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NRS 숫자통증등급
“세상에 이게 얼마 만에 다 모인 거니?”
“그러게. 다 같이 모인 건 3년 만인 거 같다.”
“의진이가 좀 바빴어야지.”
“미안하다. 친구들아.”
의진은 병원의 휴원으로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들과 생일 축하를 위해 모였다.
“그래서 오늘 이 언니가 맛난 음식과 함께 비싼 와인을 준비했다는 거 아니겠니.”
“어머! 이게 얼마만의 술이야. 안주 치우고 병째 마셔도 되지? 나 오늘 자고 오라고 신랑한테 허락도 받았다.”
10병이 넘는 와인을 본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흐뭇한 표정이었다.
“왕년에 술독 정희 실력 보여 주나요.”
“그래도 주당 정의진 선생님이 앞에 계시는데 무슨. 안 그래 의진아?”
“그것도 20대 어릴 때나 그랬지. 요즘은 그렇게 마시다간 죽어.”
“하긴 그건 그래. 근데 의진이 넌 만나는 남자 없어?”
“내가 의진이랑 같은 대학 나왔잖아. 얘 의대생 때도 인기 많았다.”
“가만있어 봐. 그래서 만나는 남자가 있어 없어?”
친구들은 유일하게 결혼을 안 한 의진의 남자관계가 궁금했다.
“얘들아 의진이 직업이 의사다. 수술실에 있기 바쁜 애가 남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겠니?”
“뭔 소리야. 그렇게 따지면 전국에 의사들 다 미혼이게.”
“워워. 진정들 하고. 나 만나는 남자 있는데. 요 며칠 못 봐서 그렇지 매일 만나고 그래.”
“어머어머. 지지배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누구야 응?”
“볼 때마다 따뜻하게 인사해 주고 내 말에 누구보다 경청해 주는…… 환자들이지.”
“에라이! 안 되겠다. 한 대 맞자.”
“병원에 괜찮은 사람 없어?”
“없네요.”
“얘들아 영양가 없는 소리 그만하고 생일 케이크에 불이나 붙이자.”
딸기가 한껏 올라간 근사한 케이크에 30개가 훌쩍 넘는 초가 꽂히고 있었다.
“얘들아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누가 초를 다 꼽니? 잔인한 것들.”
“그러니까 나이 더 먹기 전에 빨리 좋은 남자 만나.”
“맞아. 우리도 곧 있으면 사십 대야.”
“의진아 너 전화 온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진동하는 휴대폰을 건네자 수신자를 확인한 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이찬희입니다.
“어, 이 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저기 선생님 지금 바쁘세요?
-여기 병원입니다.
의진이 답을 하려던 사이 생소한 남자 목소리가 들여왔다.
-밤늦게 죄송하지만 지금 병원으로 올 수 있나요?
“지금이요?”
-네, 응급 환자가 오기로 해서 급히 연락드렸습니다.
“알겠어요. 바로 갈게요.”
의진은 갑작스러운 전화에 그 어떤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만큼 행동력이 좋은 의사였다.
“얘들아. 미안한데 나 병원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
“왜 급한 일이야?”
“응. 나 신경 쓰지 말고 니들끼리 놀고 있어.”
철컥-
“생일날 초도 못 불구 나갔네.”
“의사가 빡세긴 빡세.”
“아니 근데 의진이 방금 잠옷 입고 나가지 않았니?”
“괜찮아. 어차피 수술복 입겠지.”
친구들은 잠옷을 입은 채로 나간 의진의 뒷모습을 보며 황당해했다.
* *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난 아이처럼 떠들던 이찬희는 꿀 먹은 벙어리같이 조용했다.
“저기, 원장님 지금 오는 환자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가만히 있던 그가 응급차를 기다리며 정문 앞에 서 있는 태경에게 물었다.
“그거야 환자가 와 봐야 알겠지만 수술이 필요하면 당연히 해야겠지.”
“그러네요.”
이찬희는 가운에 꽂힌 애꿎은 볼펜을 연신 딸각거리며 생각했다.
‘에피가스트릭 패인.’
급성위염, 만성위염, 역류성식도염,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십이지장염, 위경련, 기능성소화장애까지. 상복부 통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췌장이랑 담낭 쪽 문제일 수도 있고 심하면 수술까지…… 별거 아니겠지.’
상복부 통증 환자 중에 단순급체로 응급실을 찾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찬희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볼펜을 딸각거리며 수술 환자가 아니길 바랐다.
“……선생?”
“이 선생!”
“……네! 부르셨어요?”
“어디다 그렇게 정신을 팔고 있어. 환자 도착했다.”
“환자요?”
병원 앞에 멈춘 구급차를 보며 태경이 정문을 활짝 열었다.
“환자분 도착했습니다.”
태경은 급히 환자 곁으로 다가갔다.
‘냄새!’
역시나 이번에도 환자에게서 냄새가 났다. 아픔의 냄새가.
‘다르다. 달라!’
그런데 냄새랑 달랐다. 분뇨 냄새였다. 새로운 냄새가 추가된 것이다.
‘암모니아보단 독하고 포르말린보다 약하다.’
환자를 응급실로 옮기는 동안 태경은 머릿속으로 냄새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까지 맡았던 냄새의 강도로 순서를 배열한다면 식초, 암모니아, 분뇨 그리고 포르말린 순이었다.
‘그렇다면 위급도가 김덕수보다는 아래라는 뜻인가? 일단 환자를 진찰하자.’
구급대원들은 자신들이 파악한 환자 상태를 알리고 환자를 인계한 뒤 병원을 떠났다.
“환자분?”
“선생님, 저희 집사람 괜찮겠죠?”
태경이 여자를 살피려 하자 남편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걱정하며 묻기 시작했다.
“이 사람 혹시 큰 병은 아니겠죠? 그렇죠?”
“보호자분이세요?”
“제가 이 사람 남편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일단 접수부터 하시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태경의 눈짓에 이찬희가 자연스레 보호자를 진정시키며 함께 접수처로 향했다.
“환자분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할 수 있겠어요?”
“여기가…… 아파요.”
베드 위에서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있던 중년 여자가 손으로 명치 부근을 가리켰다.
“언제부터 아팠죠?”
“그게 아까 저녁에 드라마 보는데 갑자기 쥐어짜듯이 아팠어요.”
“환자분 제 말 잘 들으세요.”
태경은 통증으로 상체를 구부리고 있는 여자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무릎을 굽혀 앉았다.
“지금 통증에 대해 물어볼 거예요. 하나도 안 아플 때가 0점이고 죽을 만큼 아플 때가 10점이면 지금 환자분이 느끼는 통증 수치는 얼마나 되는 거 같아요?”
태경은 NRS에 대해 물었다.
NRS(Numeric Rating Scale)란 숫자통증등급으로, 환자의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때 질문한다.
“한…… 7, 8점 되는 거 같아요.”
10점에 가까울수록 환자가 느끼는 통증은 상당하다 할 수 있다. 고로 지금 여자는 상당한 통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 우리 집사람 왜 그런 건가요?”
“지금 진료 중이시니까 보호자 분 조금만 진정해 주세요.”
그사이 접수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아내를 걱정하자 이찬희가 그를 진정시켰다.
“이 선생, 환자분 V/S(vital sign, 바이탈 사인, 활력징후)체크랑 검사 좀 도와줘. 이 선생?”
“아……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환자분 이쪽으로 오세요.”
이찬희는 보호자와 함께 환자를 부축하며 기본검사를 실시했다.
“어머, 선생님 무슨 일이예요.”
마침 입원 환자의 관장을 끝낸 임정숙 간호사가 급히 다가왔다.
“응급 환자가 왔어요.”
“응급 환자요?”
임정숙 간호사는 태경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대형 병원들이 워낙 응급실이 만석이라 우리 병원으로 오는 응급이 종종 있어요.”
“여기서 다른 병원으로 가려면 3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우리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잘하셨네요. 저는 검사실 들어가서 이 쌤 좀 도와드릴게요.”
잠시 후-
“선생님 조말례 환자분 결과 나왔습니다.”
“체온이 높네.”
“네, 38도입니다.”
검사를 통해 환자의 이상 징후를 확인했다. 체온은 38도로 상승해 있었으며, 혈액검사 결과 백혈구 수치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환자분 진찰할 건데 바로 누우시고 무릎만 구부려 보세요.”
베드 위에서 여전히 상체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대답 대신 누워서 힘겹게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태경이 오른쪽 윗배를 누른 그때였다.
“아! 아, 아파요. 아파!!”
환자는 자지러질 듯한 통증을 호소하며 아파했다.
“여보 괜찮아? 아니, 선생님 이 사람 왜 이런가요?”
“혹시 최근 들어 다이어트 심하게 한 적 있나요?”
“그걸 어찌 아셨대. 맞아요. 이 사람 동네 여자들이랑 다이어트 계모임을 하고 있어요.”
태경의 물음에 남편이 신기해하며 부인 대신 답변했다.
“1등 하면 100만 원을 받기로 했는데 살 뺀다고 등산에 수영에 밥도 굶고 난리 블루스를 추는 중입니다.”
“건강검진 받은 적은요?”
“그러고 보니 저랑 애들은 꼬박 받으라고 잔소릴 해서 받았는데 이 사람은 받은 적이 없네요.”
태경은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다이어트, 발열, 백혈구 그리고 텐더니스 패인(Tenderness pain, 압통)까지.’
환자는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고 몇 년 동안 건강검진은 받은 적이 없다.
게다가 발열, 백혈구 그리고 심한 우상복부통증까지’
기본검사와 환자의 상태를 종합해 본 결과 추측되는 병명이 있었다.
태경은 정확한 확진을 위해 환자의 CT촬영을 빠르게 진행했다.
“선생님 CT나왔습니다.”
“조말례 환자 콜레시스타이티스지?”
“네, 맞습니다.”
이찬희가 CT결과지도 내밀기 전에 태경이 말했다.
‘역시 예상대로 콜레시스타이티스였어.’
CT촬영 결과 담낭에 생긴 돌인 담석으로 인한 전형적인 콜레시스타이티스(cholecystitis, 담낭염)으로 밝혀졌다.
소위 쓸개라고도 하는 담낭은 쉽게 말해 간에서 배출한 소화액인 담즙을 담당하는 장기다. 담낭염 원인의 상당수는 담석이다.
담석은 기름진 음식을 많이 섭취하는 경우에도 생기지만 반대로 너무 지방을 섭취하지 않아도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비만인 사람들이나 다이어트를 하는 여자들이 담낭염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이 환자는 급성 담낭염으로 급히 수술을 들어가야 했다.
“환자분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요? 뭡니까?”
“담낭염입니다. 보통 쓸개라고도 하는데 그 안에 담석이 생겼습니다.”
“담석이라면…… 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무리한 다이어트가 담석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 집사람 쓸개에 있는 돌을 빼내야 하는 건가요?”
“그 돌을 제거하기 위한 수술을 해야 합니다.”
“네! 수술이요?”
지금까지 통증 때문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환자가 수술이란 말에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내 몸에 돌이라니…… 선생님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현재 환자분의 상태는 수술을 해야 합니다.”
담낭 안에 담석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술하는 건 아니었다. 통증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 환자의 경우처럼 담석으로 인한 통증이 계속되면 그때는 담낭(쓸개)을 제거하는 수술이 필요한 것이다.
“선생님, 저 수술할게요.”
고민하던 환자는 결국 수술을 결심했다. 그동안 간단한 속 쓰림이나 위경련으로 생각했던 통증과는 차원이 다른 이 통증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말례 환자분은 단일 복강경 수술을 통해 담낭을 제거할 거예요.”
“저기, 선생님 죄송한데요. 제가 다이어트 끝나고 바디 프로필을 찍기로 해서요. 흉터 잘 안 나게 부탁드릴게요.”
“옘병! 이 여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수술 앞두고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어!?”
“보호자분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다이어튼지 뭔지 그 소리 어디 한 번만 더 해 봐. 내가 아주…….”
“아무래도 안 되겠네. 우리 보호자분 저랑 잠시만 나가 있을게요.”
부인의 다이어트 타령에 흥분한 남편은 결국 임정숙 간호사와 함께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단일 복강경으로 진행할 거라 흉터가 생기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이 선생. 수술 준비하지.”
“네. 선생님. 준비하겠습니다.”
빠른 대답과 달리 이찬희의 동공은 어딘가 묘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