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8화 (28/472)

28화. 베트남 사람

“환자분?”

병동을 돌며 회진을 하는 태경이 307호에 들어갔다.

“좀 어떠세요?”

환자의 몸에 붙어 있던 각종 의료기기와 인공호흡기가 현재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심정지가 왔던 환자가 의식을 되찾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환자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애정이 가득하다. 생각보다 일찍 의식을 찾은 환자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주삿바늘이 좀 불편한 것 빼고는 다 괜찮습니다.”

“그건 불편해도 참으세요. 주사는 퇴원하실 때 빼 드릴게요.”

“농담입니다. 죽다 살아났는데 이깟 주삿바늘이 뭐가 불편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선생님이 심정지 온 저를 빠르게 발견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병원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죽는 건 당연한 일인데 막상 죽다 살아나니 아직은 죽고 싶지 않더라고요.”

“당연하죠. 아직 정정하신데요.”

“선생님 오셨어요?”

잠시 화장실을 갔던 보호자인 환자의 딸이 병실로 들어왔다.

“네, 안녕하세요.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딸은 연락을 받고 몇 시간 전에 급하게 병원에 왔다.

“저희 아버지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올라오는 내내 아버지 잘못되는 건 아닌지 눈앞이 깜깜하더라고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얘?”

딸은 아직까지 그 놀란 마음이 진정이 안 된 듯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온 진심을 다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딸의 말허리를 환자가 별안간 끊었다.

“정연아? 됐다. 그만해.”

“네?”

“너 화장실 간 사이에 내가 선생님께 인사드렸어. 인사를 도대체 몇 번을 해. 보는 내가 다 부담스러워.”

“아부지! 지금 그런 농담이 나오세요?”

“농담 아녀. 진담이여.”

“그럼 푹 쉬세요.”

“아, 선생님 잠시 만요. 저희 아버지가 술 담배는 안 하시는데 초콜릿을 많이 드세요. 안 드시는 게 낫죠?”

“너 왜 그걸 선생님한테 말하고 그래. 그게 내 낙인데.”

“달고 사니까 그렇죠. 집에 가니까 두 박스나 있던데.”

“그건 따님 말씀이 맞아요. 연세가 있으셔서 당이 높은 음식은 많이 드시면 좋지 않아요.”

“들으셨죠? 앞으로 초콜릿 금지예요.”

“정인아 네 아버지 환자다. 너 잔소리할 거면 얼른 가라.”

“아버지 집 내놨어요. 퇴원하면 저랑 같이 사셔야 돼요.”

“아니, 넌 왜 그걸 네 맘대로 결정하고 그래.”

“아버지 혼자 계시다 또 그러면 어쩌시려고요. 이 서방이 아버지 먼저 모시자고 했어요.”

“됐어. 시끄러. 혼자가 편해.”

태경은 두 부녀의 정겨운 대화를 뒤로하며 병실을 나왔다.

* * *

“아고아고 이제야 엉덩이 좀 붙이네.”

정신없던 시간이 지나고 몰려드는 환자들도 뜸해졌다.

“젊음이 깡패이긴 한가 보네.”

응급실 스테이션 의자에 앉은 임정숙 간호사가 여전히 쌩쌩한 이찬희를 보며 말했다.

“이 쌤 안 힘들어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젊어서 그런가. 이 쌤은 아주 팔팔해 보이네요.”

“선생님 저도 안 젊어요. 아까 응급실에 온 초딩 친구가 아저씨라고 했는데요.”

“안 젊기는. 앞자리 4로 넘어오면 그때 말하세요. 근데 정말 안 힘들어요?”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죠. 근데 요즘은 좀 다른 거 같아요.”

“뭐가요?”

“병원 오는 것도 환자 보는 것도 기분이 다르다고 할까요. 힘든데 재미있어요.”

“그건 좋은 거죠. 근데 뭘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찬희는 요즘 틈만 나면 수험생처럼 노트를 펼치고 집중하고 있었다.

“학회 준비하세요?”

“그거보다 더 빡센 겁니다. 숙제하고 있습니다.”

“숙제요?”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그는 궁금해하는 임정숙에게 보고 있던 노트를 들어 보였다.

“무슨 노트가 다 해졌어요. 엥? 이거 수술 과정이잖아요.”

“김 선생님 수술 복기 노트요. 지금까지 모든 수술 과정을 수기로 작성하셨대요.”

“그러고 보면 실력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봐요.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요.”

“그럼 김 선생님이 내준 숙제하는 중이예요?”

“네, 이것도 수술실 극복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좀 도움이 돼요?”

임정숙 간호사는 이찬희가 수술실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상황이 닥쳐 봐야 알겠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이 쌤 좀 달라진 거 모르죠?”

“제가요?”

“네. 환자 볼 때 전과 다르게 자신감도 생긴 것 같고 한결 성숙해졌다고나 할까요?”

“진짜 의사 태가 나나 보네요.”

늘어난 환자로 덩달아 업무량도 늘어났지만 이찬희는 의사로서 뿌듯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외래 환자는 마무리됐고 응급실만 정리하면 되려나.”

짬이 난 사이 태경은 오늘도 병원을 다녀간 환자들의 다섯 번째 바이탈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아!”

요 며칠 잠이 부족해서인지 환자가 없을 때면 하품이 나왔다.

환자들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던 그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진료실을 나섰다.

“응급실에 이벤트 없죠?”

“네, 선생님.”

“급한 환자 들어오면 바로 콜하세요.”

“알겠습니다.”

“잠깐…….”

커피를 들고 진료실을 가려던 태경이 다시 등을 돌려 접수처로 다가갔다.

“저 여자분 진료 본 적 있나요?”

“저쪽에 있는 저분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두 사람이 가리킨 사람은 젊은 동남아 외국 여자였다.

“아니요. 선생님 외국인분 접수된 건 없는데요.”

“그래요? 그럼 응급실 진료 본 적은요?”

“잠시 만요. 없어요.”

진료실로 가던 걸음을 멈춘 것 저 여자 때문이었다. 태경의 기억이 맞는다면 외국 여자는 한 시간 가까이 병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아니에요. 볼일 봐요.”

접수처에 커피를 내려놓은 태경이 외국 여자에게 다가갔다.

‘시큼하네.’

여자에게서 나는 냄새는 1단계에 불과했지만 태경은 확신했다.

접수를 하지도 진료를 보지도 않으면서 병원에서 그만큼이나 기다렸다는 건 뭔가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안녕하세요.”

“……!”

안 그래도 불안한 표정으로 대기실에 앉아 있던 여자는 갑작스런 태경의 아는 척에 꽤나 놀란 반응을 보였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어…….”

“혹시 도움이 필요해요?”

“의샤? Cậu là bác sĩ à?”

여자는 질문에 소통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태경은 그제야 이 외국 여인이 의사소통 때문에 접수를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게 있었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낸 태경은 번역 어플을 켰다. 그리고 내용을 적은 다음 화면을 여자에게 돌렸다.

[혹시, 베트남분 맞나요?]

대학병원에서도 외국 환자가 종종 있었기에 그녀가 하는 말이 베트남어라는 걸 알았다.

[네, 맞아요. 저 베트남 사람이에요.]

태경이 베트남어를 사용할 수 있게 화면을 넘겨주자 그녀가 답변을 써 보여 줬다.

[대기실에 계속 앉아 있던데 병원에 아파서 온 거 맞아요?]

[네. 한국말도 잘 모르고 남편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는 이 병원 의사에요. 제가 진료를 봐 줄게요.]

[근데 우리 남편 아직 안 왔는데…….]

[핸드폰으로 남편분에게 전화하세요.]

“땡큐, 고맙습니다.”

서툰 한국말로 감사 표시를 한 여자는 태경의 핸드폰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 전화?”

남편과 통화를 하던 여자는 간단한 단어를 말하며 태경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실례지만 전화 받으시는 분이 의사 선생님 되십니까?

“네, 우리병원 의사입니다. 남편분 되시나요?”

-예. 제 와이프입니다.

“아내분께서 남편분을 기다린다고 하더라고요.”

-저 때문에 오래 기다렸을 겁니다.

한국말이 워낙 서툰 아내는 일이 끝난 남편과 병원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시간을 잘못 알려 준 남편 때문에 아내가 일찍 도착했고 휴대폰까지 집에 두고 와서 무작정 남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집으로 가야 하나 병원에 먼저 들려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때문에 걱정을 덜었습니다. 전화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아내분 진료를 지금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저도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제가 와이프에게 말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제 와이프 이름은 응우옌 푸엉입니다.

“전화. 감사해요.”

남편과 통화를 마친 여자는 한결 편해진 눈빛으로 휴대폰을 돌려줬다.

“푸엉 씨?”

“나 푸엉.”

“진료 볼게요. 나 따라와요.”

태경은 접수처 직원에게 사정을 말한 뒤 푸엉과 함께 진료실로 향했다.

* * *

“푸엉 씨 어디가 아파요?”

“아파요. 나는 여기가 아파.”

베트남 환자는 태경의 말을 이해한 듯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아픈 부위를 설명했다.

“배가 아프군요. 언제부터 아팠어요?”

“언제?”

아무래도 한국어가 많이 서툰 탓에 환자와의 소통이 쉽지 않았다. 태경은 할 수 없이 남편이 올 때까지 어플을 다시 사용하기로 했다.

[배가 언제부터 아팠나요?]

[아픈 거는 이틀 정도 됐고 종종 이렇게 아프곤 했어요.]

[혹시 대…….]

“선생님?”

번역기로 환자로 대화를 이어 가던 중 간호사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푸엉 씨 남편분 오셨는데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철컥-

“실례합니다.”

“남편아!”

남편이 등장하자 진료 의자에 앉아 있던 푸엉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안녕하십니까, 푸엉 남편 이고철입니다.”

아내와 따뜻한 눈인사를 나눈 남편은 태경에게 인사를 하며 그녀 옆에 앉았다.

“아내분께서 혹시 대변을 잘 보시나요?”

“아니요. 변비가 있습니다.”

베트남어가 능숙한 이고철이 푸엉의 말을 통역하며 진료가 한결 수월해졌다.

“이 사람이 변을 이삼일에 한 번씩 봐요.”

“아까 아내분이 그러는데 종종 아팠다고 하시더라고요.”

“맞습니다. 병원을 몇 번이나 가려고 했는데 한국 와서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저희 두 사람을 보고 병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아내가 마음 아파하더라고요.”

남편은 50대와 30대인 두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오해를 사는 일이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저희 사이가 좀 의아하시죠?”

“아닙니다.”

“좀 그래 보일 순 있지만 이래 봬도 저희 두 사람은 베트남에서 3년 연애 끝에 결혼한 부부입니다. 제가 진료 중에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아내분 마지막 대변이 언제였나요?”

“3일? 3일 됐다고 하네요.”

의외로 복통을 호소하는 환자 중에 변비가 많은 편이다.

“저기, 아내가 변을 못 봐도 배가 아플 수 있냐고 묻네요.”

“그럼요. 배출해야 할 변이 쌓여 변비가 되면 그로 인한 복통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내분께 머리를 이쪽에 두고 베드에 누워 보라고 해 주세요.”

“네, 선생님. 푸엉 똑바로 누워야지.”

비스듬히 누운 아내의 자세를 고쳐 주기 위해 남편이 베드에 다가간 그때였다.

“……!”

남편이 진료실에 등장한 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표정이 좋지 않던 태경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그의 시선이 환자인 아내가 아닌 남편에게 쏠렸다.

‘이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