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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속 서큐버스-89화 (89/95)

00089 <-- 복구와 탐색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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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피는 남은 힘으로 21개의 막사를 다 돌아보았다.

보고 느끼는 나도 괴로웠지만, 본인인 타피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인간들의 땀 냄새, 그건 먹잇감의 냄새가 아니라 짐승의 냄새와 같았고, 코가 민감한 타피는 마지막 막사를 돌아보고, 밖으로 나와 시선에서 벗어난 순간 은신이 풀릴 정도였다.

‘도저히이- 모하겠어오-‘

눈이 핑핑 돌고, 타피는 마법으로 땅굴을 파고 난 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낮 시간 동안은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피곤한 것 같다.

나도 감각 공유를 오랫동안 한 탓인지, 타피와 감각이 연결되어 머리가 어지럽고 코가 이상하다. 마치 인간들의 땀 냄새가 코에서 머무는 느낌이다.

“아……”

타피가 깨어나는 동안 뭔가를 하기 위해 앞에 써놓은 메모지를 보았다.

네임드를 만들기 위해 써놓은 것, 인간들의 지휘는 엘타리스에게, 그리고 자연 필드의 수복에는 시엘을 맡겼으니 남은 건 흙 필드다.

엘타리스에게 잠시 감각 공유를 걸자, 아침운동을 하는 엘타리스의 개운한 기운을 받을 수 있었다.

‘마스터님, 무슨 일이신가요?’

‘으응…… 아냐, 오늘부터 인간들만 봐 줘. 흙 필드에 필요한 네임드를 소환할 거야.’

‘오늘이네요…… 그동안 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아냐,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

엘타리스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언제나 억누르며 인간들을 바라본다.

인간들은 아침 운동을 하고 난 뒤에 다시 복구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어제 나가자마자 짓기 시작한 돌로 만들어진 성벽은 꽤나 그럴듯한 터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엘타리스는 여태까지 지휘하면서 인간들을 죽이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느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많이 피로했었던 것 같다.

다소 개운하기는 했지만, 타피에게서 육체적 피로를, 엘타리스에게서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나니 나도 덩달아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다.

메모지를 보면서, 다음 필드에 생겨날 아이를 미리 생각한다.

1. 흙 필드를 다스릴 것

2. 자기 보호는 가능할 것

3. 몬스터들을 다룰 수 있는 정도의 지능이 있을 것

그래, 뭔가 뒤에 더 조건이 붙었던 것 같은데 이 정도만 해결되어도 좋을 거다.

손을 올리고, 시간의 정수를 몸에서 뽑아낸다. 동시에 꿈의 정수도 뽑아낸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성장하면서 쌓여온 정수가 내 앞에 점점 모이기 시작한다.

“아……”

무심코 느낀 현기증, 감각 공유에서 온 스트레스 때문일까?

나는 세 조건을 생각하다가, 문득 자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아니, 고개를 가로로 휘젓고 제대로 다시 정신을 차린다. 뭔가 조건이 더 있었는데, 모르겠다.

정수를 다 뽑아내고 난 뒤에는, 맥동하는 혼합 정수를 바라본다.

나는 마력도, 정신도, 체력도 다한 상태로 코어 위쪽의 유리 바닥에 엎드린 채로 움직이는 액체가 보인다.

다음엔 나를 전속으로 보좌할 네임드도 있어야 할지. 미심쩍게 웃으며 정수가 형체를 이뤄가는 걸 희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처음엔 원형으로, 점점 찰흙처럼 바닥에서부터 쌓여가며, 인간의 형체를 갖춰가는 그 정수는 언제 봐도 신기하다.

대략 10분 정도를 멍하게 바라봤다. 다른 때는 5분 안쪽으로 만들어지는 네임드가, 오늘따라 늦고 게으르게 나타난다.

이전에는 너무 활발한 아이들도 있었으니, 가끔은 게으른 아이도 괜찮지 않을까?

문득 제작 실패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주 천천히 형체를 갖춰가는 모습을 보면 실패한 건 아닌 듯하다.

15분이 지났을 때, 그제야 점점 혼합 정수가 세세한 생김새를 갖춰나간다. 색이 빠지기 시작한 건 20분째였다.

“음…… 너무 느린 거 아니야?”

나도 이제는 겨우 일어날 수 있었고, 몸에 완전히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는 없겠지만 옆으로 누워 정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코어에서는 이틀 동안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 탓인지 마력이 별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30분이 되었을 때 드디어 나타났다.

이름: 없음

종족: 시간의 미라

레벨: 15

특수 스킬: 수면, 부활, 시간 감속, 시간 정지, 전략가

바로 나타난 네임드의 정보 창을 손가락만 까닥거리며 열어보니, 저런 형태가 나온다.

대체 특수 스킬에 붙은 수면이 뭘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구나.

“호오……. 당신이 주인님?”

미라, 맑은 보라색 눈동자에, 덧없는 듯한 미모의 소녀, 몸의 윤곽은 가냘프고 귀찮은 듯 대충 감은 붕대는 군데군데 살집이 보이게 휘감겨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화장지로 대충 휘감고 자기가 미라라고 흉내 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사실상 붕대로 감긴 부분은 얼마 없고, 새하얀 피부를 대부분 드러내고 있다. 머리카락은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은발, 미라면 보통 대머리를 생각하지만 대체 미라가 맞는 건지 묻고 싶을 정도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외형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소녀다. 미라의 특징이란 겨우 대충 휘감은 붕대밖에 없다.

“아…… 맞다.”

나이 제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뭔가 잊어먹은 게 있었는데 나이 제한이었다.

“주인님, 졸려. 같이 잘래.”

“태어나자마자 자는 게 어디 있어? 야!”

“졸려어……”

그 상태로 내 곁으로 다가와 눕는다. 나는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바로 흙 필드에 올라가 각종 권한을 주고, 필드를 되살리라는 명령을 내릴 참이었는데, 벌써 내 곁에 와서 새근새근 잠을 잔다. 심지어 머리엔 이마에 한 줄 감은 붕대밖에 없다.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붕대를 떼어서 제대로 감아주려고 하니, 피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붕대가 아이의 피부라는 것 같다.

“…….”

“코오- 후우……”

이 미라는 벌써 잔다. 내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는데도 잔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름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게으른 네임드가 과연 필드를 관리할 수 있는지, 지능은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냥 차라리 나무늘보에서 이름을 따와 지을까, 얼굴을 보면 너무 귀엽고 순수한 아이라서 싫어할 것 같다. 저 얼굴로 울면 내가 감당 못 할 것 같다.

“음…… 네 이름은 ‘슈로미’야.”

다소 수줍게 말해버린 것 같은데, 이 아이는 들은 건지 아닌 건지 그냥 잠을 잔다.

정보 창을 열어보니 확실히 이름이 붙은 것 같긴 하다.

이름: 슈로미

종족: 시간의 미라

레벨: 15

특수 스킬: 수면, 부활, 시간 감속, 시간 정지, 전략가

보통 이름을 붙여 주면, 일어나서 고맙다고 할 법도 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아이는 아무래도 엄청 게으른 것 같다.

뭐지,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넣었길래 이런 아이가 태어난 거지?

하지만 정수를 만들 때를 되살려 보니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 그때 문득 자고 싶다고 한 게……”

틀림없이 그것 때문에 잠탱이 속성을 가진 녀석이 나타난 것 같다.

“슈로미, 슈로미 일어나.”

“흐으으- 음, 더 잘래-“

아무래도 글러 먹은 아이다. 이젠 코에 방울까지 달고 잔다.

분명히 원한 건 스켈레톤 대군을 이끌고 인간들을 몰살하는 네임드였는데, 이런 아이가 태어난 이유가 대체 뭘까……

“야아아아아! 일어나아아아!”

“주인님, 지금 낮이야, 잘 시간.”

“아……”

몬스터는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난다. 그러면 잘 시간은 맞지, 하하.

나도 일어나서 이 아이에게 덮어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리파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소멜을 불렀다. 물 필드 위에서 둥둥 떠다니며 햇살을 받고 있었다.

‘미야아앗! 저는 마스터에게 달려갈게요!’

‘고마워, 소멜.’

곧바로 달려온 소멜, 인간 폼이지만 갑작스럽게 변신한 탓인지 지느러미를 지우지 못했다.

달려와 내 이마를 만지고, 이리저리 몸 상태를 살펴본다. 내 외모나이보다 더 어린애한테 이런 걸 받고 있다는 게 슬프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스터, 오늘도 아파?”

“아냐, 마력을 많이 써서 그래.”

“미야앗! 마스터 병약해!”

“…….”

“그런데 옆에는 누구?”

“네 동생이야. 아니, 언니인가?”

“언니 할래!”

소멜은 방긋방긋 웃으며 슈로미의 붕대를 이리저리 뜯어본다. 하지만 뜯기지는 않는다.

분명 만져보면 천하고 비슷한 느낌이 들 텐데, 저 아이는 드디어 피부가 뜯기는 감각에 이마에 살짝 골이 생기며 반짝이는 보라색 눈을 뜬다.

“호오, 너 누구?”

“미야앗! 나는 소멜이야!”

“졸려, 만지지 마.”

“언니, 언니, 일어나~”

소멜이 슈로미의 어깨를 마구 흔들지만, 슈로미는 또 잠들었다.

계속 흔들다가 재미없었는지, 다시 내게 다가온다.

“마스터님, 저 언니는 대체 뭐야? 이상해? 맨날 자.”

“미안해…… 소멜…… 저 아이도 그렇고, 나한테 뭐라도 덮어줄 수 있을까?”

“부탁! 마스터님의 부탁! 맨날 애기 취급하던 마스터님이!”

소멜은 맨날 아기나 인형 취급했으니, 소멜은 거기 어울려 주면서도 내심 내가 뭔가 시키는 걸 바랬던 걸까?

차라리 소멜에게 인간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일단 이 슈로미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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