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9화 (9/472)

9화. 출근 전 응급 환자

“근무시간은 오후6시부터 새벽6시까지네. 야간병원이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일찍 일어난 태경은 책상에 앉아 전날 김철기가 준 외장하드를 꺼냈다. 하드에는 동네 특징과 병원에 관한 모든 사항이 세세히 기록돼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직원 기록을 살펴보던 중 알 수 없는 단어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이찬희는 수복치 최모나는 병능제. 수복치와 병능제라. 뭐지? 뭐 만나 보면 알겠지.”

그 뒤 태경은 김철기가 남긴 메모를 보며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 선생. 병원에 내가 돌보던 거북이 두 마리가 있는데 자네가 돌봐 줬으면 하네.

“거북이?”

-한 녀석은 꽤나 까칠하고 다른 한 녀석은 활발한데 가끔씩 벌벌 떨면서 밑바닥으로 숨어 들어갈 때가 있어. 부디 사랑과 관심으로 잘 크게 도와주게. 부탁하네.

“거북이를 돌볼 정도로 한가한 건가.”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던 그는 모든 자료를 살펴본 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이상하다. 작은 병원이라 했는데.”

밥을 먹기 위해 옥탑을 나서던 태경은 직원 숫자를 세며 고개를 갸웃했다.

“직원, 간호사, 의사들까지 전부 합치면…… 동네 병원 맞나?”

작고 아담한 동네 병원을 강조하던 김철기의 말과 달리 아무리 생각해도 작은 병원은 아닌 것 같았다.

* * *

“잘 먹었습니다. 수고하세요.”

백반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온 태경은 지나친 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걸어갔다.

“집에 가도 할 것도 없잖아.”

출근은 이틀 뒤였다. 하지만 매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태경에게 갑작스러운 휴식 시간은 무료했다.

“길이나 익혀 둘까? 그래 가 보자.”

새 직장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했던 그는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

* * *

버스에서 내린 태경은 동네를 둘러보며 병원으로 향했다.

오래된 주택단지와 아파트 단지도 보였고, 다리 하나를 건너면 공장 단지와 그 뒤로 산 중턱에 교도소도 작게 보였다.

“교도소가 다 보이네.”

주소지를 따라 병원에 도착한 그는 김철기의 말이 절로 떠올랐다.

‘동네 작은 병원이니까 부담 갖지 마.’

분명 작은 병원이라 했던 말과 달리 눈앞의 건물은 그리 작지 않았다.

“어르신. 이 병원이 어딜 봐서 작은가요.”

3층으로 이뤄진 병원은 대학병원과 동네 병원 사이에 있는 중간 병원이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 전 외장하드에서 살펴봤던 수술이 가능할 정도면 그리 작은 병원이 아닌 게 당연했다.

“당직 선생님이 있나? 불이 켜져 있네.”

태경이 불이 켜진 1층을 바라보며 벤치에 있는 버려진 맥주 캔을 집으려던 그때였다.

“어이! 아저씨. 동작 그만!”

망사에 머리를 집어넣고 단정하게 묶은 중년 여자가 태경에게 사자후를 날리며 다가왔다.

“아저씨 또 똥 싸려고 왔죠? 왜 자꾸 술 먹고 와서 남의 병원 앞마당에 똥을 싸요. 똥을 확 얼굴에 발라 버릴…….”

“예? 똥이요?”

고무장갑에 빗자루를 들고 온 그녀는 쓰레기를 줍고 있던 태경의 모습을 보며 멈칫했다.

“어머 세상에. 똥 아저씨가 아니네.”

“똥 아저씨는 아니고 쓰레기를 버리려던 참인데요.”“저기 혹시…… 우리 병원 새로 오신다는 김태경 선생님 맞으시죠?”

“맞습니다.”

* * *

“아깐 놀라셨죠?”

잠시 뒤 사무실로 차를 가져온 그녀는 우리 야간병원 베테랑 간호사인 임정숙이었다.

“며칠 전부터 술 취한 아저씨가 자꾸 벤치에 실수를 해서요. 마침 그 자리라 같은 사람인 줄 알았지 뭐예요.”

“괜찮습니다.”

“요새 병원 사정도 안 좋다 보니 괜히 예민해져서 정말 죄송해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얼굴에 딱 쓰여 있던데요. 간호사 짬이 20년이 넘다 보니 얼굴만 봐도 의사인지 알겠더라고요.”

직원 정보에 있던 대로 임정숙은 화통하고 시원시원한 성격 그대로였다.

“원장님이 본인이랑 닮은 분이라고 하셔서 궁금했는데 키도 크고 훤칠하신 게 도저히 지독한 사람으로 안 보이네요.”

“지독한 사람이요?”

“선생님 보드가 세 개라면서요?”

“아, 예. 맞습니다.”

“그러니까요. 세상에 하나도 힘든 전문의를 세 개나 딴 거 보면 얼마나 지독해요. 김철기 원장님도 트리플보드거든요.”

“그래요?”

금시초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얼떨결에 병원을 맡긴 했지만 태경은 김철기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모르셨구나. 워낙 본인 얘기를 안 하시는 분이긴 해요. 지금이야 변두리 동네 원장이지만 소싯적에는 아주 대단한 분이셨대요.”

“제가 원장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네요.”

“저도 그래요. 은근히 비밀이 많으시거든요. 그래도 참 좋은 분이세요. 아무튼 새로 오신 김태경 선생님 환영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많이 도와주세요.”

“당연하죠. 근데 아직 출근 전인데 이 시간에 병원은 어쩐 일로…….”

“그게 가는 길 확인하려고 왔는데 불이 켜 있더라고요.”

“입원 환자 분들이 있어서 돌아가면서 당직 중이었어요. 맞다. 이찬희 선생님이라고 지금…….”

“안녕ㅎ…….”

임정숙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젊은 남자가 태경의 옆으로 미끄러지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양반은 못 되시네. 찬희 쌤 괜찮아요? 뭐 급하다고 그리 뛰어와요.”

“하나도 안 안파요. 괜찮습니다.”

“그럼 전 관장이랑 드레싱하러 갈 테니까 찬희 쌤이 병원 소개랑 궁금한 거 알려 주세요.”

“네, 맡겨 주십쇼.”

이찬희는 태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을 마주한 팬의 눈빛과도 같았다.

“원장…… 아니, 김태경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찬희라고 합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이찬희 선생.”

“선생님께서 우리 병원 오신다는 소리 듣고 제가 꿈인가 싶었습니다. 실은 선생님이 제 롤모델이거든요,”

이찬희는 신화대 출신이었다. 인턴 생활을 하면서 태경을 자주 봤던 그는 태경의 실력에 반해 그를 동경했었다.

“제가 의사로서 존경하는 분들 중 한 분이십니다.”

“무슨 존경까지야. 나랑 몇 번이나 마주쳤다는데 기억 못해서 미안한데.”

“아닙니다. 전 그냥 인턴 무리 중 한 명이었는데요.”

“잘해 봐요.”

“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태경은 이찬희의 안내를 받으며 병원을 둘러봤다.

* * *

“아니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이래.”

한적한 주택가에 울려 퍼지는 119소리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왜 119가 왔어. 응?”

“나도 몰라. 드라마 보다 소방차 소리에 놀라서 나오니까 구급차더라고. 근데 저기 훈이네 집이잖아.”

“맞네. 훈이네 집으로 들어가네. 누가 아픈가? 세상에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동네 주민들이 걱정하는 사이 119대원들이 들것에 실린 환자와 함께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환자분 이제 병원으로 갈 거예요.”

“아으…….”

“여보, 훈이 엄마 많이 아파?”

“아으. 몰라 아파 죽겠으니까 말 시키지 마.”

50대 여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명치 부근을 손으로 꼭 누르며 힘들어 했다.

“당신 그거 다이어튼지 뭔지 그거 하다가 병난 거야. 안 먹다 별안간 먹으니까 탈난 거라고.”

“아오. 듣기 싫으니까 좀 조용해요.”

“저기, 보호자분 환자분이 지금 많이 아프시니까 자극하지 마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보호자분도 함께 타시고 병원으로 이동할게요.”

“여보 조금만 참아.”

구급대원들은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가장 가까운 응급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들어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다시 차에 올랐다.

“아으! 아파.”

“이런 제길! 사람이 아프다는데 환자를 못 받는다니. 여보 조금만 참아.”

“죄송합니다. 보호자분 응급 환자가 갑자기 들이닥친 모양이에요. 다른 병원으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반장님, 서대병원 TA(Traffic Accident, 트래픽 액시던트, 교통사고) 환자로 응급실 밀렸다는데 어쩌죠?”

“젠장? 여울동까지 넘어가면 너무 오래 걸리는데 이거 야단이네.”

“일단 여울동으로 갈까요?”

“아! 그래. 우리병원 있잖아. 거기 야간 전문이잖아.”

“근데 우리병원 사정으로 며칠 휴원한다고 공지 왔잖아요.”

“그래도 당직 의사는 있을 거 아니야. 일단 콜해 봐.”

“네, 알겠습니다.”

* * *

“어떠세요. 건물은 오래됐어도 안에 있을 건 다 있죠?”

“그러네. 진료실 수술실도 깨끗하고 검사기기도 잘 갖춰 있고 좋은데.”

“그렇죠? 과도 은근히 알차게 있을 과는 다 있어요.”

태경은 이찬희와 함께 병원을 둘러봤다. 허름해 보였던 병원 인상과 달리 내부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2년 전에 입원실 베드부터 낡은 장비들도 싹 바꿨거든요. 근데 그 좋은 장비들이 요즘에는 놀고 있어서 문제죠.”

“장비들이 놀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1년 전 인근 신도시에 종합병원이 오픈했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 버스를 타고 오면서 태경도 본 병원이었다. 우리병원과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신도시에 세워진 병원이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몇 달 전에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환자 유치에 힘쓰더니 요즘에는 우리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눈에 띄게 줄었어요.”

병원에 환자가 없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계속되는 진료의 공백은 병원 존폐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첫 출근도 안 하신 분한테 제가 너무 심각한 얘기를 했네요. 선생님, 여기 잠시만 앉아 계세요.”

“왜? 환자 보러 가야 하면 나 신경 쓰지 말고 갔다 와.”

“그게 아니라 커피 타 오려고 합니다. 잠시 만요.”

“됐어. 이 선생?”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경 바라기인 이찬희는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Rrrrrrr Rrrrrrr

중앙 대기실에 앉아 있던 태경은 접수처에서 끝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우리병원입니다.”

이찬희를 불러올까도 했지만 급한 전화일까 싶어 수화기를 들었다.

-구급대원입니다. 지금 50대 여 환자분이 심한 에피가스트릭 패인(Epigastric pain, 상복부통증)을 호소하고 있어 우리병원으로 이송하려고 합니다.

“대원님. 지금 병원 사정상 휴원 중이라서요.”

-알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 의사분이신가요?

“의사 맞습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인근 두 군데 병원 응급실이 꽉 차서 세 번째 드리는 전화입니다.

구급대원은 절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환자분이 많이 힘들어하시는데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두 차례 응급실에서 발길을 돌린 환자였다. 만약 여기서 거절한다면 환자는 받아 줄 병원을 찾을 때까지 차 안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저희 병원으로 오세요.”

죽다 살아난 태경은 환자들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환자에게서 냄새가……아닙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순간 태경은 저도 모르게 환자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물을 뻔 했다.

“커피 드세요. 원두 향 정말 좋습니다.”

“그보다 이 선생 마취과 선생님 연락처 알지?”

“마취과 선생님이요? 네, 압니다.”

“전화 걸어 봐.”

태경은 이찬희 양손에 들린 커피 잔을 데스크에 내려놓으며 전화기를 건넸다.

“네? 지금 이 시간에요?”

“그래. 곧 있으면 응급 환자 들어올 거야.”

“예!? 응급 환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분간 휴원이라고 공문 보냈거든요.”

“내가 오라고 했어.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일단 전화부터 걸어.”

“아… 예.”

태경이 마취의를 찾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혹시 모를 수술 때문이었다.

응급실에 오는 모든 환자가 수술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진료 후 수술을 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마취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이찬희입니다.”

-어. 찬희 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저기 선생님 지금 바쁘세요?”

이찬희가 자신보다 선배인 의사에게 조심스럽게 묻자 태경이 전화기를 빼 들었다.

“여기 병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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