 DMP를 냈을 테고, 거기에 타락까지 시켰으니 르테아 언니 때처럼 2.5배인 40000 DMP를 냈다는 계산.
시엘이라면 그때의 DMP 변화를 잘 알 듯하지만, 역시 타락한 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인간들은 안 찾아왔지?”
“네, 세이나님.”
르테아 언니가 내 뒤에서 나를 무릎 위에 올리고 꼭 안아준다.
푹신한 언니의 몸에 안기며 치유되는 느낌이다. 역시 르테아 언니를 타락시킨 건 확실히 맞는 선택이었다.
아리에타 언니와 소멜은 이 시간이면 밖에서 물 필드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을 테고, 나는 던전 맵을 열어 가장 고생한 시엘이 일어나기 전에 선물을 준비한다.
바로 자연 필드.
방 자체는 여기서 왼쪽으로 연결되게 하고, 한 칸에 1000 DMP라는 사양이다.
해변 필드처럼 높이 4칸 사양으로 만들고, 방 하나는 만들기 위해 가로 6칸, 세로 6칸의 넓이.
인공 태양에는 10000 DMP가 필요하겠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 쓰기엔 DMP가 부족하다.
[72000 DMP로 자연 필드 72칸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제 시엘이 일어나길 기다린다. 그동안 르테아 언니의 무릎 위에 앉고, 리파의 꼬리를 쓰다듬고 푹신함을 느끼며 치유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