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파견 진료
“팀장님 뭐해요. 고개 숙이세요.”
“고개를 숙이라니 그게…….”
“됐고! 어서 빨리 앉아요.”
그러더니 최 팀장의 상의를 살짝 잡아끌며 쪼그려 앉게 만들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볼펜 때문에 일어날 타이밍을 놓쳤어요.”
진료실에서 업무를 보던 태경은 책상에서 떨어진 볼펜을 주우려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 순간 병원을 나선 전건면 환자와 보호자가 진료실 창문 바로 앞에 있는 벤치로 온 것이다.
게다가 창문까지 열려 있어 일어나면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심각한 대화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았다.
“환자가 말하려는 거 같은데?”
“어떻게 잘됐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의도치 않게 환자의 고백을 듣게 된 세 사람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만히 집중했다.
* * *
“그게 아니라…… 부장님께 꼭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전 대리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뭐 심각한 얘기야?”
“네,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이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아듣게 얘기해.”
“부장님?”
“그래.”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가?”
환자는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구겨진 흰 봉투를 내밀었다.
“사표! 아니 뜬금없이 이걸 왜 주는 거야. 전 대리?”
부장과 눈이 마주친 환자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러더니 어렵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뭐! 회사를 그만두다니. 왜? 자네 혹시 오늘 사고 때문에 그래?”
“아닙니다.”
“그러면 회사에 뭐 섭섭하거나 직원들끼리 트러블 문제 있어?”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자네 오늘 기계에 팔 다쳐서 혈관도 끊어지고 고생한 거 나도 알아.”
“저 에이즈일지도 몰라요.”
“에이즈?”
“……네.”
무겁게 답을 한 환자는 아까보다 고개를 더 떨궜다.
“죄송…….”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던 환자는 믿을 수 없는 태연함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에이즈 검사를 받았다는 거 알고 있었어.”
“네!? 그걸 어떻게…….”
“전 대리 일주일 전부터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다녀서 무슨 일 있나 하고 걱정했었어. 그러다 자네 컴퓨터를 보고 알았지.”
일주일 전 퇴근하려던 부장은 여느 때처럼 사무실 전자기기를 체크하고 있었다.
그러다 절전으로 되어 있는 전 대리의 모니터에서 에이즈 검사방법을 찾고 있던 인터넷 화면을 보게 됐다.
“그걸 보고 바로 짐작했지. 전 대리가 에이즈일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회사 PC로 에이즈 관련 검색을 하던 전 대리가 갑자기 들어오는 직원들 때문에 모니터만 끄고 잊어버린 것이다.
“사장님, 아니 매형한테 바로 말했어. 우리도 사람인지라 처음에 겁이 나더라고. 매형이라 내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어.”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히려 에이즈인데 아무렇지 않다는 표현이 더 이상했을 것이다.
“매형도 나도 솔직히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잘 챙겨 주셨는데 이렇게 그만두게 돼서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전 대리 그만둘 일 없을 테니까 죄송하다는 소리 하지 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확정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확정일 수도 있습니다. 1차에서 양성으로 나왔기에 그럴 가능성이 더 크고요.”
환자는 부장이 에이즈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 막내 남편이 부산에서 의사야. 그 친구랑 새벽에 두 시간을 넘게 통화했어. 에이즈는 관리만 잘하면 일반 사람처럼 지내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전 대리는 19살 때부터 10년이 넘게 회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회사가 힘들 때도 아무 말 없이 무급으로 버텨 준 고마운 친구였다.
부장과 매형은 어려울 때 큰 힘이 된 전 대리를 아프다는 이유로 외면할 수 없었다.
“설령 자네가 에이즈 환자라고 해도 우린 내보낼 생각 없어.”
“부장님…….”
“매형과 난 이 문제를 직원들에게도 솔직히 말할 생각이네. 정 안 되면 재택에서 사무직으로 돌리면 되니까 혼자 고민하지 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상 못한 상황에 전건면 환자는 저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졌다.
앞으로 철저하게 고립되고 외면 받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오늘 태경에게도 부장에게도 따뜻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흑흑!”
“마음고생 심했지? 울지 말어. 가서 밥이나 먹자고. 그래야 살이 잘 붙어.”
부장은 떨리는 전건면 환자의 어깨를 토닥이며 함께 병원을 나섰다.
* * *
“얼라! 임 선생 울어요?”
“어머, 울긴 누가 울어요.”
“팀장님 눈가도 촉촉하신데요?”
창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이래 봬도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이라 눈물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전건면 씨 얼굴이 안 좋았었는데 잘됐네요.”
“아직 세상은 따뜻하네요. 근데 두 분은 진료실에 왜 오셨어요?”
“아! 그게 아까 일로 직원들을 대표해 저와 임 선생이 사과를 하러 왔습니다.”
“직원들이 경솔했어요.”
“죄송했습니다. 선생님.”
50대 중반이 넘은 최 팀장은 태경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공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나쳤던 부분을 생각하며 정중하게 사과를 전했다.
“다들 왜 그러세요. 병원이 강압적으로 일하는 곳도 아니고 그게 왜 죄송할 일인가요. 괜찮습니다. 다만 그래도 우리는 병원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모두가 의료인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면 해요.”
“그럼요. 그럼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를 두려워하면 누가 환자를 치료하겠어요.”
“네, 직원들에게 잘 전달할게요.”
“그리고 선생님 호칭에 대해 전달 사항이 있는데요.”
“호칭이요?”
“선생님이 아니라 원장님으로 정정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저도 팀장님이랑 의견이 같아요. 엄연히 원장 자격으로 오신 건데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그래요.”
“말씀을 감사하지만 전 그냥 선생님이란 호칭이 편합니다.”
원장의 자격으로 온 것은 맞지만 김철기 생각에 원장님이란 호칭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회진하러 가 보겠습니다.”
“참, 특이하시네.”
최 팀장이 진료실을 나가는 태경을 보며 말했다.
“뭐가요?”
“보통 대학병원에 있다 오면 대부분 원장님 소리 듣기 좋아하거든요.”
“사람이 순수해서 그래요.”
“애도 아니고 무슨 순수 타령입니까?”
“그게 아니라 환자밖에 모른다는 소리예요.”
“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난 김 선생님이 우리병원에 와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 * *
신화대학병원 원장실.
“외과는 지원 기피과라는 말이 있는데 신화대학병원은 지원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이 있을까요?”
“글쎄요. 비결이라면 실력 좋은 외과 선생님들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럽니까? 과장님?”
신화대 원장과 외과 과장은 의학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럼 과장님께서 한 말씀 해 주시죠.”
“저는 좋은 선생님들과 함께 이사장님과 원장님의 아끼지 않는 지원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과 지원을 아낌없이 해 주시는군요.”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 지원을 받으니 그 결과는 환자분들의 좋은 치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음 질문 이어가겠습니다. 요즘 너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외과의 영상이 있는데 두 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기자의 입에서 태경의 얘기가 나오자 원장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보지 못했습니다.”
“과장님은 보셨나요?”
“환자 볼 시간도 부족하다 보니 보진 못했지만 듣기는 했습니다.”
“저희가 알아보니까 영상 속 선생님이 신화대병원 출신이라고 하시던데 맞나요?”
“출신이요? 이거 기자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잘못이요?”
“김태경 선생님은 출신이 아니라 우리 병원 선생님입니다.”
영상을 본 적 없다던 원장은 본인이 먼저 태경의 이름까지 꺼내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신화대병원 너튜브에 김태경 선생님 영상이 많았군요.”
“우리 병원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훌륭한 의사입니다.”
“근데 김태경 선생님께서는 지금 다른 병원 소속이라고 하던데 아닌가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현재 협력병원에서 파견 진료를 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원장 저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안 그래도 원장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던 과장은 파견 진료란 소리에 표정 관리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김 선생님이 워낙 봉사 정신이 뛰어나다 보니 그 뜻을 저 역시 선뜻 지지했습니다.”
권모술수에 능한 원장은 어떻게든 태경과의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요.”
“그쪽 지역이 의료 혜택이 좀 힘든 편에 속합니다. 큰 병원을 가려고 해도 한 시간 이상 걸리고 그러다 보니 저희가 인재를 파견한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렇군요. 실력 있는 분이라 결정이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훌륭한 김태경 선생님이 진짜 필요한 곳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럼 원장님께서 일부러 그쪽에 파견을 했다는 거네요.”
“재정도 어렵고 그러다 보니 실력 좋은 인재라도 있어야겠다 싶었죠.”
“참 대단하시네요. 오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론사가 나가고 외과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원장에게 물었다.
“아니, 원장님. 김 선생 협력병원 파견이라니 왜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이 과장님.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면서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오십니까?”
지금 신화대병원은 태경을 내쫓은 결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병원 너튜브에서 태경을 본 사람들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취소하는 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김태경 선생님 왜 갑자기 그만두셨어요?’
‘그 병원으로 전원 보내 주세요.’
또한 태경이 담당했던 환자들이 그의 부재를 물어보며 전원 요청도 계속됐다.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제 김 선생은 우리 병원과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연관 있게 만들려고 파견이니 협력이니 그딴 말까지 한 거 아니겠습니까.”
“원장님. 외람되지만 김 선생 우리 병원에서 쫓겨난 사람입니다.”
“알죠. 과장님 그래서 말입니다. 다시 데려옵시다.”
“데려오다니 누구를요?”
“누군 누굽니까. 김태경이지.”
“네!?”
앞장서서 쫓아낸 사람이 누군데 다시 데려오라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꼭 데려와야 합니다. 권수현 그 자식 너무 형편없어요.”
권수현은 돈과 이사장 인맥으로 새로 부임한 교수였다. 문제는 쇼맨십만 있을 뿐 그의 실력이 형편없었다.
병원에서 임의적으로 만든 스타 의사와 환자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의사의 차이는 달랐다.
그 차이는 돈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원장은 태경이 유명세를 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권 교수 문제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 친구 때문에 수술실에서 의료진들이 고생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김태경이가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러다 외과 환자들 다 빠지겠습니다.”
“원장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다시 데려옵니까?”
“아니, 그러면 과장님은 부족한 권수현에게 계속 환자를 맡기자는 겁니까?”
병원의 선전과 이익만이 목적이 원장의 입에서 환자를 걱정하는 말이 나오다니. 과장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원장님 그러지 말고 차라리 권 교수를 분원 보내고 실력 있는 인물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분원이요? 권수현이 분원 보내면 받은 연구비를 토해 내실 수는 있고요?”
“그건…….”
“그리고 김태경이만큼의 실력자를 과장님께서 찾을 수 있나요?”
“하!”
태경을 향한 원장의 생떼에 이 과장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과장님 얼굴 좀 피세요.”
“김 선생 오지 않을 겁니다.”
“제가 어디 내일 당장 데려오라고 했나요. 일단 같이 머리를 좀 굴려 봅시다.”
심각한 과장과 달리 원장은 간사하게 웃으며 태경의 동영상을 다시 클릭했다.
“그런데 과장님. 김태경이가 원래 이렇게 실력이 좋았습니까? 아주 보통이 아닙니다. 하하하!”
동영상으로 태경의 처치 실력을 처음 접한 원장은 군침을 다시는 뱀처럼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