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신화대병원 소속 의사입니까?
조금 전, 태경이 무대에서 학회 발표를 하고 있을 때였다.
불이 꺼진 어두운 내부 맨 뒤편에 서 있는 고계득은 꽤 진지한 표정으로 발표하는 태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물론 지금 실내에 가득 울리고 있는 태경의 발표 내용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딴 발표야 어찌 됐든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
고계득은 쾌쾌한 담배 냄새가 섞인 한숨을 입 밖으로 뱉으며 여전히 시선은 무대 위 태경을 향한 채 불편한 심경을 속으로 말했다.
‘왜! 하필이면 저 인간이냐고…….’
태경이 교수 자리를 보기 좋게 거절하고 자존심이 상함은 물론 한동안 이사장에게 무능하다며 갈굼까지 당했던 고계득이었다.
그 때문에 태경에게 악한 감정을 갖고 이를 갈던 그였다. 그런 고계득이 갑자기 친절한 말투로 전화를 걸어 만남을 주선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 * *
얼마 전-
“Good shot!”
“이거, 아무래도 이제 고 원장 자네랑 공치면서 내기는 그만 쳐야겠어.”
“저보다 훨씬 잘 치시는 대표님이 그런 말씀 하시면 제가 서운합니다.”
골프채를 캐디에게 넘긴 고계득은 각별한 사이인 제약회사 대표 이철후와 라운딩을 즐기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사님께서는 고 원장 같은 능력 있는 사람이 병원을 잘 꾸리고 있으니 걱정이 없겠어.”
“별말씀을요.”
“병원 운영이 좀 어렵나? 환자 상대로 장사해서 이익을 뽑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우리 고 원장이 대단한 거지.”
“저도 아직 부족합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소식 들었습니다. 대표님, 새로운 약을 승인받으셨다고요.”
“하하! 우리 고 원장은 병원 일도 바쁜 사람이 가만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참 정보가 빨라.”
“소문이 쫙 났던데 제가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꽤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잠깐 좀 멈추죠.”
이철후가 말끝을 흐리자 고계득이 전동 카트를 운전하고 있는 캐디에게 말했다.
“내가 대표님과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먼저 이동하세요.”
고계득이 캐디들에게 다음 장소로 이동하라는 말과 함께 팁을 건네자 캐디들이 인사를 하며 이동했다.
“감사합니다.”
“고 원장 자네는 사람이 눈치가 참 빨라서 좋아.”
캐디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이철후는 카트에서 내렸다. 그리고 비서가 실어 줬던 묵직한 가방 하나를 들고 고계득에게 건넸다.
“고 원장, 이번에도 좀 잘 부탁하네.”
이철후가 건넨 가방의 지퍼를 살짝 열고 그 안을 확인한 고계득의 표정은 황홀 그 자체였다.
가방 안에는 오만 원권 지폐가 뭉치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눈에 보기에도 그 액수가 상당한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약 좀 팍팍 써 줘. 내가 고 원장 믿는 거 알지?”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대표님은 언제나 그렇듯 그저, 저만 믿으면 됩니다.”
고계득이 이철후에게 받은 돈은 일명 리베이트였다.
이철후는 자기네 회사 약을 사용해 달라는 명목으로 벌써 수년째 고계득에게 리베이트를 전달하고 있었다. 특정 회사의 약을 밀어주는 대가로 받은 돈은 그 액수가 상당했다.
그뿐 아니라 고계득은 이철후의 회사에서 사외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그에 따른 돈도 받고 있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 돈을 주고받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우리 대표님 덕분에 제가 마음이 늘 따뜻합니다.”
“나도 우리 고 원장이 곁에 있어 든든해. 그나저나 신화대병원에는 인재가 참 많아.”
“우리 병원 의사들이야 다들 인재죠.”
“그렇긴 한데 왜 그 친구 있잖아?”
“그 친구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반응 보니까 우리 고 원장이 또 어지간히 아끼는 인재인가 보네. 뭘 그렇게 숨겨?”
“숨기다니요.”
“왜 저번에 아동 학대 건으로 난리 났을 때 인터뷰했던 주치의 말이야.”
고계득은 이철후가 말하는 주인공이 태경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고계득 옆에서 이철후는 휴대폰을 검색했다.
“그래, 김태경. 이 친구가 신화대병원 소속으로 현재 파견 진료 중이라며?”
“파견 진료요?”
“이 사람 끝까지 모른 척하기는. 고 원장이 의학 기자랑 인터뷰하면서 직접 말했잖아.”
고계득은 순간 잊고 있던 몇 달 전 의학 매체와 했던 인터뷰가 불현듯 떠올랐다.
‘저희가 알아보니까 영상 속 선생님이 신화대병원 출신이라고 하시던데 맞나요?’
‘출신이요? 이거 기자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잘못이요?’
‘김태경 선생님은 출신이 아니라 우리 병원 선생님입니다. 현재 협력 병원에서 파견 진료를 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태경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응급 환자를 수습하는 너튜브 영상으로 한창 주목받을 때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했던 거짓 인터뷰였다.
“고 원장이 인터뷰에서 우리 병원 선생님이라고 하는 걸 봤거든. 정말 신화대 병원 소속이야?”
“아, 예……. 김태경 선생은 저희 병원 소속이죠.”
이미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있기 때문에 고계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또 한 번 거짓말을 택했다.
어차피 여기서 태경이 신화대병원 소속이라고 해도 문제 될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인재를 파견 보낼 생각을 다 했어?”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요. 신화대학병원 같은 큰 병원만 병원도 아니고 진짜 필요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만 보면 고 원장이 생각이 참 깊은 사람이야.”
“과찬이십니다. 대표님 라운딩 끝나고 와인 한잔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고계득은 태경의 이야기를 그만 끝내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Rrrrrrrrr
“잠시만. 어, 여보……. 뭐! 뭐라고?”
이철후가 급하게 울리는 휴대폰을 받으며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병원이라고? 막내가? 알았어. 바로 갈게.”
그렇게 막내딸이 병원에 있다는 와이프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이철후는 고계득과 함께 신화대병원으로 향했다.
한 시간 뒤 VVIP 전용 입원 실로 올라온 이철후는 손등에 바늘을 꽂고 누워 있는 딸에게 다가갔다.
“해리야 괜찮아?”
“아빠? 나 몸에 돌 있어서 수술해야 한대.”
“돌? 돌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된 거야?”
고계득이 VVIP 담당 의사에게 물었다.
“환자분께서 콜레시스타이티스(cholecystitis, 담낭염)로 현재 쓸개에 담석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내가 설명할 테니 이 선생은 이봐 나가 봐요.”
“네, 원장님.”
“고 원장, 수술 괜찮은 거야?”
“수술이라고 해서 놀라셨을 텐데 당남염 수술은 간단한 수술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 그럼 우리 해리 좀 잘 부탁해.”
이철후는 늦둥이로 난 막내딸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제일 실력 좋고 제일 잘하는 의사로 붙여 줘.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요.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나 그럼 그 선생님한테 수술받고 싶은데…….”
“누구?”
“그 왜 있잖아. 이번에 김태경 선생님 말이야. 여기 소속이라며. 그 선생님 되게 실력자던데 나 그분한테 수술할래.”
“그래, 김태경 그 친구가 있었지?”
고계득은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다스리고 있었다.
‘여기서 왜 또 그 이름을 들먹이고 지랄이야! 이게 아닌데 젠장!’
“고 원장, 그 친구가 우리 딸 수술을 좀 맡아 줬으면 하는데 가능하지?”
“대표님. 김 선생은 현재 파견 나간 병원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임의로 일정을 조절하는 게 힘듭니다.”
“고 원장, 우리 사이에 이러면 나 좀 서운한데?”
고계득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받아먹은 돈이 있으니 뭔가 성의를 보이긴 해야 했다.
“그럼 제가 한번 김 선생한테 말해 보죠.”
결국 잠시 고민하던 고계득은 태경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원래의 고계득이라면 대충 연락했다고 둘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꼼꼼한 이철후가 나중에라도 직접 확인했다가는 민망한 상황을 겪을 수도 있었기에 태경에게 연락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철후 만큼 든든한 돈줄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로 했다.
* * *
학회 발표장-
“우리 잠시 대화 좀 할까요?”
그는 한껏 광대를 밀어 올린 채 미소를 유지하며 태경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안녕하셨어요.”
태경은 다가오는 고계득을 보며 차분하게 인사를 전했다.
“나야 잘 지냈습니다. 바쁜 사람 오래 안 붙잡고 있을 테니 잠깐만 시간 내줘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바로 아래예요.”
태경은 고계득을 따라 바로 아래층에 있는 고급 한정식 식당으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두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고 룸으로 들어왔다.
드르륵-
직원을 따라 룸으로 들어간 태경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이봐! 고 원장?”
룸 안에는 다른 일행 두 명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려올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유명한 선생님을 모셔 왔어.”
태경을 보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두 사람은 서울 대학병원의 원장들이었다. 직접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태경은 그들이 어느 병원 원장인지는 알고 있었다.
“김 선생님 인터뷰 잘 봤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나도 반가워요. 그래, 아이는 잘 회복하고 있나요?”
“네. 잘 회복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이 정말 큰일을 했더군요. 대단해요.”
“아닙니다.”
태경은 고계득이 왜 자신을 이런 자리에 부른 건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사실 고계득은 일부러 병원장 모임에 태경을 데려온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런 불편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면 아무래도 쉽게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원장님, 저한테 하실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인가요?”
“김 선생, 뭐가 그렇게 급해요? 차 한 잔 들면서 천천히 하자고요.”
빨리 이야기를 듣고 나가려는 태경에게 고계득은 차를 권했다.
“그나저나 어제 이 대표랑 라운딩 나갔다면서? 간만에 공도 치고 아주 좋았겠어.”
“좋기는. 코스 다 돌지도 못하고 이 대표 딸이 아프다는 연락 받고 바로 병원으로 갔어.”
“왜? 딸이 어디 안 좋아?”
“아니, 심각한 건 아니고 콜레시스타이티스(담낭염)라서 수술하기로 했어.”
“안 그래도 고 원장 신경 쓸 일도 많을 텐데 바쁘면 우리 병원에서 수술해 줄게.”
“박 원장 자네도 암센터 확장으로 바쁘잖아. 그러지 말고 그거 우리 병원에서 할게.”
병원장들은 큰손인 이철후와 긴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서로 수술하겠다며 나섰다.
“다들 꿈 깨. 이 대표가 은근히 까다로운 양반이라고. 그리고 그 수술은 여기 우리 김태경 선생님이 집도할 거야.”
‘내가 수술을 맡는다고?’
처음 듣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한 것도 잠시, 곧이어 들려온 소리는 태경을 더 황당하게 만들었다.
“하긴. 요즘 가장 유명한 의사가 신화대병원 소속인데 왜 우리한테 수술하겠어.”
“이런 거 보면 고 원장이 참 사업 수완이 좋아. 결국엔 김 선생님을 파견 진료 보내서 이렇게 스타 의사로 만들었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신화대병원 소속? 파견 진료?
도대체 당사자인 본인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이 저런 말들이 사실인 것처럼 왜 저렇게 떠들고들 있는지 어이가 없었다.
‘이래서 보자고 한 거였구나?’
태경은 이제야 고계득이 자신을 보자고 한 이유와 일면식도 없는 병원장들 사이에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럼 김 선생님은 이번에 다시 본원으로 복귀하는 건가요?”
“그럼 복귀하는 거지. 이번에 교수 자리 놓고 고심 중이야.”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된 고계득은 한술 더 뜨고 있었다.
태경이 아직까지 별다른 말이 없자 은근슬쩍 교수 제안을 다시 한번 꺼냈다.
태경의 스타성과 실력이 여전히 탐이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니 철저한 기회주의자인 고계득은 이런 상품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거 김 선생님께서 앞으로 신화대병원을 책임지겠네요.”
“제가 지금까지 세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태경은 더 이상 이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고계득 원장님?”
태경이 고계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신화대병원 소속 의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