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키를 조수 자리에 앉히고, 창문을 열었다. 비는 조용히 계속 내리고 있
었다. 눈에 또렷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비였지만, 이 비는 아스팔트의
노면을 조금씩 연한 검정색으로 물들여 갔다. 비에 젖어 흙먼지 냄새도 났다. 우
산을 펴드는 사람도 있고, 개의치 않고 그대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
의 비다. 별로 바람이 부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조용히 곧바로 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시험삼아 손바닥을 창밖에 내밀어 보았지만, 약간
습기 찬 듯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유키는 창틀에 팔을 대고 그 위로 턱을 가져가 고개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으
로 얼굴의 절반을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한 채 오랫동안
움쩍도 하지 않았다. 호흡함에 따라 등이 규칙적으로 흔들릴 뿐이었다. 그것은
아주 희미한 흔들림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것은 호흡이었다. 그러한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약간의 힘을 가하기만 해도 팔꿈치나 고개가 툭 부러져버
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토록 취약하고 무방비한 상태로 보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는 내가 어른이 된 때문일까? 내가 불완전하긴 해도 내 나름대로
세계를 살악갈 방법을 터득하고 있고, 이 아이가 그것을 아직 터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아무 일도 안 해도 돼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유키는 말하고, 엎드린 자세로
침을 삼켰다. 삼킬 때에 부자연스러우리만큼 큰 소리가 났다. "어디든 사람이 없
고 조용한 데로 데려다 줘요.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
"바다도 괜찮아?"
"어디든 좋아요. 하지만 차를 천천히 몰아요. 너무 흔들리면 토해 버릴지도 모
르니까."
나는 그녀의 머리를 깨지기 쉬운 달걀을 다루듯이 살며시 손으로 받쳐 차안으
로 들여놓고, 머리 받침대에 기대게 하고는 창문을 절반쯤 닫았다. 그리고 교통
사정이 허용하는 한 천천히 차를 운전하여, 고꾸후쓰 해안까지 나갔다. 해안에
차를 세우고 모래사장까지 데리고 가자, 토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토하였다. 위 속에는 대수로운 게 들어 있지는 않았다. 토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물렁물렁한 갈색의 초콜릿 액체를 토해 버리자, 다음에는 위
액이나 공기 따위밖에 나오지 않았다. 가장 괴로운 방식으로 토하고 있다. 몸이
경련을 일으킬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몸이 쥐어짜여지고 있는 듯한 느낌
이 든다. 위가 주먹만한 크기로 오므라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녀의 등을
살며시 문질렀다. 여전히 안개 같은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유키는 비가 내
리고 있는 일 따위는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
의 위의 뒤쪽 부근을 가벼이 눌러보았다. 근육이 마치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
어져 있었다. 그녀는 면으로 된 여름 스웨터와 색이 바랜 블루진 차림에, 콘바스
의 붉은 농구화를 신은 채 모래사장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오므려 뒤쪽으로 돌려놓고, 등을 천천히 위아래로
계속 쓰다듬었다.
"괴로워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잘 알고 있어."
"이상한 사람이야" 하고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도 이전에 그러한 식으로 토한 적이 있거든. 아주 괴로웠어. 그래서 잘 알
고 있어. 하지만 이제 곧 가라앉아. 조금 더 견디면 끝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
10여 분 만에 경련은 멎었다. 나는 그녀의 입 언저리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토사물 위에 발로 모래를 모아 덮었다. 그리고 팔꿈치를 잡고 그녀의 몸을 부축
하여, 서로 기대어 앉을 수 있는 제방 쪽으로 데리고 갔다.
나와 유키는 비를 맞으면서 그대로 죽 거기에 앉아 있었다. 니시소오 바이패
스를 달리는 자동차의 타이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다에 내리는 비를 바라
보고 있었다. 이슬비이긴 해도 내리기 시작할 무렵보다는 그 기세가 약간 거세
져 있었다. 해안에는 두세 명의 낚시꾼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회색의 레인 햇을 쓰
고, 우의를 단단히 몸에 걸치고는, 커다란 낚시대를 기치처럼 물가에 세우고 가
만히 앞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밖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키
는 머리를 내 어깨에 푹 기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사
람이 멀리서 바라보았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사이가 좋은 연인들인 줄 알았으리
라.
유키는 눈을 감고, 여전히 아주 조용하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잠들어 있
는 것처럼 보였다. 습기를 띤 앞머리칼 하나가 이마에 달라 붙어 있고, 호흡함에
따라 비강이 희미하게 떨렸다. 얼굴에는 한 달전의 햇볕에 그을은 자취가 아직
희미한 기억처럼 남아 있었지만 자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는 그것이 어쩐지 건강
하지 못한 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비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닦고, 눈물 자국을 지워주었다. 가로막는 것도 없는 바다 위로, 비는 소
리도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잠자리의 애벌레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자위대
의 대잠 초계기가 둔한 소리를 내면서 몇 번이고 머리 위를 통과하여 갔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들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힘없는 시선을 내게
돌렸다. 그리고 바지 주너미넹서 버지니아 슬림을 꺼내어, 성냥을 그었다. 좀처
럼 불이 켜지지 않았다. 성냥을 그을 힘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버려 두
었다. "지금 담배를 피우면 좋지 않다" 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가까스로 담
배에 불을 붙이고는, 성냥개비를 손가락으로 튕겨 내버렸다. 그리고 두 모금 빨
고 이마를 찌푸리고는, 담배도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튕겨 내버렸다. 담배는 콘
크리트 위에서 잠시 타들어가다 이윽고 비에 젖어 껴졌다.
"위는 아직도 아픈가?" 하고 나는 물었다.
"아직 조금"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럼 좀 더 여기에 가만히 있자구. 춥지는 않아?"
"괜찮아요. 비에 젖는 편이 더 기분이 좋아요."
낚시꾼들은 여전히 태평양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낚시는 대체 어떤 점이
재미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고작 물고기를 낚는 일뿐이잖은가? 왜 그 정도
의 일 때문에 비 내리는 날에 온종일 물가에 서서 바다를 노려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는 취미라는 거이다. 신경증적인 열세 살짜리 소녀와
해안에 나란히 앉아 비에 젖어 있는 것도 취미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저, 아저씨의 친구 말에요." 하고 유키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묘하게 딱딱
하게 굳어진 목소리였다.
"친구?"
"응, 아까 그 영화에 나왔던 사람."
"본명은 고혼다라고 해." 하고 나는 말했다. "야마데선의 역이름과 똑같애, 매
구로 다음, 오오자키 못 미처에 있는 역말야."
"그가 그 여자를 죽였어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몹시 피곤한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고 어깨가 불규칙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마치 물에 빠졌다 갓 구출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로선 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죽였어? 누구를?"
"그 여자, 일요일 아침에 그와 함께 자고 있던 사람 말예요."
나는 그래도 아직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머리는 어쩔 수 없이 혼란되
어 있었다. 상황의 어딘가에 틀린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본래의 흐름
이 손상되어 있다. 그러나 그 틀린 힘이 어디서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파악할 수
가 없었다. 나는 절반쯤 무의식적으로 미소지었다. "그 영화에선 아무도 죽지 않
아 넌 뭔가 착각하고 있군."
"영화 얘기가 아녜요. 실제로 이 세계에서, 정말로 죽인 거예요. 난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유키는 이렇게 말하고 내 팔을 꼭 잡았다. "무서웠어요. 위 속에 뭔
가 무거운 게 꾹 처ㄴ어진 것 같았어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괴로웠어요. 무서
워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바로 그게 나타난 거예요. 알 수 있어요. 분명히. 아
저씨 친구가 그 여자를 죽였어요. 거짓말이 아녜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나는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
로 등줄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졌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
는 이슬비를 맞으며 몸이 궂어진 채로 가만히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치명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모든 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미안해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는지도 몰라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내 팔을 꼭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솔직히 말해,
난 알 수 없어요. 나는 그걸 사실이라고 느끼지만,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확
신을 가질 수는 없어요. 게다가 그런 말을 하면, 당신도 다른 여러 사람들과 마
찬가지로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
었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내게는 그게 분명히 보이고, 나 한 사람 속
에 그걸 가두어 둘 수는 없으니까요. 두려워요. 굉장히, 자신이 혼자서 그걸 떠
맡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내게 화를 내지 마세요. 너무 책망을 당하면
나는 무너져 버려요."
"아냐, 책망하고 있지 않으니까 마음을 가라앉혀 이야기해봐." 하고 나는 유키
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하였다. "네게는 그게 보여?"
"그래요, 분명히 그게 보여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그 사람이 죽었어요. 영
화 속의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였어요. 그리고 그 승용차로 사체를 운반했어요.
아주 먼 곳으로, 그 차, 당신이 한 번 나를 태워준 이탈리아 차 말예요. 그건 그
의 승용차죠?"
"그래. 그의 차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밖에 무엇을 알 수 있지? 천천히 마
음을 가라앉혀 생각해 봐. 아무리 세밀한 일이라도 좋아. 알 수 있는 일이 있으
면 가르쳐 주지 않겠어?"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는, 두세 번 시험하듯이 좌우로 흔
들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밖의 일은 별로 알 수 없어요. 흙 냄
새, 삽, 밤, 새 소리... 그 정도예요. 그 여자를 목졸라 죽이고, 그 차로 어디론가
운반하여 땅에 묻었어요. 그뿐예요. 하지만 말예요, 이상한 얘기지만 악의가 통
느껴지지 않아요. 범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요. 마치 의식 같아요. 아주 조용
해요. 죽이는 쪽이나 죽임을 당하는 쪽도 무척 조용해요. 이상한 조용함. 나로선
잘 표현할 수가 없어요.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처럼 조용해요."
나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 고요한 어둠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
려 했지만 안 되었다. 어떻게든 참고 견디며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했지만, 그것
도 안 되었다. 머리 속에 기록된 온 세계의 산물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나 흩뜨러져 버렸다. 나는 유키가 한
말을 그저 단순히 받아들였다. 그대로 믿은 것도 아니고, 믿지 않은 것도 아니
다. 그저 나는 마음 속에 그녀의 말을 자연히 스며들게 했을 뿐이었다. 그건 어
디까지나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포함하고 있는 힘은 압
도적이며 치명적이었다. 그저 그녀가 입에 올린 그 가능성이, 지난 몇 개월 동안
에 내 속에 막연히 형성되어 있던 어떤 종류의 체제를 분쇄해 버렸다. 그 체제
는 막연하고 잠정적이며, 엄밀히 말하면 실증성이 결여되어 있긴 해도, 그 나름
대로 확고한 존재감과 균형을 갖추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감이
나 균형도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 무엇인가가 끝
난 듯이 느낌이 들었다. 아주 미묘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무엇인가는 끝나
버린 것이다. 무엇인가는 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
다. 나중에 생각하자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또 고독해졌다. 비
내리는 모래사장에 열세살짜리 소녀와 둘이서 나란히 앉아 있는 나는, 견딜 수
없으리만큼 고독했다.
유키는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꽤 오랫동안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있어 주었다. 작고 따스한 손이었지만, 어쩐
지 현실의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 따스하고 작은 감촉은 과거 기억의 재
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따스하다. 하
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돌아가요" 하고 나는 말했다.
"집까지 데려다 주겠어"
나는 그녀를 하꼬네의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와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
다.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 눈에 띄는 테이프를 카 스테레오에 넣고 틀었다. 무
슨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그게 무슨 음악인지 통 알 수 없었다. 나는 운전에 의
식을 집중시켰다. 나는 손과 발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세밀하게 기어를
바꾸고, 주의 깊이 핸들을 잡았다. 와이퍼가 뚝 뚝 하고 단조로운 소리를 냈다.
나는 아메를 만나고 싶지 않아, 집의 계단 아래서 유키와 헤어졌다. "이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녀는 운전석의 창 밖에 추운 듯이 팔짱을 꼭 끼고 서 있
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덮어놓고 받아들이지 말아요. 내게는 단지 그게 보
였을 뿐이에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를 나는 전혀 알 수
없어요.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하진 말아요. 당신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난 무너
져 버리니까."
"미워하지 않아" 하고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네 말을 덮어놓고 받아들이지
도 않아. 하지만 어쨌든 언젠가는 사실이 타나나요. 안개가 걷히듯이 그것은 나
타난다구. 나는 그걸 알 수 있어. 네가 한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우연히 너를
통해 그 진실이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야. 네 탓이 아냐. 네 탓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 아무튼 나는 스스로 그것을 확인해 보겠어. 그러지 않고는 아무것도 매듭
이 지어지지 않아."
"그를 만날 거예요?"
"물론 만나, 그리고 직접 물어보겠어. 그 길밖에 없어."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녜요?"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아,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네게 화를 낼 까닭이 없잖
아. 너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고 있지 않아."
"당신은 광장히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왜 과거형으로 이야
기할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에요."
"나도 너 같은 아가씨를 만난 건 처음이야."
"안녕"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웬지 머
뭇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덧붙여 말하거나, 내 손을 잡거나, 또는 볼에 키스를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론 그러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차 속에는 그녀의 그러한- 머뭇거림의- 가능성이 감돌고 있었다. 나
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음악을 듣고, 전방에 분명히 신경을 기울이면서
차를 운전하여, 도쿄로 돌아왔다. 도메이 고속도로를 벗어날 무렵에 비가 멎었
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시부야의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까지, 와이퍼를 정
지시키는 일을 잊고 있었다. 비가 멎은 건 알아챘지만, 와이퍼를 정지시키는 일
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머리가 혼란되어 있다. 무슨 수를 써야 한
다. 나는 주차한 스바루 속에서 핸들을 잡은 채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핸들로부터 손을 떼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혼란을 정리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선 제일 먼저 유키가 한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가능성의 문제로서 분석해 보았다. 생각이 미치는 한도의 범위로
부터, 감정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였다. 이는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
다. 내 감정은 처음부터 벌에 쏘인 것처럼 멍하니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가능성은
내 속에서 자꾸 부풀어 오르고 증식하여 어떤 확실성을 띠어 갔다. 그 흐름에는
거역할 수 없으리만큼 확고한 힘이 있었다. 나는 부엌에 서서 물을 끓이고, 커피
의 원두를 갈고, 오랫동안 꼼꼼하게 커피를 달았다. 찬장에서 컵을 꺼내 커피를
따르고, 침대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것을 다 마셔갈 무렵에는, 가
능성이 거의 확신에 가까운 것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 '그대로이리라' 고 나는
생각했다. 유키는 정확한 이미지를 본 것이다. 고혼다가 키키를 죽이고 어디로
사체를 운반하여 땅에 묻은 것이 확실하다.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확증도 없는 것이다. 단지 감수성
이 예민한 엘세 살짜리 소녀가 영화를 보고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나는 그녀의 말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쇼크는 받았다. 하지만
나는 유키가 본 이미지를 거의 직관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째서일까? 왜 그
처럼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대로 어쨌든 나는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다음 문제. 메이를 죽인 것도 그일까? 만일 그렇다
면, 그 까닭은? 왜 고혼다가 메이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역시 알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고혼다가 키키를, 혹은 키키와 메이
두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한 가지도 생각해
낼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결국, 유키에게도 말한 것처럼 내가 고혼다를 만나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
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떤 시으로 말을 꺼내야 할까? 나는 자신이 그를 향해
"자네가 키키를 죽였나?" 하고 질문하는 정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건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짓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추잡스럽다. 그
러한 말을 입에 올리는 자신을 상상하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리만큼 추잡스레
느껴졌다. 거기에는 분명히 뭔가 그릇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적당히 사실을 호도한 채 되어
가는 모양을 살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놓
여 있지 않다. 괴기스럽든 그릇된 요소가 포함되어 있든간에, 그 일을 하지 않으
면 안 된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
는 몇 번이고, 고혼다에게 전화를 걸어 보려 했다. 하지만 안 되었다. 나는 침대
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하고 무릎 위에 놓인 다이얼을 천천히 돌렸다. 그러나 언
제나 마지막까지 그 번호를 다 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단념하고 수화기를 내려
놓고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혼다의 존재는 나에게 있
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와 그는 친구였다. 그가 만일 키키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는 내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상
실하여 왔다. 안 된다. 아무래도 전화를 할 수 없다.
나는 녹음 전화 장치의 스위치를 꽂고, 전화 벨이 울려도 절대로 수화기를 집
어들지 않았다. 만일 고혼다로부터 지금 전화가 걸려와도, 지금의 상태로는 그에
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몇 번씩 전화 벨은 울렸
다.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는 알 수 없다. 유키인지도 모른다. 유미요시인지도 모
른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벨 소리에 응하지 않았다. 그게 누구에게 걸려온
것이든 간에, 지금의 나로서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일곱
번이나 여덟 번쯤 벨이 울리고는 끊어졌다. 나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전화국
에 근무하고 있던 여자 친구를 생각해 냈다. "달나라로 돌아가요, 당신은" 하고
그녀는 내게 말하였다. 정말이야, 네 말이 옳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확실
히 달나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공기가 내게는 너무 진하
다. 이곳의 중력이 내게는 너무 무겁다.
4,5월쯤 나는 가만히 생각해 잠겨 있었다. 무슨 까닭일까 하고, 나는 그 동안
약간만 식사를 하고, 약간만 잠을 자고,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몸의 기
능을 잘 파악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어,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여러 가
지가 상실되어 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계속 상실하여 가고 있다.' 언제나 혼자 뒤에 남겨져 버린다. 이런식으로, '언
제나, 이런 식으로' 나나 고혼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상황
도 다르다. 생각하거나 느끼는 방식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종류의 인간
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서로를 상실하려 하고 있다.
나는 키키의 일을 생각하였다. 나는 키키의 얼굴을 생각해 내었다.
"왜 그러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죽어 땅 속에 묻혔다. 죽은
'정어리' 와 마찬가지로, 결국 키키는 당연히 죽어야 했기에 죽어 버렸다는 느낌
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내게는 그렇게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느
낀 것은 체념이었다. 광대한 해면에 내리쏟아지는 비처럼 조용한 체념이었다. 나
는 슬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영혼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지면, 산
뜻하고 기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모든 게 소리도 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모
래 위에 그려진 표지를 바람이 날려 버리듯이, 이는 그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
이다.
하지만 이리하여 또 사체 하나가 불어났다. 네스미, 메이, 딕 노스, 그리고 키
키. 이로써 넷이다. 나머지는 둘. 더 이상 누가 죽는단 말인가?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모두들 죽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조만간, 그리고 백골이 되어 그 방으
로 운반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기묘한 방들이 내 세계와 결부되어 있었다. 호
놀룰루 다운타운의 그 사체를 모아둔 방, 삿포로 호텔의 어둡고 차가운 '양사나
이' 의 방. 그리고 고혼다가 키키를 껴안고 있던 그 일요일 아침의 방. 대체 어
디까지가 현실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머리가 돌아버린 것일까? 나는 정
신이 온전할까 하고, 모든 사건이 비현실의 방에서 일어나고, 그것이 철저히 데
포르메되어 현실 속으로 도입된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무엇이 진정한 현실일
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실이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이 펑
펑 쏟아지는 그 3월의 삿포르는 현실이었을까? 그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딕 노스와 둘이서 마카하의 해안에 앉아 있던 일은 현실일까? 그것도 비현실적
인 것으로 보였다. 그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오로지 진정
한 현실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외팔의 사나이가 어떻게 그토록 깨
끗이 빵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 왜 호놀룰루의 콜걸이, 키키가 안내한 죽음의
방의 전화번호를 내게 적어두고 간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현실어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
지 않게 되면, 나의 세계 인식 자체가 뒤흔들려 버린다.
내 정신의 광기를 띠고, 병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이 광기를 띠고, 그리고 병들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어쨌든, 어느 쪽이 광기를 띠고 어느 쪽이 병들어 있든간에, 나는 이
엉거주춤한 채로 방치된 혼란의 상화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
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슬픔이든 노여움이든 간에, 나는 어쨌든 거기에 종지
부룰 찍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역할이다. 그것이 모든 사물이 내
게 시사하여 온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 기묘한 장
소에까지 운반되어 온 것이다.
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 번 더 댄스의 스텝을 되찾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
이 감탄하리만큼 춤을 잘 추지 않으면 안 된다. 스텝,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것은 분명히 결정되어 있는 일이다.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이는 내 머리 속에
1000퍼센트의 현실로서 새겨져 있다. 춤을 추는 것이다. 아주 능숙하게, 고혼다
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봐, 자네가 키키를 죽였나?"
하지만 안 되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전화기 앞에 앉기만 해도, 내 마음
은 어쩔 수 없이 떨리며 혼란에 빠졌다. 옆으로 불어닥치는 강한 바람을 받은
때처럼 내 몸이 흔들리고, 숨을 쉬기는 어려워졌다. 나는 고혼다를 좋아했던 것
이다. 그는 나의 유일한 친구이고,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 고혼다는 나라는 존재
의 일부였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다이얼을 틀리
게 돌렸다. 몇 번 시도해 봐도, 정확한 숫자의 배열대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
고 다섯 번인가 여섯 번째에 나는 수화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안 된다. 나로선
할 수 없다. 아무래도 스텝을 잘 밟을 수가 없다.
방안의 조용함이 내 마음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전화 벨 소리를 듣기도
싫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거리를 쏘다녔다. 마치 회복기의 환자처럼 발을 움직
이는 방식이나 도로를 횡단하는 방식 따위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리고 붐비
는 사람들 속에 섞여 걸어가거나, 공원에 앉아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견딜 수 없으리만큼 고독했다. 나는 무엇을 꽉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주위
를 둘러보아도, 붙잡을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매끄러워 포착할 길이 없
는 얼음의 미궁 속에 나는 있었다. 어둠은 희고, 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나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 고혼다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나
는 나 자신의 일부를 잃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고혼다에게 전화를 걸 수 없었다.
전화가 걸려지기 전에 고혼다가 내 아파트를 찾아온 것이다.
그건 또 비 내리는 날의 밤이었다. 고혼다는 둘이서 요꼬하마에 갔던 때와 마
찬가지로 흰 레인코트를 입고, 안경을 끼고, 코트와 같은 색깔의 모자를 쓰고 있
었다. 비가 꽤 새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은 받고 있지 않았다. 모자에서 물방
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자 생긋 미소지었다. 나도 반
사적으로 미소지었다.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군" 하고 그는 말했다. "전화를 걸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아 직접 와본 거야. 몸이 안 좋았니?"
"별로 좋지는 않았네" 하고 나는 천천히 말을 골라 대답하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내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럼 갔다 다음에
올까? 어쩐지 그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직접 찾아오는 건
좋지 않았어. 자네가 건강해지면 또 만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찾았다. 말이 좀처럼 나오
지 않았지만, 고혼다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아니, 몸이 특별히 나쁜 건 아
냐." 하고 나는 말했다. "별로 잠을 못 자고, 별로 식사를 하지 못해 피로한 것처
럼 보일 뿐이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고, 자네에게 할 이야기도 있어. 밖으로 나
가자구. 오랜만에 제대로 식사를 하고 싶군."
나와 그는 마세라티를 타고 거리로 나갔다. 마세라티는 나를 긴장시켰다. 비에
젖은 가지각색의 네온 속을, 그는 한참동안 목표도 없이 차를 몰았다. 고혼다의
기어 체인지는 부드럽고 정확했다. 차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가속이 부드럽
고, 브레이크는 조용했다. 거리의 소음이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처럼 우리 주위에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업계의 사람들을 만날 우려가 없고,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고,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하고 그는 말하고, 나를 힐끗 바라보았
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깥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30
분쯤 거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그는 단념했다.
"아이고 맙소사. 어찌 된 셈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군" 하고 고혼다는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는 어때? 어디 알고 있는 데 있나?" "아니, 나도 통 생
각이 나지 않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아
직 현실과 잘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오케이,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볼까" 하고 고혼다는 쩌렁쩌렁하고 밝은 목소리
로 말했다.
"반대로 생각해?"
"철저히 시끄러운 데로 가자구. 그러면 도리어 단 둘이서 마음을 가라앉혀 이
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나쁘지 않지만 이를테면 어디?"
"셰이키즈"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피자라도 먹을까?"
"나는 별로 상관 없어. 피자는 싫어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데 가면 모두들
자네 얼굴을 알아보지 않을까?"
고혼다는 힘없이 미소지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여름날의 해질녘의 마
지막 햇빛과도 같은 미소였다. "자네는 지금까지 셰이키즈에서 유명 인사를 본
적이 있나?"
주말이어서 세이키즈는 사람들로 붐비고 시끄러웠다. 똑같은 줄무늬 셔츠를
입은 딕시랜드 재즈밴드가 밴드 스탠드에서 "타이거레그" 를 연주하고, 맥주를
너누 마신 듯한 학생 단체가 이에 질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두
컴컴하고, 아무도 우리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피자를 굽는 향기로운 냄
새가 가게 안에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피자를 주문하고, 생맥주를 사가지고 제
일 안쪽의 화려한 티파니 램프가 드리워진 테이블에 앉았다.
"이봐, 내 말대로지? 홀가분하고 도리어 마음이 안정이 돼" 하고 고혼다가 말
했다.
"그렇군" 하고 나는 인정했다. 확실히 이야기하기가 쉬울 듯했다.
우리는 맥주를 몇 잔 마시고, 그리고 구워진 뜨거운 피자를 먹었다. 나는 오랜
만에 시장기를 느꼈다. 피자가 먹고 싶어지는 일이 별로 없는데, 한 입 먹어보니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마 굉장히 시
장했었나 보다. 고혼다도 배가 고팠던 모양이어서, 우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
고 묵묵히 맥주를 마시고 피자를 먹었다. 피자가 없어져 버리자, 맥주를 한 잔씩
더 마셨다.
"맛있군" 하고 그는 말했다. "사흘 전부터 죽 피자가 먹고 싶었어. 피자 꿈까
지 꾸었어. 오븐 속에서 말야.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피자가 구워지고 있는 거
야. 꿈 속에서 내가 그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 꿈. 처음도 없고 끝
도 없어. 융 같으면 어떻게 해석할까? 나 같으면 '나는 피자가 먹고 싶다' 는 뜻
으로 해석하겠는데, 그런데 내게 할 이야기가 뭔가?"
자, 지금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잘 꺼낼 수가 없었다. 고혼다는 긴
장을 풀고, 밤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순진하게 미소짓는 걸
보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안 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은 도저히 꺼낼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자네는 어때?" 하고 나는 말했다. '이런 식으로 죽 뒤로 미루어갈 수는 없는
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안 되었다. 꺼낼 수가 없다.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고 있는 일이나, 부인과의 일 따위 말야."
"하고 있는 일은 여전하지" 하고 고혼다는 입술을 일그러뜨려 웃으면서 말했
다. "여전히 마찬가지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오지 않아. 하기 싫은 일은 잔뜩
온다구. 눈사태가 나듯이 잔뜩 와요. 눈사태를 향해 고함을 쳐도 아무에게도 들
리지 않아. 목이 아파질 뿐이야. 아내와의 일은- 그러나 이상하군, 이미 헤어졌
는데 죽 아내라고 부르고 있으니- 아내와는 그후 딱 한 번 만났어. 이봐, 자네는
모텔이나 러브 호텔 같은 데서 여자와 자본 적이 있나?"
"별로 없어. 거의 없어."
고혼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상해. 그게 계속되면 피로해져요. 방안은 아
주 어두워. 창문이 밀폐돼 있거든. '하기 위한' 방이니까, 창문 따위는 필요 없는
거야. 햇빛 따위는 들어오지 않아도 되거든. 간단히 말하면 목욕탕과 침대만 있
어도 되는 거야. 그밖에 음악과 TV와 냉장고가 있으면 돼. 즉물적이야. 필요한
것밖에는 놓여 있지 않아. 물론 하기에는 편리한 곳이야. 나는 그러한 데서 아내
와 하고 있어. 바로 하고 '있다' 는 느낌이야. 응, 그녀와 하는 건 멋있어. 마음이
가라앉고 즐거워. 온화한 기분이 돼. 끝난 후에 부드럽게 죽 껴안아 주고 싶은
기분이 돼. 하지만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요. 밀폐되어 있는 거야. 모든 게 인공
적이야. 나는 그러한 곳을 통 좋아할 수가 없어. 하지만 거기서밖에는 아내와 만
날 수가 없어."
고혼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종이 냅킨으로 입언저리를 닦았다.
"내 맨션의 방에 그녀를 데리고 올 수는 없어. 그런 짓을 하면 눈깜짝할 사이
에 주간지에 족로돼 버려. 정말이야. 그치들은 그러한 것을 금방 냄새 맡는다구.
어떻게 알아내는지 알 수 없지만, 알아낸다구. 둘이서 어디로 여행을 갈 수도 없
어.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낼 수가 없거든. 첫째로 어디엘 가든 금방 얼굴이 탄로
나거든. 우리는 프라이버시를 요구하는 대로 조금씩 잘라내어 판매하고 있는 셈
이니까. 결국 어느 싸구려 모텔로 가는 수밖에 없어. 이건 정말... " 고혼다는 이
야기를 하다 말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또 푸념이군."
"상관 없어. 푸념이든 뭐든 실컷 이야기하면 돼. 나는 죽 듣고 있네. 오늘은 나
는 이야기하기보다는 듣고 있는 편이 편하니까."
"아니, 오늘뿐이 아냐. 자네는 언제나 내가 늘어놓는 푸념을 듣고 있어. 나는
자네가 푸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 남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별로 없어
요. 모두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거든. 변변한 이야기거리도 없는 주제에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지만 말야."
딕시랜드 밴드는 "핼로 도리" 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와 고혼다는 잠시 그 소
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봐, 피자를 더 먹지 않겠어?" 하고 고혼다가 내게 물었다. "절반씩은 더 먹
을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웬일인지 몹시 시장하군."
"좋아, 나도 아직 시장해."
그가 카운터로 가서 앤초비 피자를 주문하고 왔다. 그리고 파자가 구워지자
우리는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앤초비 피자를 절반씩 먹었다. 학생
단체는 아직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이윽고 밴드가 마지막 연주를 끝냈다. 밴
조나 트럼펫, 트롬본 따위가 각기 케이스에 집어넣어지고, 연주자들은 무대로부
터 사라져 갔다. 나중에는 업라이프 피아노 한 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피자를 먹고 난 후에도,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텅빈 무대를 가만
히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기묘하게 딱딱한
음향을 띠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막연한 딱딱함이었다. 실제가 부드러
운데, 존재의 상황이 딱딱한 것이다. 옆으로 다가올 때까지는 아주 단단해 보인
다. 하지만 몸에 부딪치면 부드럽게 부서져 버린다. 그것은 파도처럼 내 의식을
치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와 의식을 때리고 그리고 물러갔다. 그게 몇 번이고 되
풀이되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의식은 나
자신으로부터 유리되어 굉장히 먼 곳에 있었다. 먼 파도가 먼 의식을 때리고 있
었다.
"왜 키키를 죽였어?" 하고 나는 고혼다에게 물어보았다. 물으려고 생각하고 물
어본 것은 아니다. 그저 문득 입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그는 훨씬 먼 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바라
보았다. 오랫동안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떠들썩한 소음이 내
머리 속에서 커졌다 작아지곤 했다. 마치 현실과의 접촉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곤
하는 것처럼 그의 단정한 열 개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깍지 끼워져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현실과의 접촉이 멀어지자, 그것은 정교한 세공품처
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미소지었다. 아주 조용한 미소였다.
"내가 키키를 죽였나?" 하고 그는 천천히 말을 한 자 한 자 명확히 짚어 말했
다.
"농담이야." 하고 나도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저 무심코 그렇게 말해 보았을
뿐이야. 잠깐 말해 보고 싶었어."
고혼다는 시선을 테이블로 떨구고,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농담 따위가 아냐.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야.
내가 키키를 죽였나? 진지하게 생각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언저리에 미소짓고 있었지만, 눈은 진지했다.
그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 자네가 키키를 죽여?" 하고 나는 질문했다.
"왜 내가 키키를 죽이나? 무슨 까닭일까? 나도 그것은 알 수 없어. 왜 죽였을
까?"
"이봐, 잘 알 수 없는 걸"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키키를 죽였나,
아니면 죽이지 않았나?"
"그래서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키키를 죽였나, 아니면 키키
를 죽이지 않았나?"
고혼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손으로 턱을 괴
었다. "나도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
하겠지? 하지만 정말이야. 확신을 가질 수 없어. 내가 키키의 목을 졸라 죽인 듯
한 느낌이 드는 거야. 그 내 방에서 나는 키키의 목을 졸라 죽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야. 그 내 방에서 나는 키키의 목을 졸랐다.- 그러한 느낌이 들어. 왜 그
럴까? 왜 나는 그 방에서 키키와 단 둘이 있었을까? 나는 그녀와 단 둘이 있고
싶지 않았는데 말야. 하지만 안 돼, 생각해낼 수 없어. 아무튼 나는 키키와 둘이
서 내 방에 있었어.- 나는 그녀의 사체를 자동차로 운반하여 어딘가에 묻었어.
어느 산 속에.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정말로 일어난 일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느낌이 든다는 것뿐이야. 증명할 수 없어. 이에 대해
나는 죽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알 수가 없어. 중요한 점이 공백 속에 삼켜져
버렸어. 어떤 구체적 증거가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거든. 이를테면 삽, 나는 그
녀를 물을 때 삽을 사용했을 거야. 그게 발견되면 현실임을 알 수 있어. 하지만
그것도 발견되지 않아. 흐트러진 기억을 더듬어 보지. 나는 어느 가게에서 삽을
샀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구멍을 파고 그녀를 묻었다. 삽은 어디엔가 버렸
다.- 그러한 느낌이 들어. 하지만 세밀한 점을 생각해낼 수 없어. 어디서 삽을
사고, 어디에 그것을 버렸을까? 증거가 없는 거야. 그저 산 속이라고밖에는 기억
하고 있지 않아. 이는 꿈처럼 토막토막으로 단절되어 있어. 이야기가 저리로 갔
는가 하면 이리로 오는 등 혼란되어 있어. 차례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어. 기
억은 있어. 하지만 그게 진정한 기억일까? 혹은 그게 나중에 내가 상황에 맞추
어 적당히 만들어놓은 것일까? 나는 머리가 돌아버린 모양이야. 아내와 헤어진
후로, 그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졌어. 피곤해. 그리고 절망하고 있어. 절망적으로
절망하고 있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에 고혼다가 말을 계속하였다.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그리고 어디서부터가 망상일까? 어디까지가 진실
일까? 그리고 어디서부터가 연기일까? 나는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 이렇게 자네
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그걸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어. 자네
가 내게 키키의 일을 처음으로 물었을 때부터 나는 죽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자네가 나의 이 혼란을 해소시켜 주지 않을까 하고 말야. 마치 창문을 열어 차
갑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는 것처럼 말야." 그는 또 손가락을 깍지끼었
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내가 키키를 죽
였다면, 어째서일까? 내게 키키를 죽일 어떤 이유가 있을까? 나는 그녀를 죽아
했어. 그녀와 자는 것을 좋아했어.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그녀와 메이는 긴장
을 풀고 잠실 쉴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어. 그런데 왜 죽일까?"
"자네는 메이도 죽였나?"
고혼다는 오랫동안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자신이 두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
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메이를 죽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
그날 밤의 내게는 고맙게도 분명한 알리바이가 있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저녁
때부터 한밤중까지 번역 대사의 녹음을 하고, 이어 매니저와 함께 자동차를 미
즈도까지 갔어. 그러니까 틀림없어.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만일 누군가가 그날 밤
에 죽 내가 방송국에 있었음을 증명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자신이 메이를 죽였
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괴로워하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말야, 그래도 어쩐지
나는 메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견딜 수 없으리만큼 책임감을 느껴. 왜 그럴까?
뚜렷한 알리바이가 있는데도, 웬지 마치 나 자신이 이 손으로 그녀를 죽인 듯한
느낌이 들어. 나 때문에 그녀가 죽은 듯한 느낌이 들어."
또 조용해졌다. 침묵이 오래 계속 되엇다. 그는 죽 자신의 열 개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피로해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뿐이야. 자네는 아마 아마도 죽이
지 않았을 거야. 키키는 그저 어디로 사라졌을 뿐이야. 그애는 나하고 있던 때도
그런 식으로 휙 사라져 버렸어. 처음이 야냐. 자네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싶은 기
분이 되어 있을 뿐이야. 그래서 모든 걸 자신을 책망하는 방향으로 결부시켜 버
리는 거야."
"아니, 틀려. 그뿐만이 아냐.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 나는 아마 키키를 죽였을
거야. 메이는 죽이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키키는 죽인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
의 목을 조른 감촉이 아직 이 양손에 남아 있어. 삽질을 하던 때의 손의 반응도
기억하고 있어. 나는 그녀를 죽였여. 정말로."
"하지만 왜 자네가 키키를 죽이나? 의미가 없지 않아?"
"알 수 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아마 일종의 자기 파괴 본능일 거야. 내게는
예전부터 그러한 게 있어. 일종의 스트레스야. 내 자신과, 내가 연출하고 있는
내 자신과의 격차가 어느 부분까지 벌어지면 그러한 일이 곧잘 일어난다구. 나
는 그 격차를 이 눈으로 실제로 볼 수 있어. 마치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진
것처럼, 그게 딱 벌어져 있는 거야. 깊고 어두운 구멍이야. 현기증이 나리만큼
길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무엇인가를 무의식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거야. 정신을
차려 보면 무엇인가를 부수고 있어. 그러한 일이 어린 시절부터 흔히 있었지. 무
엇인가를 부수고 있어. 연필을 부러뜨리고, 유리잔을 내동댕이친다구. 플라스틱
으로 만든 자동차. 비행기 따위의 모델을 짓밟고. 하지만 국민학교에 다닐 때 친
구의 등을 밀쳐 벼랑에서 떨어뜨린 적이 있어. 왜 그러한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다지
높지 않은 벼랑이어서 그때는 가벼운 상처를 입혔을 뿐이야. 밀려 떨어진 친구
도 사고라도 생각했어. 우연히 몸이 부ㄷ친 걸로 여기고 있었어. 아무도 내가 일
부러 그러한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거든. 하지만 틀려, 나는 내 자신이 스스
로 알고 있어. 나는 이 손으로 그 친구를 일부러 밀쳐 떨어뜨린 거야. 그 밖에도
그러한 일은 얼마든지 있어.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우체통을 몇 번인가 불태웠
지. 불을 붙인 천 조각을 우체통 속에 집어넣는 거야. 비열하고 의미가 없는 짓
이지. 하지만 해버리는 거야. 정신을 차려 보면,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
고는 못 견디는 거야. 그럼으로써, 그처럼 무의미하고 비열한 짓을 함으러써 겨
우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어. 무의식적인 행위야. 하지만
그 감촉만은 기억하고 있어. 그러한 감촉의 하나하나가 내 양손에 단단히 물들
어 있어.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아. 지독한 인
생이야. 난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고혼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게는 확인할 길이 없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내가 죽였다는 확
증이 없는 거야. 시체도 없어. 삽도 없어. 바지에 흙도 묻어 있지 않아. 손에 물
집이 생기지도 않았어. 하긴 사람을 묻을 구멍을 파는데 물집까지 생기지는 않
겠지만 말야. 어디에 묻었는지도 기억하고 있지 않아. 설령 경찰에 가서 자백한
다 하더라도, 누가 믿겠냐? 사체가 없으면 그건 살인도 아니거든. 나는 보상할
수도 없어. 그녀는 사라져 버렸어. 분명히 알고 있는 건 그것뿐이야. 나는 자네
에게 그걸 몇 번이고 탁 털어놓고 이야기하려 했네. 하지만 이야기할 수 없었어.
만일 내가 그러한 말을 입에 올리면, 우리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사라져 버리리
라는 느낌이 들었어. 이봐, 나는 자네하고 있을 때는 긴장을 풀고 편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네. 그러한 차이나 격차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어. 그러한 일은 내게
는 아주 귀중한 일이었어. 그리고 나는 그러한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조금씩 뒤로 미루어가고 있었지. 이 다음으로 미루자, 나중으로 더 미루어도 되
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네. 사실은 내가 분명히 털
어놓고 이야기해야 했을 거야."
"하지만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자네가 말한 것처럼 확증이 없잖
아." 하고 나는 말했다.
"확증이 있느냐의 여부 문제가 아냐. 나는 내 입으로 자네에게 이야기를 해야
했어. 나는 그걸 감추고 있었던 거야. 그게 문제지."
"하지만 만일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하더라도, 만일 자네가 키키를 죽였
다고 가정하더라도, 자네에게는 죽일 의향이 없었다."
그는 양손의 손바닥을 펴고 가만히 응시하였다. "없었어. 있을 턱이 없어. 왜
내가 키키를 죽여야 하나. 나는 그녀를 좋아했어. 나와 그녀는 매우 안정된 형태
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였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 나는 그녀에게 아
내 이야기를 했어. 키키는 잘 들어 주었어. 왜 내가 그녀를 죽여야 해? 하지만
죽인 거야, 이 손으로. 살의 따위는 없었어. 나는 자신의 그림자를 죽이는 것처
럼 그녀를 목졸라 죽였어.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이건 내 그림자
가 아니었어. 키키였어. 하지만 이는 어둠의 세계에서 일어난 거야. 여기와는 다
른 세계야. 알겠어? 여기가 아냐. 그리고 권유한 건 키키야. 내 목을 조르라고
키키가 말했어. 좋아요. 목을 졸라 죽여요, 하고 말했어. 그녀는 나를 유혹하고
나를 용서한 거야. 거짓말이 아냐, 정말로 그랬어요. 나는 알 수 없어. 그러한 일
이 일어날까? 모든 게 꿈처럼 여겨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현실이 용해되어 가
는 거야. 왜 키키가 나를 유혹하나, 왜 내게 자신을 죽이라는 따위의 말을 하
나?"
나는 유리잔에 남은 뜨뜻미지근해진 맥주를 마셨다. 담배 연기가 위쪽에 엉겨
있다가 공기의 흐름에 따라 어떤 심령 현상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내 등에
부딪치고는 "미안합니다" 하고 말했다. 가게 안의 안내가 구워진 피자의 번호를
부르고 있었다.
"맥주를 한 잔 더 안 마시겠어?" 하고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마시고 싶군"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카운터로 가서 맥주 두 잔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
도 하지 않고 잠자코 그것을 마셨다. 가게는 러시아워의 아끼바라하역처럼 붐비
며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우리의 테이블 옆을 사람들이 연방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우리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 따위는 듣고
있지 않았고, 아무도 고혼다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말했지" 하고 고혼다는 호감을 주는 미소를 입언저리에 띠우며 말했다. "여기
는 안성맞춤이야. 셰이키즈에선 유명인사 따위는 바라보지 않거든."
고혼다는 맥주가 3분의 1쯤 남은 유리잔을 시험관이라도 흔들 듯이 흔들고 있
었다.
"잊어" 하고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잊을 수 있어. 자네도 잊어."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입으로 말하기는 간단해. 자네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
를 목졸라 죽인 건 아니니까."
"이봐, 알겠어. 자네가 키키를 죽였다는 확증은 아무것도 없어. 확증이 없는 걸
가지고 그렇게 자신을 책망하지는 말라구. 자네는 자네 자신의 죄악감을 그녀의
실종과 결부시켜 무의식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잖아. 그러할 가
능성은 있지?"
"그럼 가능성 이야기를 하자구" 하고 고혼다는 말하고, 테이블 위로 두 손바닥
을 가져갔다. "나는 요즘 가능성에 대해 곧잘 생각하고 있어. 여러 가지 가능성
이 있지. 이를테면 내가 아내를 죽일 가능성도 있어. 그렇지? 만일 그녀가 키키
와 마찬가지로 나를 용서한다고 말하면, 나는 역시 목졸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나는 요즘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가능성이 내 속에서 확대되어 가거든. 막을 길이 없어 자신이 통제할 수 없
게 되어가요. 우체통을 불태웠을 뿐만이 아냐. 나는 고양이도 몇 마리를 죽였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였지. 중지할 수가 없어. 밤중에 부근에 있는 집의 창문을
고무줄 새총으로 돌을 쏘아 깨뜨리기도 했어.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 그
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자네
에게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거야. 말해 버리니 후련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일이 멈춰지는 건 아냐. 멈춰지지 않아. 연기를 하는 나와, 근원적인 나
사이의 벌어진 틈이 메워지지 않는 한 그러한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돼. 나는 스
스로도 알고 있어. 내가 프로 연기자가 된 이후로 그 틈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
어. 연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 반동도 커져간다구. 어쩔 수가 없어. 나는 아
내를 죽일지도 몰라. 통제할 수가 없어. 이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야.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어.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 거야. 분명
히."
"자네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고 나는 억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