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노xxx!
“선생님, 조새이 씨와 남편분 오셨어요.”
“네, 들어와요.”
임정숙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온 젊은 신혼부부는 태경의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조새이 씨? 그리고 우리 남편분?”
“네.”
“저는 처방전을 줄 수 없어요.”
“뭐라고요?”
“의사로서 사후 피임약에 대한 처방전을 두 사람에게 줄 수 없다고요.”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처방전을 주겠다며 친절하게 굴던 태경의 달라진 태도에 두 사람은 발끈했다.
“지금 저희랑 장난하세요?”
“장난 아닌데.”
“환자한테 거짓말하는 게 장난이 아니면 뭔데요?”
“소……아니, 새이야, 진정해.”
“너도 아까 들었잖아. 이 선생님이 처방전 준다고 기다리라고 분명 그랬잖아. 제 말이 틀려요?”
“맞지. 내가 아까 분명 그랬지.”
여전히 친절했지만, 어딘지 묘하게 바뀐 태경 때문에 여자는 갸웃했다. 단순한 반말 때문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좀 달랐다.
“왜 갑자기 처방해 줄 수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발끈하며 따지는 여자에게 태경이 시원한 한 방을 날렸다.
“우리 두 친구는 신혼부부도 아니고 대학원생도 아니니까.”
“그, 그게 무슨…….”
“너희 아직 미성년자 고등학생이잖아.”
“…….”
“……!”
확인 사살까지 하는 태경의 말에 두 사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태경도 임정숙 간호사도 두 사람과 첫 마디를 나눈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신혼부부도 대학원생도 아닌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아직 앳된 얼굴 밑으로 어른 티를 내려는 차림새와 말투도 가짜 신분증도 소용없었다.
두 사람은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찾아왔겠지만 병원 밥을 먹는 의료진들에게 이런 일은 꽤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너희 둘이 사귀는 사이니?”
“…….”
“그 약이 왜 필요한지 선생님이 물어봐도 될까?”
“…….”
기세 좋게 당당하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입을 닫았다.
“친구야? 사후 피임약은 고량의 호르몬제야. 복용 후 자칫 부정 출혈이 있을 수도 있고 월경 주기가 불규칙해질 수도 있어.”
잘 알고 있다고 큰 소리를 치던 여학생은 아랫입술을 잘끈 씹고 있었다.
“우리 친구들 말 안 할 거야? 너희 도움이 필요한 거잖아.”
“…….”
“혼내려는 거 아니야. 선생님이 도와줄게.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도와 줄 수 없어.”
“…….”
“우리 남학생은 이름이 뭐지?”
“혀, 현우요. 하현우.”
“옆에 친구는?”
남학생은 여자 친구의 눈치를 보다 작게 답했다.
“조솔이요.”
“현우야 솔아, 너희 힘들게 고민하다 이 방법까지 써 가며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동안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어. 그렇지?”
“으……으아!”
태경이 따뜻하게 두 사람을 타일렀다. 그러자 끝까지 침묵하던 여학생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무, 무서웠어요. 흑흑!”
“울지 마. 응?”
임정숙 간호사가 미리 준비한 티슈를 여학생에게 건네며 다독였다.
“흐윽!”
여학생은 속눈썹에 칠한 마스카라가 눈물 자국에 흘러내릴 때까지 펑펑 울었다.
“예쁜 얼굴 판다 되겠다. 그만 울어.”
“죄송……해요.”
“죄송하긴. 아니야. 너희 약이 필요한 상황이니?”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병원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사후 피임약을 처방해 주지 않아. 보호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거든.”
“안 돼요. 저희 둘 다 부모님한테 맞아 죽어요.”
“그럼 맞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임정숙 간호사가 버럭 야단을 쳤다. 무턱대고 한 야단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나온 말이었다.
“솔이도 저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어요.”
“테스트기는 해 본 거야?”
“아니요.”
“그런데?”
“제가 생리를 안 해요.”
여학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임정숙 간호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후 피임약은 일정 기간 안에만 그 효과가 있어.”
“알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xxxxx이랑 사후 피임약이랑 함께 복용하면 효과 있다고 해서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딸을 키우는 임정숙 간호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사자후를 날릴 뻔했다.
“그거 다 근거 없는 거짓말이야.”
“정말이에요?”
“당연하지. 테스트기를 해 볼 생각은 안 했어?”
“무서워서요. 저랑 솔이랑 1학년 때부터 사귀었거든요. 저번에 기념일이었어요. 근데 그때 분명…….”
남학생은 태경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럼. 일단 이럴게 아니라 확실하게 체크를 해 보자. 그래야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있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해요.”
“계속 불안해하며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럼 어떡해요?”
“솔아, 혹시 오한을 느끼거나 감기 같은 증상이 있거나 소변이 평소보다 좀 더 마렵거나 하지는 않았니?”
“아니요. 전혀요. 제가 건강에 되게 예민한 편인데 그런 증상은 전혀 없었어요.”
태경은 임신 초기 증상을 물어봤다. 하지만 이것도 개인차가 있기에 정확한 진단이 필요했다.
잠시 후, 태경의 콜을 받은 의진이 진료실로 찾아왔다.
“여기 선생님은 산부인과 진료를 보시는 분이야.”
“안녕. 선생님이 솔이 진료를 도와주려는데 같이 갈까?”
“……네.”
“저, 저도 갈까요? 솔이가 겁이 많아서요.”
“아니, 현우는 선생님이랑 같이 있자. 겁나는 거 아니니까 염려하지 마.”
“네. 솔아 나 여기 있을게. 잘 갔다 와.”
“응.”
15분 뒤.
“현우야!”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학생이 남학생의 이름을 격하게 불렀다.
“솔아 어떻게 됐어?”
15분 동안 초조하게 기다리던 남학생이 다급하게 묻자 여학생이 의진을 쳐다봤다.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아니야.”
“네! 그게 정말이에요? 솔아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선생님이 꼼꼼하게 확인해 주셨어.”
당사자인 두 사람뿐만 아니라 태경을 비롯한 임정숙 간호사까지 모두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솔이가 분명 생리 안 한다고 했는데 그건 왜 그런 거예요?”
“그건 여성의 몸은 호르몬의 영향을 받거든.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하면 월경을 건너뛰는 경우도 있어.”
“되게 신기하네요.”
“신기는 이 녀석들아!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이 어린 것들이 혹시라도 임신을 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태경은 두 사람에게 살짝 꿀밤을 매겼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죄송은 내가 아니라 너희 스스로에게 죄송할 일이야. 학교에서 성교육 안 해 줘?”
“그게 해 주긴 해 주는데 거의 초등학생 수준이에요.”
“맞아요. 애들은 이미 알 거 다 아는데 정작 중요한 건 쏙 빠져 있고 무슨 고리타분한 내용만 가득해요.”
“그리고 선생님이 이런 말하면 꼰대 같다고 하겠지만 학생은 학생의 그 본분이 있는 거야.”
“알아요. 공부하라는 말 하시려는 거잖아요.”
“근데 저희 공부 잘해요. 전, 전교 1등이고 현우는 2등이에요.”
“맞아요. 저희 둘 다 선생님처럼 의사 될 거예요.”
“이것들이 진짜! 공부 잘하면 이런 일 해도 된다는 거야!”
참고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결국 사자후를 날렸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저희도 깊이 반성하고 있어요.”
“솔이, 현우, 선생님 말 잘 들어.”
태경은 두 학생의 눈을 번갈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건 축복할 일이야. 그런데 얘들아 사랑에도 책임이라는 게 따라. 너희는 아직 그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어리고 또 지금 해야 할 일도 있잖아. 선생님은 너희 둘이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다시는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지금 같은 일을 만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네, 잘 알아요.”
“저도요.”
현우와 솔이는 태경의 말에 뉘우치는 바가 많았다.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과 본인들의 행동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이거 보이지?”
휴대폰을 꺼낸 태경은 너튜브를 검색한 화면을 두 사람에게 보여 줬다.
“이거 의사 선생님이 하는 채널인데 성교육에 도움이 될 거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희 둘 다 나 따라 해. 노xxx!”
“에이! 선생님 저희 그 말 알아요. 아마 저희 반 애들 거의 다 알걸요?”
“알아도 따라 해. 따라 하고 마음과 머리에 새겨!”
태경의 불호령에 두 사람은 세 번을 큰 소리로 복창했다.
“솔이 현우 너희 의사가 목표라고 했지?”
“네.”
“맞아요.”
“너희 둘 다 의대 입학하면 선생님 찾아와. 그때 맛있는 거 사 줄게.”
“정말요?”
“그래. 대신 그때까지 건전하게 서로 좋은 영향을 주는 그런 사이로 만나. 약속하는 거다.”
“네.”
“저는 이제부터 선생님 같은 의사가 되려고요.”
“나도.”
“그래. 그럼 얼른 집에 가서 공부해. 참! 너희들 병원비는 있니?”
태경은 혹시라도 아이들이 병원비가 없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 걱정이 민망할 정도의 답변이 돌아왔다.
“네, 저희 용돈 많이 받아요.”
“그럼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라.”
얼굴의 근심이 사라진 두 학생은 밝은 표정과 함께 임정숙 간호사와 진료실을 나갔다.
“이런 일 있을 때마다 청소년들을 위한 확실한 성교육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맞아. 달라지긴 해야지. 그래도 애들한테 별일 없이 마무리돼서 다행이야.”
“그러니까요.”
“그나저나 내가 지금까지 계속 생각해 봤는데 확실히 잘못된 거 같아.”
“뭐가요?”
“고기값 말이야.”
“아, 그 문제의 오십만 원이요?”
“그래.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잘못됐을 거야.”
반드시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처럼 태경은 간절했다.
“도착할 때 됐을 거예요. 오면 한 번 물어보세요.”
“그래야지. 우리 귀여운 후배님들 보고 싶어 죽겠는데 빨리 왔으면 좋겠네.”
* * *
태경이 카드값 범인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때, 이미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응급실에 합류한 상태였다.
“최 쌤 우리가 좀 과했던 거 같지 않아?”
“그걸 말이라고 해.”
먹을 땐 위장까지 행복했지만 지금은 등골이 오싹했다.
진짜 딱 1인 분만 먹으려 했었다. 그런데 무슨 소고기가 그리 맛있던지 두 사람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먹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5인 분까지 먹은 뒤였다.
“그러게. 1인분 소리는 왜 했어?”
“최 쌤이 그런 말 하면 섭하지. 너님께서 나보다 더 드셨거든요.”
“그럼 이 선생은 안 먹었어?”
“선생님 9번 베드 환자분이요.”
두 사람이 유치한 말싸움을 이어 가던 사이 간호사가 환자의 부재를 알리자 최모나가 베드로 향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 내가 가려고 했는데.”
“학회 잘 갔다 왔어요?”
아쉬워하는 이찬희를 응급실로 들어온 임정숙 간호사가 불렀다.
“네, 진짜 유익하고 아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저기 혹시 김 선생님 화나셨나요?”
“글쎄요. 이건 뭐랄까. 화난 걸 떠나서 강한 충격을 받으신 거 같아요.”
“그 정도예요?”
“아까는 카드 도난 신고에 보이스 피싱이 아닐까 하시던데요.”
“정말요? 아 어떡하지.”
“아니, 근데 정말 두 분이 오십만 원이나 드신 건 맞아요? 계산 잘못된 거 아니에요?”
“애석하게도 맞아요. 어떡하죠? 저 선생님 얼굴 못 볼 거 같아요.”
이쯤 되니 이찬희는 태경을 보는 게 민망해졌다.
“그거 쉽지 않겠는데요.”
“예? 왜요?”
“이미 오셨거든요. 그럼 두 분이서 말씀 잘 나누세요.”
“어! 우리 이 선생, 잘 갔다 왔어?”
태경은 이찬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상당히 기분 좋게 대했다.
“그럼요. 선생님 덕분에 정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행이네. 그래, 밥은 잘 먹었고?”
“네, 맛있게 잘 먹긴 했는데……. 죄송합니다.”
“뭐가?”
“너무 과하게 먹은 거 같아서요.”
“아니야. 죄송하긴. 내가 사 먹으라고 했는데 뭐가 죄송해. 괜찮아. 잘 먹었으면 그걸로 됐어.”
죄송하다는 이찬희 말에 태경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어째 눈은 웃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전혀 안 괜찮았다. 이미 결제된 고기값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과하게 먹은 후배들이 살짝 얄미웠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안 그래도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그보다 이 선생?”
“네, 선생님.”
“오늘 학회 들은 거 정리했지?”
“그럼요. 양이 얼마나 많던지. 간신히 했습니다.”
“좋아, 그럼 복습을 해야겠지?”
“예? 복습……이요?”
“새삼스럽게 왜 그래. 파트별로 싹 정리해서 제출해.”
“설마 수기로요?”
“당연하지.”
“선생님 혹시 소고기 때문에 언짢으셔서 그러시는 거라면…….”
“이찬희? 내가 무슨 좀생이도 아니고 그깟 소고기 좀 먹은 걸로 그럴 거 같아?”
지금 태경의 행동은 누가 봐도 그런 거 같아 보였지만 이찬희는 말을 아꼈다.
“근데 왜 저만 합니까? 최 쌤도 같이 먹었는데요? 최 쌤은요?”
“최 선생도 해야지. 나 퇴근하니까 이 선생이 전해 주고 나 올 때 까지 다 해 놔.”
“그럼요, 반드시 꼭 전달하겠습……저기 선생님!”
이찬희는 말을 하다 말고 응급실을 나서는 태경을 쫓아갔다.
“선생님, 잠시만요.”
“왜?”
“선생님 방금 퇴근하신다고 하셨어요?”
“어. 뭐 잘못됐어?”
잘못됐다. 남들은 퇴근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병원 지박령인 태경이 퇴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랄 노 자였다.
“퇴근 왜 하시는데요?”
“왜라니. 오프니까 퇴근하는 거지.”
“지금까지는 오프는 고사하고 퇴근도 안 하셨잖아요.”
“그것까진 알 거 없고. 환자에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콜하고 병동 일지에 환자들 특이 사항 다 체크해 놨으니까 잘 살펴봐.”
“무슨 일이신데요?”
이찬희는 오더보다 태경이 왜 갑자기 오프를 사용하는지가 더 신경 쓰였다.
“이찬희 너 내가 지금 한 말 들었어?”
“그럼요. 병동 환자 특이 사항 잘 체크하라는 말씀 새겨들었습니다. 그래서 왜 때문에 퇴근하시는 건데요.”
“내 개인사까지 네가 알 필요는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아니, 혹시 여자 소개팅이나 몰래 선이라도 보러 가세요?”
“어떻게 알았어? 나 선 보러 가.”
“예? 서, 선이요?”
워낙 환자와 병원밖에 모르는 태경의 입에서 여자 이야기가 나왔다는 게 상당히 쇼킹했다.
“그러니까 소문내지 말고. 입 단속해라.”
“당연하죠.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응원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