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뿌리칠 수 없는 조건
태경은 더 이상 이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고계득 원장님?”
태경이 고계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신화대병원 소속 의사입니까?”
“하하! 김태경 선생?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저번에도 나랑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정색하며 물어보는 태경의 질문에 고계득은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태경은 쐐기를 박듯이 한 번 더 강조하며 물었다.
“언제요? 전 원장님과 직접 이 건에 관한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는데요.”
태경은 더 이상 신화대병원에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던 그때의 노예 김태경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 원장인 고계득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가 시키는 대로 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수직 관계였던 두 사람의 사이가 동등한 수평 관계로 바뀐 것이다.
“확실한 건 일전에 원장님께서 교수 자리를 제안하셨을 때 제가 거절했다는 겁니다. 그건 기억하시죠?”
처음 보는 태경의 모습의 고계득은 순간 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전 우리병원 소속이자 원장입니다. 그 말은 제 환자분들을 진료하고 수술하기에도 바쁘다는 말이죠. 고계득 원장님의 환자를 제가 수술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신화대병원에 계신 훌륭한 선생님께 맡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동료 의사들 앞에서 보기 좋게 망신당한 고계득은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쪽팔림을 넘어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찻잔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는 최대한 있는 힘을 다해 태연한 표정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를 어떻게 평가하건 그건 원장님 마음입니다. 하지만 파견 진료니 신화대병원 소속이라느니 이런 거짓말을 좀 삼가 주세요. 듣기 불편합니다.”
고계득이 했던 말을 태경도 알고 있었다. 친한 이동훈이 말해 줬기 때문이다.
드르륵-
“박 원장? 아무래도 우리가 자리를 좀 피해야 할 것 같네.”
“그러게, 말이야. 두 분이 오해가 있는 듯한데 대화로 잘 풀어 보시죠.”
고계득의 일행인 두 사람은 뭐가 잘못됐음을 직감하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김 선생 자네 나한테 서운한 게 많은가 봐.”
일행이 나가자 고계득은 태연한 표정 뒤에 숨겼던 본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는 눈도 있는데 동료들 앞에서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원장님께 서운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전 잘못된 점을 바로잡았을 뿐 무례하게 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자네 마음 이해해. 내 마음대로 파견 진료라는 소리를 한 건 미안하네. 하지만 그건 다 자네를 다시 본원으로 데려오기 위한 나의 계획이었어.”
“그 계획에 동참할 생각 없습니다.”
“자네 뜻 충분히 알았으니 더 이상 강요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아까 수술 건 말이야. 김 선생이 좀 해 주면 안 되겠나?”
고계득이 한 발 물러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철후 딸의 수술을 다시 한번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엠제이 제약회사 알지? 우리나라 굴지 기업이야. 자네가 그 집 딸 수술을 맡아 준다면 앞으로 의사로서 여러 가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어려운 수술도 아닌데 좀 맡아 줘. 낡아 빠진 병원에서 그저 그런 환자들만 계속 보는 것보다 VVIP 환자 치료해서 그들의 눈에 띄는 게 훨씬 더 득이 된다고. 이게 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의사라고 다 같은 의사가 아니란 말이야.”
고계득의 장황한 설명에도 태경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수술은 다음 주 수요일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 그날 수술이 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태경 역시 그날 일정이 있었다. 하지만 일정이 없다고 해서 고계득이 부탁한 수술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그럼 그 전날도 괜찮고 아니면 다음 날은 어떤가?”
“전날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일이 있습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나랑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거야?”
“말장난이 아니라 거절하는 겁니다.”
침착하다 못해 여유가 넘치는 태경의 표정과 달리 고계득은 귀까지 빨개지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전 그 수술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야! 김태경. 그 x만한 동네 구멍가게 같은 병원에서 원장 행세하니까 뭐라도 된 줄 알아? 너! 내 말이 우스워?”
태경이 끝까지 거절하자 고계득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자네도 알 텐데.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지 말이야.”
누가 봐도 협박하는 걸로 들렸지만 고계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의료계는 생각보다 좁았다. 그리고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이쪽 역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사람 하나 찍어 누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태경은 고계득의 저런 협박성 멘트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이미 그 권력에 한 번 찍어 눌려 봤고 잘못한 게 없으니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고계득이 상당히 안달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말이 있죠? 있을 때 잘하라고. 제가 신화대병원에 있을 때 그때 제 가치를 알아봤어야죠. 저는 더 이상 원장님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뭐야? 너 지금 말 다 했어? 그깟 인터뷰 하나로 사람들이 관심 가지니까 마치 네놈이 뭐라도 될 줄 아나 본데 그래 봤자 넌 그렇고 그런 밑바닥 의사일 뿐이야.”
“고계득 씨?”
“뭐, 뭐라고……. 고계득 씨?”
태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계득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며 돈으로 환자 골라 받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적어도 당신보다는 떳떳하고 환자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의사거든. 당신 쪽팔린 줄 알아. 의사면 의사답게 행동해.”
“……!”
한 방 제대로 먹은 고계득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할 말을 잇지 못했다.
“원장님? 앞으로는 서로 불편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끝낸 태경은 예의 있는 마무리와 함께 룸을 나갔다.
-탁
“야! 김태경!”
그리고 보기 좋게 망신당한 고계득이 던진 찻잔이 간발의 차로 태경이 나간 문에 맞아 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렸다.
“하아! 저 새끼를 어떻게 밟아 놓지?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치욕을 느낌 고계득은 분을 참지 못하며 이를 갈았다.
* * *
“훗!”
병원에 급한 환자가 없는지 전화를 한 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태경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살짝 새어 나왔다.
어안이 벙벙해 당황한 고계득의 얼이 빠진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끼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 원장이랑 한판 했다며?”
얼른 뒤를 돌아보자 김건형 회장이 익살스러운 표정과 함께 웃고 있었다.
“회장님!”
“오랜만이야. 김 원장. 나 좀 따라와 봐.”
“예?”
“차 한잔할 시간은 있잖아. 얼른 와.”
태경은 김건형을 따라 한식당 맞은편에 있는 카페 안쪽 독립된 공간으로 들어갔다.
“자! 마셔 봐. 게이샤 커피라고 이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라고 하더군. 영국에서는 이걸 한 잔에 8만 원 넘게 받더라고.”
직원이 커피를 내려놓자 김건형이 태경에게 권했다.
“어때. 맛이 좀 다르지?”
“비싼 커피를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전 그냥 믹스 커피가 가장 맛있는 것 같네요.”
가장 비싼 커피라고 했지만 어쩐지 태경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렇지? 사실 나도 그래. 도대체 이걸 왜 그렇게 비싸게 주고 먹는지 원……. 그나저나 고계득한테 아주 멋지게 할 말 했다며?”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어떻게 알긴. 이 호텔이 내 거니까 알지. 여기 셰프 솜씨가 좋거든. 마침 밥 먹고 나가려는데 자네랑 고계득이 룸으로 들어가는 거 봤어. 궁금해서 지배인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봤지.”
“그러셨군요.”
“고계득이 똥 씹은 표정을 내가 봤어야 하는데 아까워. 잘했어.”
“뭐가요?”
“뭐긴 뭐야. 고계득한테 시원하게 말 잘했다고. 그 인간 인성이 구려서 내가 딱 싫어하는 타입이거든. 이쪽저쪽 어떻게든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데 그게 영 보기가 싫어.”
김건형도 병원 이사장이기에 의료계 사람들에 대해서 나름 잘 알고 있었다.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뭔가 칭찬받을 일을 한 것 같네요.”
“당연하지. 애고 어른이고 혼날 일을 했으면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는 거야. 근데 괜찮겠어? 고 원장 아마 약이 바짝 올랐을 거야. 자네 골탕 먹일 수도 있어.”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고, 몇몇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비난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은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김건형은 태경의 말에 아주 흡족한 듯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인생을 살아 보니까 그 말이 맞아. 그게 정답이야.”
“제가 어릴 때 집이 가난했는데, 그 때문에 절 괴롭히는 애들이 있었어요. 어느 날 집에 와서 이야기하니까 아버지가 그때 해 주신 말인데 살면서 많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아버님께서 멋진 말을 해 주셨군. 그나저나 요즘 병원은 잘 돌아가고?”
“네, 특별한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됐지 뭐. 그런데 자네는 큰물에서 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거야?”
“지금 일도 즐겁고 앞으로 병원을 잘 키워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원장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사실 좀 안타까워. 자네 같은 사람이 큰 병원에서 다양한 연구도 하고 후배 육성에 힘을 보태면 좋을 텐데 말이야.”
김건형도 의사인 태경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인성과 실력은 물론이고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과 남을 가르치는 능력까지. 타고난 사업가의 눈으로 봐도 태경은 여러 면에서 뛰어났다.
그런 사람이 동네 병원에서만 머물기에는 확실히 아까운 인재였다.
“물론 본심이 더럽긴 하지만 고계득이 자네를 계속 탐냈던 이유가 이해 가. 나도 병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솔직히 자네가 탐이 나거든.”
“너무 과찬이신데요.”
“과찬은 무슨. 내가 자네한테 잘 보일 입장도 아닌데. 전부 사실이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 연락받은 곳이 꽤 있지?”
확신하며 물어보는 김건형의 질문에 태경은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태경은 그동안 몇몇 대형 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정중히 거절했다.
너튜브와 세라의 일로 잠시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회장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좋은 인재가 있으면 데려오고 싶은 거야 다들 똑같지 않겠나. 내 눈에 좋으면 다른 사람 눈에도 좋은 법이지. 김 원장?”
“네, 회장님.”
“만약……. 만약에 말일세.”
말하는데 거침없는 김건형이 어울리지 않게 잠시 뜸을 들였다.
“자네에게 모든 걸 맞춘 뿌리칠 수 없는 조건으로 제안이 와도 그때도 거절할 건가?”
“뿌리칠 수 없는 조건이요?”
“그래. 환자에 대한 진료와 수술 수가의 압박도 없고 원하는 연구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전폭적인 지원에 정년 보장까지 확실하지. 게다가 말도 안 되는 금액의 엄청난 연봉까지 제시한다면 말일세. 그래도 거절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