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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161화 (160/472)

161화. 아니요! 돼요! 완전 됩니다!

“……?”

부스럭 소리와 함께 봉지 안을 확인하던 박선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봉지를 묶고 저만치 가고 있는 시아버지에게 뛰어갔다.

“아버님! 이러지 마세요.”

구겨진 비닐봉지 안에 든 건 만 원과 오만 원권이 섞인 돈이었다. 얼핏 보아도 액수가 제법 되는 것 같았다.

“뭐가 말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에요.”

“보험이 있어도 중환자실은 비싸다고 하더라. 네 시어머니랑 같이 상의해서 한 거니까 병원비에 보태.”

박선영이 중환자실에 들어간 사이, 시아버지가 병원에 있는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찾아왔다.

“아버님. 정말 괜찮아요.”

시댁은 여느 집처럼 평범한 집이었다. 솔직히 시댁이 넉넉했으면 박선영은 저 돈을 홀가분하게 받았을 것이다.

저 돈은 아마도 시부모님의 노후 자금일 것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선뜻 받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선영아. 이 돈 사실 우리 강아지들 대학 가면 그때 너 주려고 엄마랑 내가 조금씩 모으고 있던 돈이야. 근데 사돈어른 소식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일부 찾았다. 그러니 네 돈이다 생각하고 병원비에 사용해.”

“아버님…….”

시아버지의 뜬금없는 고백에 박선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이번에 아범이 사기당해서 여유도 없잖아. 착하기만 한 남편 만나서 네가 고생이 많다.”

“아니에요. 그이가 가장 큰 피해자인데요.”

“그저 착하고 정직하게만 키웠는데 살아보니 착한 게 바보가 되는 세상이더구나. 처자식도 있는데 신중히 생각하지 못한 아범 잘못이 커. 내가 널 볼 면목이 없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그이 착한 모습이 좋아서 결혼 결심했어요.”

“내 새끼 예쁘게 봐줘서 고맙다. 그러니까 그 돈 얼른 받아.”

남편이 사기를 당해 정신없는 와중에 친정아버지의 수술 소식까지 이어져 마음이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시부모님의 따뜻한 위로와 생각지 못한 호의가 너무나 감사했다.

“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힘든 상황에 있지만 반드시 좋아질 거다. 아범도 사돈어른도.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반드시 열린다고 하잖니. 그러니 선영아 우리 조금만 힘내자.”

“……네. 힘낼게요.”

시아버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친 마음에 큰 힘이 됐다.

“아버님 졸리지 않으세요? 요 앞에 편의점 있는데 얼른 가서 피로회복제 사 올까요?”

“아니야. 늙으면 잠도 별로 없어. 그리고 이 시간에 운전은 아직 거뜬해. 안전 운전할 테니까 걱정 마.”

“네, 아버님.”

박선영은 검정 비닐봉지를 두 손에 꼭 쥐며 시아버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잠시만요! 저기요?”

보조석의 문이 막 닫히려던 그때 이찬희가 뒷문으로 빠르게 쫓아 나왔다.

“저기 박주당 환자 보호자분 되시죠?”

“네, 딸인데요.”

“죄송합니다.”

이찬희는 고개가 땅에 닿을 듯이 푹 숙이며 사과부터 전했다.

“……!”

“아까 응급실에서 처음 전화를 드렸던 의사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까 제가 환자분을 더 말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환자분이…….”

“혹시 선생님께서도 저희 아빠 수술에 들어가셨나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박선영의 시선이 이찬희의 발로 향했다. 슬리퍼 안쪽으로 보이는 발 주변 맨살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가득했다.

“네? 네.”

박주당을 중환자실로 옮긴 이찬희는 화장실에서 급한 볼일을 보자마자 박선영을 보기 위해 주차장으로 바로 뛰어온 직후였다.

그렇기 때문에 차마 발에 묻는 피를 닦을 새가 없었다.

“선생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외과의에게 수술 도중 피가 묻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지만, 박선영에게는 아니었다.

저 핏자국을 보니 의사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예전부터 병원에 돈 쓰는 걸 무척 싫어하셨어요. 그리고 워낙 고집이 센 분이라 아마 선생님 아니었다면 응급실에서 그냥 가셨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선생님 잘못 아니에요. 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이찬희의 잘못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보호자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설득해 달라고도 했고, 나중에는 보호자의 동의하에 입원을 먼저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찬희가 사과하는 건 의사로서 환자를 더 설득하지 못한 본인 양심에 대한 가책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보호자가 싫은 소리는 고사하고 고맙다고 말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저희 아빠 입원하게 붙잡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안 그러면 더 큰 일 날 수도 있었잖아요.”

보호자를 위로해야 하는데 오히려 위로받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님 수술 잘되셨으니까 좋아지실 거예요.”

“네, 퇴원할 때까지 잘 좀 부탁드릴게요.”

“그럼요.”

“그럼 수고하세요.”

의사는 환자나 보호자에게 위로받는다는 태경의 말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더 주의하고 더 생각해서 열심히……. 아니, 잘하자!”

이찬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다짐하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 * *

“아이고! 벌써 새벽이네요. 곧 있으면 해 뜨겠네.”

임정숙 간호사는 의진과 함께 의국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정 쌤 오늘 수술 많아서 피곤했겠다.”

“…….”

“정 쌤, 자요?”

“아니요. 안 자요.”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던 의진은 손에 쥔 커피를 내려놓고 옆에 있던 침대 위로 누워 버렸다.

“뭣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뭔데 또 우리 정 쌤 표정이 심각할까?”

“수 쌤? 나 실수한 거 같아요.”

“실수? 무슨 실수요.”

“그게 실은 수술 전에 선생님이랑 의국실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의진은 수술 전에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했다.

“못살아! 그러니까 김 선생님은 그 말을 할 게 아닌데 자기가 혼자 찔려서 오버했다는 거잖아요.”

“오버가 뭐예요. 육바 칠바까지 한 거 같아요. 괜히 얘기는 꺼내서 선생님이 무슨 말 하려던 거냐고 그러다가 수술방 가서 일단락되긴 했는데…….”

“선생님 보면 물어볼 거 같아서 신경 쓰인다 그거죠?”

“아! 역시 수 쌤은 나를 너무 잘 알아. 분명 물어볼 거예요.”

의진은 괜히 긁어 부스럼만 키운 꼴로 태경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답답했다.

“수술실에서만 보고 며칠 피해 다닐까요?”

“그건 정 쌤도 불편하고 너무 비효율적이잖아요. 그냥 솔직히 말하면 어때요?”

“그 생각도 해 봤는데 막상 아까 마음먹었던 그 타이밍이 지나니까 말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원래 사람 심리가 그래요. 이런 거 보면 진짜 뭐든 타이밍이 문제라니까요.”

“맞아요. 특히 남녀 문제는 더 그렇…….”

철컥-

의진이 이도 저도 못 하며 열변을 토하던 그때 별안간 의국실 문이 활짝 열렸다.

“여기 계셨네요?”

그리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태경이 등장했다.

“……네.”

태경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의진은 침대에 누운 채로 격한 손동작과 커다란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의 뜻은 본인이 여기 있다는 걸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네. 커피 마시고 있었어요.”

그 신호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임정숙은 자연스레 커피를 들고 태경의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태경이 서 있는 위치에서는 다행히 침대에 누워 있는 의진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뭐 필요하세요?”

“아니요. 아까 먹다 남은 햄버거가 생각나서 가지러 왔어요.”

“많이 식었을 텐데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근데 혹시 정 선생 보셨어요?”

“정 쌤이요?”

순간 침대에 누워서 이 상황을 귀로 듣고 있던 의진은 잔뜩 힘을 준 채 벽 쪽으로 몸을 최대한 밀착시켰다.

“진료실에 계시지 않을까요? 아까 진료실 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임정숙 간호사는 부탁받은 대로 다른 곳을 알려 주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저쪽 침대에 계세요.’

아주 친절하게도 검지와 입 모양으로 의진이 누워있는 침대를 정확히 알려 줬다.

사실 남의 일에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임정숙은 일부러 태경에게 알려 줬다.

의진의 성격상 그대로 두면 분명 며칠 동안 태경을 의도적으로 피해 다닐 게 뻔했다.

그러다 보면 두 사람이 괜히 서먹해질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남녀 문제는 답답하지 않게 바로바로 풀어 주는 게 가장 좋았다.

사실 임정숙은 두 사람이 잘되길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살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아, 진료실을 안 가 봤네. 선생님, 가시게요?”

“네, 병동에 좀 가 보려고요. 그럼 햄버거 맛있게 드세요.”

태경은 의국실을 나가는 임정숙 간호사를 향해 엄지를 추켜세우며 인사했다.

‘뭐야! 수 쌤은 왜 나갔고 선배는 왜 여기서 햄버거를 먹는 건데…….’

의진은 속으로 고요 속의 외침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임정숙 간호사에게 카톡을 보내기로 했다.

-수 쌤!!!!!!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네! 저 좀 구해 주세요. 아니, 선생님 좀 밖으로 불러 주세요. 제발요.

손가락을 미친 듯이 움직이며 전송 버튼을 누르려 하던 순간,

♬♩♫♪~

대뜸 핸드폰 벨 소리가 눈치 없이 울렸다.

‘나한테 왜 이래요! 선배…….’

조용한 의국실에 발랄한 벨 소리를 일으킨 상대는 바로 태경이었다.

“벨 소리가 여기서 울리네. 이상하다. 정 선생, 여기 있나?”

벨 소리에 이에 태경의 말소리까지 들리자 잠시 고민하던 의진은 능청스럽게 일어나기로 했다.

민망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함! 깜빡 잠이 들었네. 어머! 선배?”

누가 봐도 자다 일어난 사람 같지 않은 의진은 어색한 기지개와 함께 태경을 보며 놀란척했다.

“의진이 너 여기 있었어? 내가 방금 전화했었는데?”

“어! 정말이네. 제가 논문보다 잠깐 눕는다는 게 잠이 들었나 봐요. 선배는 햄버거 먹으러 왔어요?”

“응. 아까 남긴 게 생각나서.”

“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가긴 어딜 가.”

태경이 의진이 손을 잡아 멈춰 세웠다.

“할 말 있다니까.”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려던 의진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나중에 해도 되는데…….”

“뭐라고?”

“아, 아니에요. 무슨 할 말인데요?”

“야구장 갔던 날. 집에 가면서 한 달 뒤에 말해 달라고 했잖아. 아까 수술 전에 그 말 하려고 했던 거지?”

아!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 않았으면 했던 얘기를 태경이 먼저 꺼냈다.

“네, 맞아요.”

어색하게 서 있던 의진은 태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피할 수 없다면 솔직한 심정을 전하기로 했다.

“저 사실 아직도 여전히 선배한테 좋은 감정 있어요.”

여전히 의사로서 태경을 존경하고 이성으로 좋은 감정이 있지만 자신이 성급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선배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벌써 한 달도 지났고……. 그러니까 제 말은 편하게 말해도 돼요.”

“편하게?”

“더 솔직히 말을 하자면 쿨하게 거절해도 된다는 뜻이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하고 싶었는데 막상 말을 하고 나니 의진은 속이 후련했다.

“근데 어쩌지?”

“…….”

“거절하려던 거 아닌데?”

“네?”

“내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 해. 뭐랄까. 의사 김태경은 빠른데 사람 김태경은 많이 느려. 병원에 책임자로 있다 보니까 할 일도 것도 많고 챙겨야 할 것도 많더라고.”

핑계가 아니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태경도 몸으로 부딪치며 느끼고 배우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네가 했던 말을 생각할 시간도 없었어. 정의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날 좋은 감정으로 생각해 준다는 거, 그거 고마운 일이잖아.”

“……!”

“그래서 말인데 유효기간을 더 줄 수 있나 해서. 그러니까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서로 더 친해지면 어떨까 하는데? 안 되나?”

“아니요! 돼요! 완전 됩니다!”

의진은 태경의 말에 순간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거절일 거라고 확신했기에 생각지 못한 그의 답변이 기분 좋았다.

“참! 그렇게 좋아?”

“당연하죠. 그리고 선배가 느린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전 빠르거든요.”

“응?”

“제가 워낙 빠릿빠릿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선배는 지금처럼 병원 일에 신경 쓰면서 환자에 집중하세요. 빠른 제가 잘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잘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그래, 고맙다.”

태경은 따뜻한 미소를 보였고 의진도 화답하듯 활짝 웃었다.

한 달 넘게 머릿속을 시끄럽게 괴롭히던 의진의 고민은 그렇게 잘 일단락됐다.

* * *

다음 날, 신화대학병원 TICU(외상 중환자실).

“뭐야! 왜 저러지?”

파트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외상 중환자실을 순회하고 있는 고계득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또 왔네.”

며칠 전부터 하루에 한 번씩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고계득의 행동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병원 원장이 병원 어디를 가든 이상하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외상 중환자실을 이렇게 자주 찾아오진 않았다.

“하! 신경 쓰이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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