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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르나 선배님과 함께 온 곳은, 건물에서 여태껏 가 보지 못한 곳들이었다.
특히 지금 도착한 곳은, 가운데 거대한 황동 판이 있는 홀이다. 벽면은 얼마나 오래된지 모를 정도로 낡은 벽돌 타일로 만들어져 있고, 벽면에 달린 마광석이 어둠 속에 은은하게 빛난다.
이 공간은 사방이 막혀있어 상당히 어두컴컴하다. 아마 인간이었다면 희미한 형체밖에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는 정수를 합성하던 곳이야. 옛날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거든.”
가운데 있던 거대한 황동 판을 바라보자, 두 개의 작은 반구가 파여있고, 거기서 이어지는 작은 홈이 가운데 있는 거대한 황동 볼로 향한다.
이 작은 반구에 정수를 흘려 넣으면, 스르르 황동 볼로 흘러 들어갈 것 같다.
“옛날엔 정수를 합성한다는 개념을 아주 심각하게 분석하던 때도 있어, 뭐 수명 긴 자들의 여유라고 할까?”
“그러면……”
“정수비를 실험하고, 메뉴에 추가하고. 지금 만들어진 던전 마스터용 메뉴는 모두 우리가 만든 거야.”
“……메뉴를 직접 만들어요?”
그렇다면 7대 마스터들은 거의 이 세상을 만든 창조자급이 아닐까?
DMP에 대한 개념도, 인간들의 감정을 흡수한다는 개념도, 그저 게임상에선 흐리멍덩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던전을 만들기 전에는 벌레들을 직접 사냥하고 다녔지, 그 마스터가 심장을 직접 꺼내 땅에 박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럼……. 그 마스터는 누구인가요?”
“죽었어, 곧바로 소멸되었단다.”
이런 몸이 되고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몬스텉들에 대해서도, 생명에 대해 가볍게 여기게 되었지만, 아직도 운디르나 선배님이 목숨에 대해 저렇게 가볍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감각이 든다.
운디르나 선배님이 황동 판에 걸터앉더니, 자신의 정수를 가져온 크리스탈 유리잔에 담는다.
“세이나, 마실래?”
“그, 정수를 마셔도 되는 건가요?”
“응응, 괜찮아! 나의 정수는 불같은 마스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괜찮으니까, 세이나는 정수를 마셔본 적이 없니?”
“네……”
나는 어색하게 선배님의 정수가 담긴 컵을 들었다.
항상 나는 남들에게 DMP 음식을 제공하는 일만 했지, 받아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파티장에서는 정수를 권하기도 하니까 굳이 처음은 아니었던 걸까? 164번 불의 정령에게도 받았을 정도니까……
“괜찮아, 마셔 봐. 물이랑 다르지 않아.”
“네,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잔을 덥석덥석 물어 어색하게 물의 정수를 입에 갖다 대었다.
하지만 그 맛이 너무 부드럽고 달달해서 쉽게 마실 수 있었다.
다 마시고 나자, 선배님께선 방긋방긋 웃으시고는, 일어나 꾸물꾸물 걸어가신다. 나는 천천히 선배님이 남긴 촉촉한 바닥을 뒤따랐다.
“여기는 옛날에 파티가 열리던 장소. 신입 마스터 모임은 이 장소에서 네임드들을 만들어주기 위해 모이던 모임인데, 어느새 다들 독립하고 2대, 3대째로 이어지면서 이렇게 그냥 파티 형식이 되었네.”
너무 담담하게 역사 이야기를 하는 2천 살 넘은 운디르나 선배님.
어쩌면 갓 태어난 나에게 소멜을 주신 것도, 그런 옛날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내가 7대 마스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불리더라고. 아, 저쪽에도 또 다른 모임이 있네.”
홀을 통과해서 나오니 여러 마스터가 모인 공간이 있다.
여기 모인 마스터들의 모습은 약간 이상하다.
다들 정수를 잡고 뭔가 몰두하는 모습, 옆에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먹는 정수와 고순도의 정수를 비교하고 있다.
“음, 뭐 이런 모임도 있는 법이지. 세이나는 마력이 많은 편이지만, 이 마스터들은 너무 적어. 그래서 최대한 정교하게 네임드들을 만들려고 연구하는 거지.”
“아……”
주변에선 그냥 정수만 내고 마구 섞어서 만들면 만들어지는 현상밖에 없어서 몰랐다.
이들은 정말 열심히 정수를 내지만, 내가 가장 처음 냈던 페트병 하나만큼의 정수도 내지 못한다. 물론 고순도의 정수들이지만,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의 정수에 비하면 격이 너무 낮다.
그걸 유리병에 담고 열심히 섞는다. 이들도 DMP 메뉴가 없었다면 던전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정수로 소환하는 법을 알기 이전에는, 경험을 꽤 많이 쌓은 녀석들에게 정수를 주입해서 네임드를 만들었어.”
“그러면 텔레르나 씨도……?”
“아니, 텔레르나는 정수에서 태어난 1호.”
듣기로는 텔레르나 씨는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났다고 들었는데, 옛날 일은 쉽게 왜곡되는 법인가 보다.
조금 더 선배님과 걸어가다 보니 푹신하고 달콤한 과자들이 가득한 공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장난감 같은 것들도 많다. DMP를 뽑아내던 고문 도구들이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다.
“저것도 추억이네.”
“…… 무섭게 생겼는데 재미있게 보이네요.”
“그렇지, 마스터는 저 고문 도구 위에 올라가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인간들은 극한의 공포를 느낄걸?”
“그래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요. 교육에 좋지 않아요.”
“그럼 나는? 나도 아이한테 보여주고 있는 거 아닐까?”
“선배님!”
아무리 그대로 선배님이 나를 아이 취급하는 건……
내가 선배님의 던전에서 태어났으니 맞는 건가?
어느새 버튼을 눌러 차원 이동한 듯한 이 세상을 다시 태어났다고 믿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뭐, 그쪽 일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고 말이다.
선배님은 그러는 동안에도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열심히 뒤따랐다.
이번에는 세 개의 종족이 새겨진 조각상이 가운데 놓인 또 다른 홀이 나타난다.
“이건…… 맞아, 선배님, 왜 스스로 잡종이라는 마스터들이 생겨난 거죠?”
“뭐? 스스로 불렀다고? 그건…… 아휴,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거늘.”
선배님은 그런 차별적인 어휘를 싫어하시는 듯, 질색하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세이나, 세 종족이 던전 마스터가 되기 쉬운 이유가 뭘까?”
“종족 스킬이죠, 정수를 낼 수 있으니까.”
“종족 스킬은 일반 몬스터나 네임드들도 쓸 수 있단다. 고유 스킬, 혹은 특수 스킬이라 불리는 것들도 다들 가지고 있지.”
“그럼……”
“세 종족이 가진 정수가 가장 순도가 높기 때문이야. 강력하기 때문이지. 용은 힘의 정수를, 몽마는 꿈의 정수를, 정령은 원소의 정수를.”
“거기에서 벗어난, 힘을 가진 존재들이……?”
“그리고 세 종족만이 가진 강인한 심장. 다른 녀석들은 심장이 약해서 코어로 내놓아도 쉽게 깨져. 이건 오랫동안의 실험으로 내려온 사실이야. 그리고 어떤 녀석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심장을 내어놓을까?”
‘저희요?’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역시 잡종에 대한 나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면 잡종들은 어떤 식으로?”
“다른 마스터의 심장을 노려 빼앗거나, 혹은 정말 스스로 마스터가 되거나.”
“전쟁도 일어나지 않나요? 마스터가 다른 마스터를 정복하고, 네임드에게 심장을 탈취하라고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괜찮아, 범죄도 아니고, 정당한 방식으로 빼앗은 거잖니. 독립 때와 마찬가지로 취급. 세이나, 혹시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니?”
“……”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당장 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던전 마스터인 라크라스가 선전 포고를 했으니까.
“그럼 나는 슬슬 다시 일하러 가야 할 것 같네, 또 누가 일을 벌인 것 같다.”
“네, 선배님.”
선배님은 물처럼 흘러 사라졌다.
나는 이제 일어났을 네임드들을 불러내었다.
시엘과 타피는 멍한 듯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보고 달려온다.
“주인님! 뭐 하고 계셨나요?”
“마스터, 안쪽은 너무 답답해.”
“알았어, 알았어. 파티를 즐기러 갈까?”
“”네!””
나오자마자 시끄러운 아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파티장을 돌아다녔다.
다니면서 여러 가지 정수를 먹어보고, 164번 불의 정령과도 친해졌다.
그의 이름은 라그나. 불의 정수를 먹어 봤는데 그렇게 뜨거운 맛이 아니라 매운맛이었다.
또, 타피가 경계하라고 했던 투트리스, 120번 냉기의 정령과는 대화할 시간이 한 번도 없었다.
1년 뒤에도 만날 것 같지만, 그때는 나에게 질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도 이 파티장 내에선 아름다운 것으로 꽤 유명한 듯하다.
그리고……
“저와 결혼, 크흠. 아니, 앞으로 영원히 함께 걷지 않겠습니까? 세이나 마스터님.”
“타세리안 마스터님, 싫은데요? 저번에 저한테 몰래 [매혹]을 거셨잖습니까?”
“네……? 제가 그랬다고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타세리안 씨는 역시 첫 날에 그런 의미로 접근했었 던 것 같다.
그래도 저런 의외의 면을 보고는 이후에 깔깔 웃으며 넘겼다.
어쨌든 사과는 받았고, 남은 일주일 동안은 여러 전투와 결투, 혼란 속에 펼쳐지는 파티를 즐기며 다양한 아군과 적을 구분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의 스위트 던전으로 돌아오는 때는, 가까운 운디르나 선배님과 함께 텔레르나 씨의 등을 타게 되었다.
텔레르나 씨와 오랜만에 만나고, 기쁜 듯한 고동소리를 듣자 나도 모르게 텔레르나 씨를 쓰다듬었다. 거대한 베히모스의 모습이 부끄러운지 살짝 붉어지는 모습은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