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팔을 다 뻗기도 전에 손끝에 단단한 돌덩이들이 만져진다.
···!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내 위치가 조금만 더 앞이었다면 이 돌무더기를 내가 정통으로 맞았을 것이다.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진짜, 진짜로 죽을 뻔했다.
혼자 뒤떨어져 걸었던 탓에 하필 나와 다른 사람들 무리 사이에 벽이 생기고
말았다.
“다치진 않았어?”
“괜찮아요?!”
벽 너머에서 먹먹하게 들려오는 박 씨 아저씨와 이정연의 목소리.
“···살아있어요! 한 걸음만 더 내디뎠으면 저 돌덩이 아래 쥐포가 될 뻔했지만.”
“이 상황에 무슨 그런 살벌한 농담을 해요!”
“휴···. 다치진 않은 거지? 하여간에 다행이다.”
이 상황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잠시 목숨을 연명한 것뿐일지도 모르는데.
눈앞이 어두컴컴하다.
내 가방에는 비상용 발광석이 없다.
한 달 전 전투에서 깨져버렸는데, 은근히 비싸서 사는 걸 미루고 있었다.
어차피 다른 헌터들이랑 같이 레이드 가니까 좀 얹혀가도 되는 거고.
작은 것부터 절약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확실히 안일해져 있었던 것 같다.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후회막심이다.
“제가 스킬을 쓸까요? 살짝만 터트리면 공간이 생길 것 같은데.”
이정연의 제안을 박 씨 아저씨가 반대했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에서 다른 충격을 가하면 던전이
다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야. 안 건드려도 지금 불안한 상태라고.”
“그렇다고 이 돌을 다 들어 옮기는 건 너무···.”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내 귀에 비관적인 말이 들릴 거라는 걸 의식한 듯하다.
‘나머지는 다 줄행랑쳤나 보군.’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벽 너머에는 박 씨 아저씨와 이정연, 두 사람만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다······.”
그때, 바닥에 닿아있는 내 손바닥에 진동이 느껴졌다.
땅에 직접 닿았기에 느낄 수 있을 만한 미미한 진동.
머지않아 한 번 더 무너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크게 소리쳤다.
“두 분이 나가서 빨리 신고해주세요! 그게 제일 나은 방법인 것 같아요!”
던전 안에서 외부와의 통신은 불가능하다.
망설이는 이정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기 혼자 두고 가기에는···.”
“같이 있다고 답이 나오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런 고민 할 사이에 움직여
요! 지금 나간 사람들은 제가 살아있는지도 모를 테니까요.”
사실 내 상황이 어떻건 신경도 안 쓸 것이다.
잠시 후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는 말이야. 빨리 나가서 구조대를 불러오는 게 낫겠어.”
“···조금만 더 버텨요! 금방 돌아올 테니!”
두 사람의 다급한 발소리가 멀어져간다.
“난 어떻게 되려나···.”
구조반이 오기까지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
괜찮은 척 보냈는데, 막상 어둠 속에 혼자 있으니 괜찮지 않다.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곧이어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괜히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오싹했다.
아까 분명 하급 고블린을 다 처리했었다.
아직 살아남은 놈은 없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지.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배낭 속을 더듬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만약을 위해 챙겨뒀던 비상식량이 만져진다.
하지만 물은··· 아까 박 씨 아저씨에게서 받았던 물병뿐.
받자마자 벌컥벌컥 마시는 바람에 한두 모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아껴먹을걸.”
늦은 후회를 하며 입맛을 다셨다.
우르르릉!
다시 한번 던전 전체가 진동했다.
무너질까 봐 두 손으로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렸다.
F급 헌터인 나에게는 내 몸을 보호할 능력조차 부족하다.
시간이 흘렀다.
시계가 있어도 볼 수가 없으니 정확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느낌상 일주일은 지난 것 같다.
‘오고 있긴 한 건가.’
맛대가리 없는 에너지바가 조금 남아있지만 물은 똑 떨어졌다.
몇 시간 전 참다 참다 털어 넣은 것이 마지막 한 방울.
어쩌면 이렇게 죽을지도 모르겠다.
한심한 인생이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이룬 것은 없고 아쉬운 것이 너무나도 많다.
나도 강해지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 날 무시했던 놈들을 뛰어넘어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 떠나서 지금 순간에 가장 간절한 것은···.
‘밥··· 밥 먹고 싶다.’
뜨끈한 쌀밥에 된장에 계란 후라이에 김치에···.
한번 생각하니 먹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배가 고파 미치겠는데 이제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우르르릉! 쿠쿠쿠쿵!
또 한번 던전이 울렸다.
팔을 들 힘도 없어서 가만히 늘어져 있었다.
더이상 죽음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콰콰콰쾅!
이번에는 상당히 길었다.
한참 후, 진동이 멎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고개를 들자 어두컴컴하던 던전, 저 쪽 끝에 희미한 빛이 보인다.
들어왔던 곳과 반대쪽 방향이다.
미약한 빛이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눈이 부신 느낌이었다.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힘이 생겼다.
저 끝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혹시 모른다.
또다른 출구일지도.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서서 걸었다.
그 끝에 서 마주한 건 희게 빛나는 게이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
그곳에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
* * *
[압구정역의 돌발 던전에서 실종되었던 30대 남성 헌터가 오늘 오전 구조되었
습니다. 한 달 전 던전 붕괴가 발생했을 당시 내부에 갇혀······.]
병원 대기실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실감 나지 않지만 저 뉴스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그리고 저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려 50년.
던전 밖 이세계에서 보낸 세월이다.
‘그런데 겨우 한 달이 지났다고?’
산전수전 다 겪어서 무슨 일이 있든 놀라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
나 보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네요. 한 달 동안 던전에 조난 당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F급 헌터라면···.”
“다행히 비상식량과 물이 넉넉해서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래도···.”
“이상 없는 거 확인했으니 일어나보겠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나는 그를 뒤로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기나긴 세월.
많은 것이 바뀌었고 사사로운 감정들은 낡은 가죽처럼 닳아버렸지만, 가족을
향한 그리움만은 점점 더 깊어졌다.
현관문 앞에 서니 자연스럽게 비밀번호가 생각났다.
띠띠띠띠-
철컥.
비밀번호를 다 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오빠!”
내 동생 최지수.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뜬 그 얼굴이 너무나도 반갑다.
급하게 나오는 듯 자켓을 반쯤 걸치다 만 모양이다.
“괜찮아?! 어떻게 혼자 집에 왔어! 연락을 늦게 받아서 이제야 나가려던
참···. 아니, 그보다도 병원에 빨리 가야···.”
정신없는 듯 횡설수설하는 지수에게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병원에서 아무 이상 없댔어. 나도 멀쩡하고, 크흠.”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는데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지고 목이 메어왔다.
헛기침하는 척, 간신히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감췄다.
20년, 30년··· 해가 갈수록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옅어져 갔다.
만에 하나 다시 보게 되더라도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되어있을 거로 생각
했다.
아니, 솔직히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게, 헤어지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다시 보게 되니 울컥
하지 않을 수 없다.
빠르게 눈을 깜빡여 살짝 맺힌 눈물을 증발시켰다.
잘못하면 감정을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으니 애초에 차단해야 했다.
겨우 한 달 실종됐던 거로 대성통곡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을 테니.
“아니 그래도···.”
지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내 얼굴을 이 방향 저 방향에서 살핀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옷은 뭐야?”
지수가 내 옷차림을 지적했다.
‘역시 티가 나나 보군.’
웬만하면 모른 채 넘어가길 바랐는데.
나는 지금 이세계의 옷을 입고 있었다.
최대한 지구의 평상복 같은 걸로 갖춰 입었지만, 옷의 구조 자체가 지구의 것
과는 다르다.
눈썰미 좋은 사람은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하물며 평소 내 스타일을 알고 있는 가족 눈에는 당연히 이상한 게 눈에 보일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이세계로 넘어간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옷은 엉망으로 찢겼었다.
누더기나 다름없었지만 지구의 흔적을 버릴 수 없어 꿰매고 덧대어가며 계속
입고 다녔지.
그 옷은 10년쯤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미련과 함께 버렸었다.
나는 동요 없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친구가 던전 전투복으로 개발 중인 옷이야. 실전에서 어떤지 얘기해달라고
해서 입고 갔었어.”
“친구? 친구 누구? 연락 다 끊겼다면서.”
얘가 아픈 곳을 찌르네.
“있어. 네가 모르는 애. 이제 좀 들어가자. 언제까지 입구에서 이러고 있을
거야.”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눈길을 모른 척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기억 속 그대로였다.
뭐, 이곳 시간으로는 한 달밖에 흐르지 않았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도 신기하네.’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지수가 졸졸 따라온다.
“병원에서 정확히 뭐라 그랬는데? 다친 데는 없어? 수액이라도 맞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 이상 없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하다고 했어. 좀 믿어주라.”
“진짜 걱정했는데 너무 멀쩡해 보여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알겠어. 그럼 일단 밥부터 먹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지수는 본인이 직접 식사를 준비하려는 듯 좁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기억 속 우리 남매는 우애가 좋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밥까지 챙겨주는 정
도는 아니었다.
서로 뭘 먹든 별 신경 안 쓰는 평범한 남매 관계.
오늘은 한 달 만에 구조된 나를 위해 특별히 나서는 모양이다.
하지만···.
“네가 직접 요리하려고?”
“응. 속 불편할 테니까 죽을 끓일까?”
“아니!”
50년 만의 한식.
첫끼를 죽으로 때우기는 너무 아쉽다.
그리고 호의는 고맙지만 수락하고 싶진 않다.
“내가 할게.”
“아니, 좀 쉬어야지.”
“오랜만에 먹는 첫 식사인데 시커먼 계란을 먹고 싶진 않거든.”
“······.”
지수는 유독 부엌에서 부주의해졌다.
뭔가 해보겠다고 시도는 여러 가지로 하는데 결과물은 늘 같았다.
지옥불에서 튀어나온 듯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무튀튀한 덩어리.
아무래도 성격이 급해 자꾸 강불을 쓰는 게 문제인 것 같다.
내 팩폭에 할 말이 없는지 최지수가 조용히 옆으로 비켜 부엌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살짝 흘겨보는 게 느껴지지만 가뿐히 무시했다.
냉장고를 열었다.
어딘지 어수선하고 휑한 냉장고 안.
내가 없는 동안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게 눈에 보인다.
“···너 뭐 챙겨 먹긴 한 거냐?”
“그러려고 했었지. 오빠가 돌아오면 잔소리할 것 같아서.”
“안 먹었다는 거네.”
지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쪼들리는 형편에 뭘 많이 사 먹지도 못했을 거고, 보나 마나 매일 라면이나
끓여 먹었겠지.
다행히 시도했다는 건 사실인지 뭐가 있긴 있다.
“너는 밥만 얹어놔.”
“알겠어.”
나는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두부를 집어 들고 순순히 대답하는 지수를 지나
쳤다.
그리고 도마와 칼을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실종됐다 돌아온 오빠를 두고 편히 쉬기가 좀 그런지 최지수가 괜히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옆으로 슬쩍 오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묻는다.
“아니··· 뭐야,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