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의사로서 초심
“하! 신경 쓰이게 하네.”
안 그래도 요즘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는데 쓸데없이 자주 찾아오는 고계득 때문에 파트장은 심기가 불편했다.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VVIP 들어오기로 한 거 있나?”
“파트장님. 원장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환자를 살피고 온 간호사가 스테이션에 앉아 혼잣말하던 파트장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요즘 TICU에 매일 오는 거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방금 봤는데 한복판에 서서 웃고 계시더라니까요.”
“에이! 설마. 잘못 봤겠지. 심각한 중환자들 사이에서…….”
“아니에요. 파트장님 저기 보세요?”
파트장이 간호사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고계득이 웃고 있었다. 아니, 실실 쪼갠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그것도 아주 음흉하고 기분 나쁘게 쪼개고 있었다.
‘어라! 뭘 잘못 먹었나? 여기서 왜 처웃고 있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파트장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계득에게 향했다.
“저기 원장님?”
파트장이 다가오자 음흉하게 웃음 짓던 고계득은 아수라 백작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파트장님.”
“혹시 저한테 따로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제가요? 그럴 리가요. 우리 파트장님처럼 환자분들을 잘 보살피는 분이 어디 있다고 제가 할 말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VVIP가 오기로 했다거나 특별히 신경 쓰이는 환자가 있으신 건가요?”
특별히 신경 쓰이는 환자가 당연히 있었다.
‘하여간! 쓸데없이 눈치는 빠르다니까.’
고계득이 웃는 얼굴로 계속 보고 있던 환자는 뺑소니를 당한 차대한 환자였다.
며칠 전 갑자기 방문한 외상 중환자실에서 파트장에게 어려운 환자들에 관해 묻던 중 바로 고계득의 구미를 당겼던 그 환자였다.
“저한테 알려 주시면 제가 더 환자한테 신경을 쓸 테니까 말씀해 주세요.”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온 게 아닌데 저 때문에 괜히 우리 파트장님께서 신경이 쓰이셨나 봅니다.”
“별말씀을요. 그러면 왜 요즘 들어 TICU에 자주 오시는지…….”
“글쎄요. 저의 나태함 때문이라고 할까요?”
“예? 나태함이요?”
“뭐랄까요? 항상 신화대병원과 환자들을 생각하는 병원장이 되는 게 제 꿈과 목표였는데, 막상 이 자리에 오르고 계속 유지하고 있다 보니 뭔가 나 자신이 의사로서 나태해진 건 아닌가 싶더라고요.”
“아, 네…….”
“한동안 병원 발전만 생각하며 일하다가 문득 환자를 생각하고 환자만 보던 제 초심을 잃은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외상 중환자실에 들러서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에 오면 내가 더 환자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그 옛날 의사로서의 초심이 생각나거든요.”
무슨 개소리를 저렇게 정성스럽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파트장은 어떻게 고계득의 기분을 맞춰야 할지 난감했다.
“아니, 원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미 충분히 병원과 환자를 위해 일하고 계시잖아요.”
“하하! 그런가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시는 우리 파트장님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원장님도 수고하세요.”
고계득은 흐뭇한 표정으로 TICU 나와 원장실로 향했다.
철컥-
“좋은 아침이야.”
“일찍 나오셨습니다.”
고계득이 원장실로 들어서려 하자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오전에 조찬 모임이 있어서 끝나고 바로 출근했어. 그건 그렇고 오늘 특별한 일정은 없지?”
“네, 없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부탁하신 차대한 환자 자료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
비서의 말에 고계득은 광명을 찾은 사람처럼 밝은 표정을 한 채 원장실로 들어갔다.
드르륵-
허겁지겁 들어온 그는 비서가 준비한 자료를 손에 들고 집중해서 읽어 나갔다.
-이름: 차대한. 나이: 43세이며 직업은 택배 기사입니다.
가족 관계는 동갑내기 부인 이수정과 2남 1녀의 자녀가 있는 다섯 식구로 평범한 가정입니다.
차대한과 이수정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25살에 일찍 결혼했으며, 부부 사이는 물론 가족들도 전부 사이가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차대한이 뺑소니 사고를 당하고 현재 집안 분위기도 안 좋고, 형편도 많이 힘들어진 상태입니다.
재작년에 빌라에서 아파트 전세로 이사를 했는데 생각보다 대출을 많이 받은 듯합니다. 게다가 매달 대출 이자에 아이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다 학원비 등 한참 돈이 들어가는 시기여서 이 부분에서도 지출이 상당한 걸로 예상됩니다.
장기 입원으로 중간 정산 때 돈이 부족한지 분납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이 사항으로는 사회복지팀에 지원받을 수 있는지 알아본 이력이 있습니다.
주소: 서울특별시 xx동 xx구. 이수정 전화번호 010-xxx-xxxx
그리고 자료 마지막 부분에는 차대한의 집 주소와 함께 부인 이수정의 핸드폰 번호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크큭!”
고계득은 재미있는 책이라도 읽은 것처럼 차대한의 자료가 만족스러운 듯 혼자 웃기 시작했다.
“역시! 내 촉은 틀리지 않았어. 딱 내가 찾던 인물이야. 남편은 아파서 누워 있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돈은 나가지. 여자는 아마 숨 쉬는 것도 고통이겠지? 이수정 씨, 내가 당신 숨통 좀 트여 줄게. 대신 날 좀 도와줘야겠어.”
혼잣말로 중얼거린 고계득은 곧장 비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이 차대한 환자 보호자가 사회복지팀에 신청한 건 말이야.”
“네, 원장님.”
“가능성이 있는 거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돈이 없는 환자들을 도와주는 제도인데 사실 차대한 환자 같은 경우는 혜택받기가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 병원이 자선 사업하는 곳도 아니고, 어중이떠중이 다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간단하면 안 되지.”
“부인인 이수정 씨가 대충 물어보고 갔다고 한 걸 보면 본인도 안 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 TICU(외상 중환자실) 면회 시간 아직인가?”
“네, 좀 더 있어야 합니다.”
“이따 시간 되면 알려 주고, 알았으니까 나가 봐. 수고했어.”
“네.”
비서가 나가자 고계득은 차대한 환자의 자료를 다시 한번 훑은 뒤 너튜브를 클릭했다.
모니터 화면에는 한동안 유명했던 태경의 인터뷰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툭툭-
고계득은 손톱을 세워 모니터 속 태경의 얼굴을 찌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받은 치욕 고대로 돌려줄게. 김태경 곧 나락 가자고.”
* * *
“실례합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이수정은 오늘도 남편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나와 전단지를 돌렸다.
남편의 뺑소니 목격자를 찾는 전단지였다.
“이거 한 번만 읽어 주세요.”
벌써 3개월 가까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돌렸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봐 달라는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목격자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깊어지자 거부하는 손길도 사람들의 관심 없는 눈길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것 좀 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지나가는 시민이 받은 전단지는 1미터 앞에서 땅바닥에 버려졌다. 이수정은 떨어진 전단지에 다시 주워 다음 사람에게 건넸다.
그렇게 연달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단지를 건넨 뒤 도롯가로 고개를 돌렸다.
이수정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었다.
-뺑소니 사고의 목격자를 찾습니다. x월 xx일 새벽 x시 xx분.
3개월 전, 이수정의 남편은 새벽에 사고를 당했다. 뺑소니 사고였다.
남편은 회사에 다니다 택배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적은 회사 월급보다 나은 것만 보고 시작한 택배였다.
집 주소를 외우는 것도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것도 서툴고 어려운 일뿐이었다. 몸 쓰는 일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몸 쓰는 일을 하려니 힘들었다.
몇 번을 그만둘까도 싶었지만, 차대한은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나자 특유의 성실함을 알아본 소장이 거래처를 소개시켜 줬고, 처음으로 큰 거래처를 직접 따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쇼핑몰 거래처를 따낸 그 날 차대한은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날따라 일이 많아 새벽에 끝났지만, 거래를 성사시켜 기분이 좋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가볍고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집으로 가던 중 트럭에서 파는 떡볶이를 보고 차에서 내렸다.
오늘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리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얼른 사서 집으로 가려 했던 차대한은 현금만 가능하다는 말에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주변에 현금 지급기를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작은 부스에서 돈을 찾고 돌아가던 도중 사고를 당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도시 주변이었기에 사람도 주차된 차량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차량은 거리가 먼 탓에 번호판 식별이 힘들었고, 주변은 보안 CCTV도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다음 날 주변에 있던 가게를 돌며 물어봤지만, 외부를 찍은 CCTV는 있지 않았다.
이수정은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고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가진 건 없어도 성실하고 따뜻한 부부와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어 행복한 가정이 하루아침에 불행에 늪에 빠진 것이다.
이수정은 집 근처 작은 회사에 경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병간호로 자꾸 빠지게 되다 보니 회사에서도 더 이상 사정을 봐주긴 힘들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퇴사하고 여러 아르바이트와 일용직으로 버티고 있었다.
남편이 사고를 당하고 이수정은 목격자를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지금까지 의식이 없는 남편과 점점 쌓여 가는 병원비를 비롯한 돈 문제였다.
한참 돈이 들어갈 시기인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도, 갚아야 하는 이자들도 점점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작은 도움이라도 받을 만한 시댁도 친정도 없었다. 이수정은 일찍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남편은 보육원 출신이었다.
“후!”
답답한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너무 힘들다 보니 이수정은 요즘 하늘에서 돈이 뚝 하고 떨어졌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멍하니 현수막을 보고 있던 이수정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전단지 작업을 마무리했다. 나눠주던 전단지를 넣기 위해 가로수 밑에 내려놨던 가방을 열었다.
“…….”
그런데 가방 뒷바닥에 뭔가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핸드크림과 쪽지였다.
-엄마, 종이 자꾸 만지면 손 갈라지고 건조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핸드크림 잊지 말고 발라.
-주말에는 현미랑 내가 할게. 엄마도 몸 생각하고 무리하지 마.
-엄마, 형, 누나 말 더 잘 듣고 숙제도 열심히 할게요. 사랑해요.
작은 핸드크림과 함께 있던 쪽지는 아이들이 써 준 짧은 편지였다.
‘언제 이런 걸 준비한 거야.’
웃을 일 없던 얼굴에 잠시나마 미소가 스쳤다. 이수정은 아이들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저기요?”
아이들에게 받은 쪽지를 가방에 넣고 일어나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수정은 얼른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