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06화 (205/472)

206화. 믿을 수 없는 사고

고급 한식당.

“하여간 이 인간!”

병원 기부금 때문에 재계 사람을 만나기로 한 고계득은 단독 룸에 앉아 시계를 보며 한 소리를 내뱉었다.

“단 한 번도 시간을 지킨 적이 없다니까.”

계속해서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미닫이 한옥 문살이 열렸다.

드르륵-

“이 방입니다. 회장님.”

“고마워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 원장, 미안해. 내가 좀 늦었지?”

“아이고! 회장님 늦긴요. 저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좌식 바닥에 앉아 있던 고계득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고개를 숙인 뒤 손을 내밀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님. 반갑습니다.”

“나야, 우리 고 원장 보살핌 덕분에 잘 지냈지.”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식사는 조금 이따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앉으시죠.”

한눈에 봐도 서로 필요해 의한 관계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마치 형제처럼 반가워하며 마주 앉았다.

“그래, 우리 고 원장은 건강하지?”

“저야 늘 똑같죠. 그나저나 회장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갑자기 축하라니?”

“JQ 백화점 개점 오픈 말입니다. 아주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참 대단하십니다.”

고계득이 며칠 전부터 만나기를 고대했던 사람은 가장 큰 백화점으로 기네스에 오른 JQ 백화점의 주인 윤부실 회장이었다.

“하하하! 이거 내가 수십 군데서 축하를 받다 보니 무뎌졌나 보군. 고맙네. 고마워.”

“방송에도 틀기만 하면 나오고 다들 난리던데요? 시설도 끝내주고 크기는 또 어찌나 큰지 아주 압도당했습니다.”

“병원일 하느라 환자 돌보느라 바쁜 사람이 언제 거길 또 갔다 왔어?”

“당연히 제가 갔다 와야죠.”

당연히 갔다 온 적 없는 고계득은 적당히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으로 보고 갔다 온 척을 하는 중이었다.

“인테리어는 어쩜 그렇게 멋지던지. 그 천장에 있는 장식은 아주 기가 막히게 훌륭하던데요? 하하!”

“말도 마! 그 유럽에서 아주 유명한 예술 작가인데, 요즘 세계적으로 잘나간다 하는 건물에는 다 그 사람 작품이 걸려 있어.”

“그래요? 하긴 예술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멋있긴 했습니다.”

“돈이 아주 수십억이 깨지긴 했는데 그래도 천장에 걸어 놓으니까 분위기가 달라. 아주 만족스러워. 근데 작품 완성하고 나서 내가 설치할 때 그 노인네랑 한바탕 싸웠잖아.”

“그 예술가랑요?”

“그래. 아주 고집이 보통이 아니더라고. 고 원장도 가 봤다니 알겠지만, 그게 크리스털이거든.”

“아, 예. 그렇죠. 크리스털.”

“처음에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면서 지탱하는 케이블 선을 아주 덕지덕지 매달려고 하는데 내가 결사반대했지. 그럼 지저분하잖아.”

JQ 백화점에 크리스털 장식을 만든 외국 작가는 자기 작품에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었다.

늘 독특하고 기상천외한 작품으로 전 세계 건축가들에게 사랑받는 그였지만, 그의 프라이드에는 무엇보다 안전이라는 신념이 강하게 들어가 있었다.

주로 공중에 매달리는 작품이 많았던 작가는 작품이 안전해야 사람들도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 작품이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신념을 무시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윤부실이었다. 끝끝내 지저분한 게 싫다고 길길이 날뛰던 그는 작가의 안전에 대한 신념을 묵살했다.

결국 작가는 그 어떤 사고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오픈 전까지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이 많았는데 성공적으로 오픈해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고 원장 목 빠지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닙니다. 식사하고 천천히 이야기하시죠.”

윤부실이 기부금 관련 이야기를 꺼내자 고계득의 눈이 번쩍했다.

“됐어. 다음 주 안으로 회사에서 기부금 명목으로 10억이 입금 될 거야.”

“십억이나요?”

생각지도 못한 큰 금액에 고계득의 입꼬리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감사한데 너무 큰 거 아닌가요? 회장님, 그러지 마시고 이번에는 반만 하시죠.”

“무슨 소리. 우리 손주 놈들 줄줄이 군대를 빼 줬는데 이 정도 값을 해야지.”

윤부실이 이렇게 큰 금액을 기부하는 건 순전히 좋은 목적이 아니었다.

고계득이 윤부실 손주들이 군대에 가지 않도록 척추 관련 질환으로 병력을 조작해 준 덕이었다.

“그런 거 때문이라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안 그러긴. 사람이 서로 돕고 살아야지. 이렇게 내가 도와야 다음에도 우리 고 원장이 날 도와줄 거 아닌가? 우리 막내 손주들도 남았고.”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회장님.”

“같은 동문끼리 감사는 무슨. 앞으로는 선배님이라고 불러.”

“네, 선배님. 제가 아주 귀한 술 한 병을 가져왔는데 식사하시며 한잔하시죠.”

“좋지.”

생각보다 큰 기부금 액수에 신난 고계득은 이제는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윤부실과 함께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 * *

JQ 백화점에서 쇼핑 후 밥을 먹은 채영이네 가족은 여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아빠 면도기 보러 가서 조금 기다려야 해.”

“엄마? 이거 봐.”

채영이는 1층 중앙 홀 근처에 있는 분수대 의자에 앉아 장난감 가게에서 산 플래싱 워터볼을 들고 엄마인 감지연을 불렀다.

“여기 공 안에 토끼랑 물고기 들어 있고 우와!”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채영이 기분 너무 좋아.”

채영이는 공을 들고 요리조리 자세히 보면서 신나 하고 있었다.

“채영아 근데, 여기 사람도 많고 잘못해서 떨어뜨리면 못 찾을 수도 있어. 일단 엄마 주고 집에 가서 놀자. 어때?”

“아니! 아니! 채영이 안 떨어뜨릴게. 이르케 손에 꼭 쥐고 있을게. 안 던질게요. 응?”

작고 예쁜 손으로 워터볼을 힘껏 쥐고 있는 딸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대신 바닥에 던지거나 튕기면 안 돼. 손에 쥐고 보기만 해. 알았지?”

“네, 손에 꼭 쥐고 있을게.”

“채영아? 엄마 한 번 봐 봐.”

“응?”

찰칵-

감지연은 여느 때처럼 딸의 귀여운 모습을 휴대폰에 담았다.

“세상에! 우리 딸 너무 예쁘네. 우리 공주님 여기 한 번 더 볼까?”

찰칵- 찰칵-

Rrrrrrrrrrrrr

연속해서 사진을 찍던 와중에 감지연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중요한 전화인지 감지연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님. 아니요. 네, 다 같이 백화점 왔어요.”

전화를 건 사람은 시어머님이었다. 평소 시어머님과 사이가 좋았기에 감지연의 표정과 목소리는 밝았다.

“그이는 지금 면도기 본다고 갔어요. 네. 아! 어머님 잠시만요.”

시어머님이 뭔가를 이야기했지만, 분수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와 함께 옆자리에 앉아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채영아, 엄마 할머니랑 잠깐 통화하고 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알았지?”

“응.”

감지연은 앉았던 곳에서 조금 걸어 나와 딸을 보며 통화를 이어 갔다.

“정말요? 아니에요. 어머님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저번에 보내 주신 고기도 많이 남았어요. 네. 그럼요.”

그렇게 고부가 다정한 통화를 이어가는 사이 채영이는 워터볼을 가지고 혼자서 놀고 있었다.

“어! 불도 들어온다.”

손에 쥔 워터볼을 세게 흔들자 불빛이 들어온 모습에 채영이는 신기해했다.

“예쁘다. 와! 빨간색도 있……!”

흔들 때마다 계속 색이 바뀌는 모습에 더 열심히 흔들던 그때였다.

“어! 내 공!”

지나가던 사람이 들고 있던 쇼핑백과 부딪힌 워터볼이 작은 손에서 벗어나 버리고 말았다.

“안 돼! 공아~ 거기 서.”

공을 잃어버릴까 봐 애가 타는 채영이의 마음과 달리 탱탱한 워터볼은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튕기며 굴러갔다.

채영이가 공을 향해 뛰어가고 있던 그 시간, 감지연의 남편 이민우는 7층 행사장에서 면도기를 고르고 있었다.

‘여보, 내가 채영이 보고 있을 테니까 당신 면도기 사고 전자기기 코너도 구경하고 와.’

평소 관심 있는 전자기기를 아내가 마음껏 구경하고 오라고 했지만 이민우는 면도기만 사고 갈 생각이었다.

“자기야, 아직도 안 골았어?”

두 가지를 놓고 이리저리 꼼꼼히 살피고 있는 사이, 이민우의 옆자리에서 면도기를 보고 있는 남자의 여자 친구가 다가왔다.

“거의 다 골랐어. 영화 시작하겠다.”

“아직 시간 남았잖아. 5분 안에 고를게.”

“근데 나 화장실 갔다 오다가 좀 이상한 거 봤어.”

“뭔데?”

“아니, 천장에 크리스털 장식 있잖아.”

“응.”

“그거 구경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커플이 전문 카메라로 사진 찍다가 갑자기 케이블 선 끊어진 거 같다고 하는 거야.”

“장식 매달아 놓은 케이블 선?”

“응. 그래서 나도 이리저리 봤는데 그 사람들은 카메라로 봐서 그런지 나는 잘 안 보이더라고. 근데 그 끊어진 줄 있는 장식이 좀 기울었던데……. 영화 봐도 괜찮을까?”

여자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또 그런다. 자기 그거 안전 민감증이야.”

“나 이러는 거 하루 이틀이야? 자기야, 우리 그냥 나갈까?”

“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오픈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얼른 계산하고 영화 보러 가자.”

커플이 행사장을 벗어나고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민우는 들고 있던 면도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며 행사장을 나와 7층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커플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내와 딸이 장식물 근처 분수대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통화 중이네…….”

아내가 계속 통화 중이자 이민우는 결국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갔다.

한편.

“네, 어머님. 그럼 다음 주……!”

통화를 하던 감지연의 눈앞에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 사이 채영이가 자리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머님! 죄송한데 제가 조금 이따가 전화 다시 드릴게요. 네. 네. 들어가세요.”

앉았던 자리에 쇼핑백이랑 물건이 그대로인데 채영이만 없었다.

“저기요, 혹시 여기 앉아 있던 요만한 여자아이 어디로 갔는지 보셨어요?”

감지연은 여전히 통화하고 있던 옆자리 사람에게 아이의 행방을 물었다.

“못 봤는데요.”

“얘가 어디를 간 거야?”

마음이 급해진 감지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채영아!”

워낙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었기에 작은 아이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이채영! 채영아 어디 있어?”

그렇게 중앙 쪽으로 걸어가며 목소리를 높이던 감지연 시야에 워터볼을 줍고 있는 딸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튕겨 나간 워터볼을 찾던 채영이는 다행히 멈춘 공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쪼르르 굴러온 공은 하필 구조물 바로 아래인 안전선 안에 멈췄다.

“하아! 감사합니다.”

잠깐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감지연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카캉- 캉캉!!!

어디선가 유리와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곧이어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뒤따랐다.

“어! 어!”

“어머! 저거 왜 저래!”

“떨어지겠는데?”

여기저기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고 놀란 모습을 보이더니 다들 천장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케이블 선 하나가 끊어진 채 방치됐던 장식물이 무게를 못 견디고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채영이가 있는 바로 그 위쪽이었다.

카캉!

또 한 번의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다급해진 감지연이 채영이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채영아!”

한 발짝 두 발짝 온 힘을 다해 뛰어 채영이에게 닿은 그 순간 장식물이 두 사람 위로 순식간에 떨어지고 있었다.

“엄마!”

“채영아!”

피할 새도 없이 장식물이 떨어지던 순간 감지연은 본능적으로 채영이를 품듯이 안고서 자신의 몸으로 유리 장식물을 막았다.

쨍-

투명한 크리스털이 깨지는 소리가 백화점 곳곳에 크게 울렸다.

“괘……괜찮아?”

감지연이 힘겨운 목소리로 채영이에게 물어봤다.

“응. 나 괜찮아.”

“우리 딸……. 다행이다.”

다행이라는 말을 남기고 감지연은 딸을 꼭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두 사람 주변으로 깨진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깨진 파편 중 중간 부분이 길게 감지연의 복부를 관통한 상태였다.

“지연아!!!!”

저 멀리서 뛰어오는 이민우의 절규 섞인 소리와 함께 붉은색 피가 원을 그리며 바닥 위로 퍼져 나갔다.

놀란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묻은 워터볼이 대리석 위를 굴러다녔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사고에 백화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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