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47화 (146/472)

147화. 학회 발표

“잠 덜 깼으며 가서 세수 좀 하고 일단 마당에 좀 가 봐.”

“마당에는 갑자기 왜요?”

“누가 이 선생 찾아.”

“절 찾아요?”

“그래. 가 보면 아니까 빨리 가 봐.”

“예. 알겠습니다.”

태경의 말을 들은 이찬희는 급히 의국실을 나갔다.

“누구지?”

병원 정문에 있는 마당으로 나온 이찬희는 고개를 좌우로 살폈다.

“없는데?”

하지만 바람을 쐬러 나온 입원 환자와 보호자만 보일 뿐 자신을 찾는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 찾는 걸 잘못 들으신 거 아닌가? 타이나 하러 가자.”

“이 선생?”

몇 번 두리번거리며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는 이찬희를 장득칠이 불러 세웠다.

“장 요원님, 혹시 저 찾아온 사람 있어요?”

“있지. 조금 전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디 가셨나?”

“누군데요?”

“어! 저기 오시네. 여기요?”

장득칠은 병원 정문으로 들어오는 30대 남녀에게 손을 들며 외쳤다.

“이분이 이찬희 선생님이세요.”

“이 선생 뭐하고 서 있어. 얼른 가 봐.”

“아, 네.”

이찬희는 장득칠이 알려 준 남녀에게 다가갔다.

“이찬희 선생님이세요?”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눈이 부어 있는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이찬희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전 어제 요양병원에서 선생님이 처치해 주셨던 김수정 환자 딸이에요. 이쪽은 제 남편이고요.”

“안녕하세요.”

이찬희를 찾아온 사람은 전날 전원 문제로 고군분투했던 환자의 딸 부부였다.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직도 눈이 부어 있는 여자는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했다.

“저희가 어제 장모님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내려갔다가 조금 전에 서울 올라왔어요. 와이프랑 장모님 옆에 있으려고 짐 챙기러 왔다가 인사드리고 가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급하게 들렀습니다.”

“아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어머님은 좀 괜찮으세요?”

“네, 선생님 덕분에 오늘 재활 시작했어요. 어제 보호자로 오신 분이 이모세요. 이모가 정신없어서 인사 제대로 못 드렸다고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꼭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작년에 장인어른 돌아가시고 장모님께서 심적으로 힘들어하셨어요. 그러다가 교통사고도 나고 재활하려고 요양병원 들어가셨는데 갑자기 어제 일이 터져서 가족들이 정말 많이 놀랐거든요. 선생님이 많이 애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제 시술해 주신 교수님께서 초반에 약을 잘 사용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셨어요. 더 늦었다면 그땐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요. 선생님이 저희 엄마 살리신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90도로 숙여 가며 진심을 다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여자에게 이찬희는 자신의 엄마를 살려 준 은인 그 자체였다.

자칫 엄마를 두 번 다시 못 볼 수도 있었던 상황을 막아 줬으니 자식 된 입장에서는 수천 번 말해도 부족하지 않은 감사함이었다.

얼마나 뜨겁게 감사해하던지 부부를 보고 있던 이찬희도 덩달아 울컥하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선생님 이거 받아 주세요.”

여자는 남편이 들고 있던 투박한 상자를 이찬희에게 건넸다.

“아니에요.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꼭 받아 주세요. 약속하지만 제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저희가 작은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모님 보러 가기 전에 와이프가 떡을 드리고 싶다고 해서 새벽에 급하게 만든 겁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만들어서 맛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떡이 담긴 상자는 아직도 그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따뜻했다.

“동료분이랑 같이 드세요.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님 빨리 쾌차하시길 기도할게요. 조심히 가세요.”

떡이 든 상자 때문인지 가슴 언저리가 점점 따뜻해진 이찬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날 환자를 위해 정신없던 그 시간이 지금, 이 순간으로 인해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한 것도 없는데…….”

따지고 보면 의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했던 일이 이렇게 큰 감동으로 돌아오니 그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이찬희는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구동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동균아.”

-찬희야, 안 그래도 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다.

“방금 어제 그 환자분 따님 내외가 왔다 갔는데 네가 병원 알려 드린 거야?”

-응. 꼭 직접 인사 전하고 싶다고 하셔서 알려 드렸다. 나한테도 어찌나 감사해하시던지 민망해 혼났어.

“대단한 일도 아닌데 내가 더 감사하네. 동균이 너도 어제 고생 많았어.”

-야, 말은 바로 해야지. 고생은 네가 다 했잖아. 그리고 솔직히 너 어제 멋있더라.

“뭐래? 조만간 보자. 내가 술 한잔 살게. 이만 끊는다.”

-찬희야!

구동균은 전화를 끊으려 하는 이찬희는 다급하게 불렀다.

“왜?”

-나 내년에 인턴 다시 하기로 했어. 인턴 하고 전문의도 도전해 보려고.

“뭐! 그게 진짜야?”

-응. 어제 일 겪으면서 너 보니까 내가 의사로서 진짜 많이 부족하구나 싶더라고.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쉽지 않고 자존심 상해도 이 악물고 버티면서 하려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일단 부딪히고 끝까지는 한번 해 보려고.

“잘 생각했어.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

-그래.

“아, 맞다! 그리고 너 소개팅 잊으면 안 된다.”

-아, 새끼 잊지도 않네. 해 줄게. 수고해.

“너도.”

이찬희는 요 며칠 사이 가장 뿌듯함을 느끼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어머, 이 쌤 그게 뭐예요?”

“이거 떡이요. 환자 보호자분이 주고 가셨어요.”

“정말요? 감사해라.”

“직접 만드신 거래요.”

상자 안에는 낱개씩 포장된 꿀 백설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세상에 아직 따뜻한 거 봐.”

“이 쌤. 잘 먹을게요.”

“저도요.”

“선생님 떡 드세요.”

병원 직원들에게 떡을 돌리던 이찬희는 진료실에서 나온 태경에게 떡을 들어 보였다.

“웬 떡이야?”

“어제 스트록(stroke, 뇌졸중) 환자 보호자분이 주고 가셨어요.”

“환자는 괜찮대?”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시술받고 재활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잘됐네. 근데 이 선생 울었나 봐?”

“어머, 이 쌤 울었어요?”

태경의 말에 임정숙 간호사가 이찬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가 보다. 눈 보니까 울었네.”

“아니, 울긴 누가 울어요. 날씨가 워낙 좋아서 하품하다 살짝 눈물 난 거예요. 팀장님 이거 다들 나눠 드세요.”

“이 선생 거기 서.”

떡이 든 상자를 최 팀장에게 넘긴 이찬희가 걸음을 옮기자 태경이 뒤를 따라가며 불렀다.

“뭐 잊은 거 없어?”

“네? 뭐가요?”

“안 통하니까 모른 척하지 말고.”

“그게 실은…….”

“설마 못 한 건 아니겠지?”

태경은 타이 연습에 관해 묻고 있었다.

“제가요 선생님. 하긴 했거든요. 근데 100개를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80개만 했어요. 저한테 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오늘 오후까지는 반드시…….”

“그래? 그럼 이따 오후까지 70개 완성해 와. 알았지?”

“예? 선생님 그건 아니죠? 갑자기 왜 50개가 늘어나요.”

“못 하면 50개 추가하기로 했잖아.”

“50개는 좀 아니죠.”

“시끄러우니까 쫓아오지 말고 가서 환자 봐.”

“저 어제 환자를 살렸는데 조금만 줄여 주시면 안 될까요? 후배의 이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세요.”

“응. 안 돼.”

“부당합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부당하면 이 선생이 원장 해.”

이날 이찬희는 태경을 볼 때마다 타이 연습을 줄여 달라고 사정했지만, 태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국 이찬희는 오후까지 70개를 꾸역꾸역 채워 제출할 수 있었다.

* * *

며칠 뒤-

“학회 가는 게 아니라 선보러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학회 발표를 가기 위해 모처럼 정장을 빼입은 태경을 보며 이찬희가 양쪽 엄지를 추켜세웠다.

“어때 좀 괜찮아?”

“솔직히 인정하긴 싫은데 좀 멋있네요.”

“이 선생, 내 다음 논문 같이 들어갈래?”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잘 못 들은 게 아니다. 이찬희는 일부러 못 들은 척한 것이다. 가뜩이나 지금도 할 일이 많은데 논문까지 쓴다면 그만큼 잡일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지금 논문까지 하려면 벅차겠다.”

태경도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이찬희도 그렇고 최모나에게 논문 압박을 주지 않았다.

“근데 선생님은 환자 보느라 바쁘신데 언제 연구까지 하신 거예요?”

“아무리 바빠도 마음만 먹으면 하지. 그리고 뭐 취미로 한 거야.”

“취미로 논문이라니.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그런 취미는 안 생길 것 같네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나 싶겠지만, 태경은 진심이었다. 아직 별다른 취미가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학적인 것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논문까지 쓰게 된 것이다.

“근데 주제가 뭐예요?”

“IPMN(intraductal papillary mucinous neoplasm의 약자. 췌관 내 유두 상 점액 종양)의 유형에 따른 치료법과 그 예후야. 관심 있어? 어떻게 관심 있어?”

“관심보다도 이해도 못 할 것 같은데요.”

“나중에 내가 자세히 알려 줄게.”

“아니요. 선생님 마음만 받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선생님, 언제 오세요?”

이찬희의 인사말 뒤로 임정숙 간호사가 말했다.

“발표 끝나고 올 거예요. 급한 환자 생기면 연락 주세요.”

“네, 오늘 옷도 멋지게 입으셨는데 발표도 멋지게 잘하고 오세요.”

“갔다 올게요.”

* * *

태경은 학회가 열리는 큰 유리 건물이 돋보이는 유명 호텔에 도착했다.

“내부가 아주 으리으리하네.”

유명 연예인들이 기자회견을 주로 했던 곳이기도 한 14층 대회의실이 오늘 발표 장소였다.

“준비한 대로만 하자.”

학회는 자신이 연구한 결과물을 서로 나누는 자리이며 동시에 약간의 알력이 작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의사는 이런 알력에 관심이 없지만, 최전선에서 학회를 이끄는 의사들은 매우 중요시하곤 했다.

물론 태경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순수하게 자신이 궁금한 분야를 연구한 것이다. 그리고 학회도 다른 이유 없이 태경의 주제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발표를 요청했다.

발표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둘 의사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경의 발표가 시작됐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병원 원장 김태경입니다.”

어두운 내부 안에 발표자인 태경만 조명을 받아 밝게 보였다.

“저를 비롯한 아시아의 외과학회에서는 9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정립된 IPMN의 치료 가이드라인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태경은 전혀 떨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멍석을 깔아 주자 제대로 신나게 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취미로 한 연구이기에 더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발표에 임했다.

“이상 제가 올해 초까지 한 사례들과 함께 연구한 주요 병원들 목록입니다.”

그렇게 그동안 준비한 발표를 잘 마쳤다.

“질문이나 코멘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태경이 서 있는 무대 옆쪽에 앉아 있던 학회 사회자가 다가와 마이크를 잡았다.

“네, 김태경 원장님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지고 학회 발표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긴 발표들이 전부 끝나고 사람들은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병원에 별일 없겠지?’

태경은 혹시나 병원에 급한 환자가 있는지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

“김 선생? 발표 잘 봤어.”

“고 선생도 왔네.”

그 뒤 안면 있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던 태경은 휴대폰이 울리자 잠시 자리를 이동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김태경입니다.”

“김 선생?”

전화를 받자마자 휴대폰과 등 뒤에서 동시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한 발표 잘 들었어요.”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 종료 버튼을 누른 태경이 천천히 뒤를 돌아섰다.

“오랜만이에요. 김태경 선생.”

값비싼 정장을 입고 정면에서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사람은 고계득이었다.

“우리 잠시 대화 좀 할까요?”

그는 한껏 광대를 밀어 올린 채 미소를 유지하며 태경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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