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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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으로 돌아오자 나는 우선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벌거숭이가 되어, 

거기에 천천히 몸을 담갔다. 하지만 몸이 쉽사리 훈훈해지지는 않았다. 몸의 

내부 근육까지 얼 대로 얼어서, 창 속에 몸을 대면 되려 한기를 느낄 

지경이었다. 나는 그 한기가 사라지기까지 탕에 잠겨 있을 작정이었는데, 그러기 

전에 김에 쐬여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해서 단념하고 이내 탕에서 나왔다. 

그리고 창유리에 머리를 대어 좀 식힌 다음 브랜디를 잔에 가득히 따라 단숨에 

마시고나서 그대로 침대에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얼룩 한 점 없는 

머리로 푹 잠을 자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안 되었다. 잠을 잘 수는 

절대로 없었다. 나는 경직된 의식을 간직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아침이 왔다. 흐릿하게 어두운 회색 아침이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다 

뿐이지, 하늘은 이음매 하나 없이 회색 눈 구름에 뒤덮이고, 거리는 구석구석이 

그 회색으로 듬뿍 물들어 있었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망쳐버린 

넋이 살고 있는 망쳐버린 거리.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잠들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진 않았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엔 내 머리는 너무나 

피곤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나의 몸과 정신의 거의 모든 

부분은 잠을 희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머리의 일부가 딱딱하게 굳어진 채 

완강히 잠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신경이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특급 열차의 창문으로 역이름 표시를 읽어내려고 할 때의 

초조감과도 비슷했다.

  역이 다가온다- 자, 이번엔 눈길을 집중기켜 틀림없이 읽어 내야지,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이다. 글자의 형상은 막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은 뒤로 지나쳐 버린다. 그런 일이 끝없이 계속 되었다. 연달아 역과 역이 

다가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변경의 작은 역들. 열차는 몇 번이고 기적을 

울렸다. 그 드높은 음향은 벌처럼 나의 으식을 찔러댔다. 아홉 시까지 그것이 

계속되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키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담념하고 

침대에서 나왔다. 안 되겠다, 결코 잠들진 못하겠는데, 하고 나느 느꼈다. 욕실에 

가서 수염을 깎았으나 제대로 다 깎아내기엔 몇 번이고 자신을 향해

 [난 지금 수염을 깎고 있는거야]

하고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뒤에 나는 옷을 입고 머리를 빗고,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창가의 좌석에 앉아 콘티넨탈 블랙퍼스트를 주문해서, 커피 두 잔을 

마시고, 토스트 한 개를 먹었다. 토스트 한 개를 먹는 데도 퍽 긴 시간이 

걸렸다. 회색 구름이 토스트마저도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먹으면 솜먼지 

같은 맛이 났다.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것 같은 날씨였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 식사 

메뉴를 한 50번은 되읽었다. 하지만 머리의 딱딱함은 내내 풀리지 않았다. 

열차는 여전히 계속 달리고 있었다. 기적 소리도 들렸다. 치약이 굳어서 

말라붙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딱딱함이었다. 나의 주위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커피에 설탕을 넣고,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고,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 베이커 에그를 자르곤 했다. 절꺽, 절꺽, 

절꺽하는 접시와 식기가 맞부딪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꼭 차를 

조립하는 공장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문득 양사나이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호텔의 어딘가에 있는 조그마한 시공의 일그러짐 속에 그느 있는 

것이다. 음, 그는 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무엇인지를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나로선 읽어낼 수가 없다.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머리 

속이 굳어져 있어서 글자를 읽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멈춰 있는 것밖엔 읽을 

수가 없다. 

 웨이터다. 그는 흰 윗도리를 입고, 커피 포트를 두 손으로 들고 있다. 마치 

무슨 상품처럼.

 [커키를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정중하게 질문을 한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가 가버리자 나는 

일어나서 레스토랑을 나섰다. 절꺽, 절꺽, 절꺽, 그러는 소리가 내 등 뒤에서 

언제까지나 계속되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또 욕탕에 들어갔다. 이번엔 더는 

한기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욕조 속에서 천천히 몸을 펴고, 시간을 들여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듯 몸을 관절 하나 하나를 다독거려 갔다. 손가락 끝도 

제대로 움직이도록 했다. 그렇지, 이건 내 몸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현실적인 세계에 있는방 안의, 실제의 욕조 속에 있다. 특급 

열차에 타고 있지도 않다. 기적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젠 역이름을 읽어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욕탕에서 나와 침대에 

기어들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열 시 반이었다. 어이구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젠 잠자는 건 단념하고 산책이나 나갈까 하는 생각조차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는 중에 돌연 잠이 찾아왔다. 무대의 

암전같은 일순의 급격한 잠이었다. 잠에 빠져든 순간의 일을 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거대한 회색 원숭이가 해머를 들고 어디선지 모르게 방으로 

들어와 나의 뒷머리를 맘껏 두드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절한 것처럼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것은 딱딱하고 긴장된 한 잠이었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경 

음악도 없었다. <문리버>도 <사랑은 물빛>도 없었다. 그저 단순하고 맛이 없는 

잠이었다.

 [16의 다음 수는?]

하고 누군가가 물었다.그렇지, 난 잠들어 있다. 딱딱하디 딱딱한 철구속에서 

나는 몸을 동그랗게 해가지고 다람쥐처럼 깊이 잠들어 있다. 빌딩을 허물때에 

사용하는 그러한 철구. 속이 도려내져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잠들어 있다. 

딱딱하고 긴장하고 단순하고... 무엇인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기적 소리일까? 

아니지, 그렇지 않아, 틀려, 하고 갈매기들이 말한다. 누군가 철구를 버너로 태워 

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소리가난다. 아니지, 틀려,그렇지도 않아, 하고 

갈매기들은 소리를 모아 말한다. 그리스 극의 코러스처럼.

  전화다,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갈매기들은 이젠 없어졌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어재서 갈매기들은 없어져버린 것인가? 나는 손을 뻗어 배갯머리의 

전화를 들었다.

 [예]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찌잉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뜨르르르르르르, 

하는 소리는 다른 공간에서 울리고 있었다. 문앞의 벨 쇠리다. 누군가 문앞의 

벨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문의 벨]

하고 나는 소리내어 말해 보았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이젠 없었고, 아무도

 [정답] 하고 칭찬해 주지는 않았다. 나는 욕의를 걸치고 입구까지 가서,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문을 열었다. 프런트의 여자아이가 쓱 안으로 들어서더니 문을 

닫았다. 회색 원숭이에게 얻어맞은 뒷머리가 욱신거렸다. 이렇게 호되게 

두드리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하다. 머리가 움푹 

들어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녀는 내 욕의를 보고, 그리고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준썹을 찌푸렸다.

 [어째서 오후 세 시에 자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오후 세 시]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나로서도 어째서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어째설까?]

하고 나는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몇 시에 잤는가, 도대체?]

 나는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생각지 말아요]

 하고 그녀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그리고 소파에 걸터앉아서, 안경테에 잠깐 

손을 대곤 내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생님, 그런데 그 얼굴이 왜 그래요?]

 [응. 그러리라고 생각해]

하고 나는 말했다.

 [안색도 나쁘고 부석부석하고. 열이 있는 것 아녜요? 괜찮아요?]

 [괜찮아, 푹 자고 나면 제대로 돼. 걱정할 것 없어. 워낙 건강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아가씨는 휴식 시간?]

 [그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선생님 얼굴을 보러 왔어요. 어쩐지 흥미가 있어서. 하지만 방해가 된다면 

나갈게요.]

 [방해는 무슨 방해]

하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죽도록 졸립지만, 그러나 방해는 안 돼.]

 [이상한 짓도 안해요?]

 [이상한 짓도 안해]

 [모두 그런 말 하지만, 꼭같이 이상한 짓 한다구요.]

 [모두는 그렇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안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생각의 결과를 확인이나 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가볍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럴지도 모르죠.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것 같으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게다가 지금은 무엇을 하기엔 너무 졸립고]

 하고 나는 덧붙였다. 그녀는 일어나서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벗고, 그것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의자 등에 걸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엔 내 옆으로 오지 

않았다. 창께까지 걸어가서, 거기에 서서 물끄러미 회색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욕의 하나만 걸친 꼴이고, 게다가 말이 아닌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게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나에게도 내 사정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좋은 얼굴을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 것이다.

 [저어]

 하고 나는 말했다.

 [저번에도 말한 것 같지만,나와 아가씨 사이엔, 약간이긴 하지만 무엇인지 

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만 같아.]

 [그래요?]

하고 그녀는 무감동한 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한 30초 동안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

 [예를 들면?]

하고 30초 뒤에 그녀는 말했다.

 [예를 들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머리의 회전은 완전히 멈춰져 있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인 것이다 이 여자 아이와 나 사이에는 약간의 그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인가 상통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면도, 그래서서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달 뿐.

 [모르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좀더 이것 저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단계적 사고. 정리하고, 그리고나서 

확인하지.]

 [굉장해]

하고 그녀는 유리창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어투에는 야유의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별로 감탄하고 있다는 인상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고 

중립적이었다.

 나는 침대 속에 들어가 등받이에 기대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는 하얀 블라우스. 감색의 타이트한 스커트, 스타킹에 감싸인 날씬한 다리. 

그녀도 역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탓으로 그녀는 마치 낡은 사진 

속의 상같아 보였다. 그런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자신이 

무엇엔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발가마저 느낀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회색 하늘, 죽도록 졸리운 오후 세 시의 발기. 나는 꽤 오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뒤돌아서 나를 보았지만, 나는 그래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봐요?]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수영 학교에 질투하고 있는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고, 그리곤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사람]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상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약간 혼란해 있을 뿐이야. 사고를 정지할 필요가 있어.]

 그녀는 내 곁에 다가서서 내 이마로 손을 가져왔다.

 [뭐 열은 없는 것 같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푹 자요. 좋은 꿈을 꾸고.]

 그녀가 줄곧 여기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잠들어 있는동안 줄곧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하지만 그것은 무리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걸치고 방에서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가버리자, 엇갈리듯 또 회색 원숭이가 

해머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괜찮다니까. 그런 짓 하지 않아도 틀림없이 잠들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하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일격이 

가해졌다.

 [25의 다음은?]

하고 누군가가 질문했다.

 [71]

하고 나는 말했다.

 [잠들었군]

하고 회색 원숭이가 말했다. 당연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강하게 

쳤잖아. 잠들 건 뻔한 일이잖아, 하고. 혼수 상태라고 하는 게 정확한 어휘이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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