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타이밍
철컥-
“이찬희! 따라와!”
별안간 진료실에서 나온 태경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이찬희의 목덜미를 잡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철컥-
“…….”
이찬희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눈빛을 저도 모르게 슬쩍 피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태경의 눈빛이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릴 듯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찬희야, 내가 왜 널 다시 부른 줄 알아?”
“…….”
“몰라?”
고명환 환자에게 집중하느라 잠시 깜빡했던 태경은 이찬희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 다시 불렀다.
“아니요. 알아요.”
“그렇지, 모르면 안 되지. 내가 널 왜 부른 거 같아?”
“아까 고명환 환자에게 복수를 뺄 때, 안 나왔을 때 그만해야 하는데 제 욕심에 몇 번이고 더 했습니다.”
“그래, 맞아. 잘 아네.”
“…….”
안 그래도 태경에게 제대로 한소리를 듣겠구나 싶었기에 이찬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한바탕 시원하게 혼나는 게 속이 편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 고명환 환자 같은 경우는 정말 운이 좋았던 거야. 다른 환자 같았으면 장기 뚫려서 지금쯤 수술하고 있었을걸. 물론 네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지금까지 복수 천자 하면서 이런 일이 없었기에 한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계속 시도했겠지. 안 그래?”
“네……. 맞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찬희야? 같은 병명을 가진 환자라도 환자마다 그 특색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신중해야 해. 그리고 내가 아무리 잘할 수 있는 술기나 수술이라고 해도 절대 어느 순간에서도 환자를 대할 때는 긴장의 끈을 늦춰서도 안 돼. 특히 지금의 너처럼 지금까지 한 번도 실수가 없던 술기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붙기 때문에 그럴수록 더 조심하고 잘해야 하는 거야.”
태경이 하는 말 뭐 하나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기본적인 검사도 그래. 환자 입장에서야 아픈 곳만 빨리 해결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지. 왜? 아프니까. 특히나 고명환 환자처럼 병원을 많이 다니고 처치를 많이 받아 본 사람은 그런 검사들이 더 귀찮을 수 있어. 그래도 몇 번이고 설득해 봐야지, 환자가 고집부리고 강하게 거부한다고 안 하면 안 되잖아.”
태경은 이미 이찬희가 알고 있는 말이란 걸 알았지만, 또다시 강조하며 말했다.
실수가 있을 때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몇 번이나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
이찬희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죄송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태경 말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너 솔직히 내가 한 말 귀에 잘 안 들어오지?”
원래 후배들이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바로잡아 주고 따끔하게 혼을 낸 뒤 뒤끝이 없는 게 태경의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예!?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긴 뭐가 아니야.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도 다 아는 내용인데 뭘 또 이렇게 강조하고 잔소리를 하나 싶지?”
“정말 아니에요. 처치하면서 있어 고집부린 저 스스로에게 화도 나고, 반성하고 잊지 말자고, 정신 차리자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너 정신 못 차릴 거 같은데…….”
“아닙니다. 요즘 잠깐 머리가 복잡해서 그렇지 정신 차릴게요. 확실히 차리겠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너 요즘 왜 그래? 가끔 멍때리지를 않나, 나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지 않나. 잘하다가 요즘 왜 그러냐고?”
“…….”
“이찬희!”
“네, 선생님.”
“너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일이 없긴 뭐가 없어. 너, 최모나 때문이지?”
“……!”
사실 태경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였다.
물론 오늘 있던 고명환 환자의 일도 말을 하려고 했지만, 진짜 핵심은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병원을 책임지는 원장이라고 해도, 아무리 오지랖이 넓다고 해도 직원들 개인사에까지 오지랖을 부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다른 일도 아니고 남녀 사이에 일인데 거기에 감 놓으라 배 놓으라 하는 건 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경이 후배의 복잡한 고민을 대놓고 꺼낸 건 이찬희가 의사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생명을 다루는 의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이 알아서 공과 사를 잘 구분하면 더할 나위 할 것 없이 좋을뿐더러 이렇게 대놓고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사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직장에서 잠자는 시간과 쉬는 날을 빼고 계속 마주치며 일하고 있는데, 구분 선을 나누듯이 공과 사를 딱 구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사람을 신중하게 오래 보고 착한 마음에 약간의 소심함도 탑재한 이찬희 성격상 그게 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모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겉으로 뻔히 다 보이는데, 계속 고민하며 속을 끓이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사실 큰 대학병원에서 누가 누굴 좋아하면 금방 소문이 파다해지는데, 우리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태경이 모르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가는 일에 더 집중을 못 할 것 같았기에 딱 한 번만 제대로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이다.
“찬희, 너 최모나 좋아하는데 소개팅 때문에 그러잖아.”
“서,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어떻게는 인마! 네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그걸 모르겠냐? 너 요즘 그것 때문에 일부러 최모나도 피하고 있는 거잖아.”
“하아!”
이찬희는 대답 대신 긍정 섞인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사람 좋아하는 일이 죄송할 일이야? 아니잖아.”
“그게 아니라 제가 감정을 잘 컨트롤하지 못해서 일에 지장이 생긴 거 같아서요.”
“잘 아네. 그걸 잘 아는 녀석이 그래?”
“…….”
“찬희야?”
“네, 선생님.”
“최모나 지금쯤 병원 나갔을 거야?”
“네?”
“아까 나한테 잠깐 30분 정도 일 보고 온다고 허락 맡았어.”
“아, 네…….”
태경의 말을 듣는 순간 이찬희는 최모나가 어제 사진 속 주인공인 환자의 남동생을 소개받으러 나간다고 확신했다.
“너 계속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을 거야? 내가 굳이 여기서 최모나가 외출한다는 말을 왜 한 거 같아?”
“……!”
“찬희야. 사람이 살면서 타이밍이란 게 있어. 일이든 사람이든 그 타이밍을 잘 잡는 사람이 잘되는 거야. 지금부터 정확히 딱 20분 줄게. 그 20분 동안 의국실에서 잠깐 쉬든지 밖에 나가든지 난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대신 그 뒤에도 정신 못 차리고 이런 실수 또 한 번 생기면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선생님 정…….”
“1분 지났다.”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태경이 핸드폰 시계를 보며 시간을 재촉하자 감사의 말을 하려던 이찬희는 가운이 날리도록 진료실을 뛰어나갔다.
“참! 이렇게까지 후배를 신경 쓰고……. 나 같은 사람도 없다.”
“그것도 맞긴 하는데 그런 말을 본인이 직접 하니까 살짝 멋이 없는데요?”
언제 왔는지 의진이 진료실 문 앞에 서서 말했다.
“그것도 그래. 언제 온 거야?”
“방금요. 이 선생 부리나케 뛰어가던데, 설마 최 선생?”
“맞아. 요즘 정신 놓고 다니길래 해결하라고 했어.”
“잘하셨어요.”
“근데 웬일이야?”
“선배 혼자 응급실 볼 거 같아서 도와드리려고 왔죠.”
“내가 찬희 내보낼 줄 알았어?”
“아까 최 쌤이 나갔다 온다고 하길래 선배가 이 쌤한테 알려 주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이거 우리끼리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가?”
“그런 거 같은데요?”
의진은 태경에 말에 장단을 맞추면 한껏 으쓱해 했다.
“누구 여자 친구인지 진짜 멋있다.”
“그나저나 이 쌤이 최 쌤을 진짜 찾아갈까요?”
“글쎄……. 찾아갈지, 갔다 돌아올지, 가서 말을 할지 안 할지는 이찬희 마음이라 모르지. 나는 약간의 타이밍을 만들어 준 것뿐이고 그 타이밍을 잡고 안 잡는 건 순전히 그 친구 몫이니까.”
“선배 말이 맞네요.”
“근데 의진아, 최 선생 진짜 소개팅 남자 만나러 간 거야?”
사실 태경 역시 최모나의 외출이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궁금해요?”
“당연히 궁금하지.”
“그게 그러니까…….”
“뭐! 정말?”
“그렇다니까요.”
“이거 상당히 흥미로운데. 아무튼 결말이 어떻게 될지 이따 두 사람 돌아오면 답이 나오겠네.”
의진이 무슨 말을 한 건지 태경은 상당히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응급실로 향했다.
* * *
“어서 오세요.”
“실례지만 여기 혹시 저랑 비슷한 가운 입은 여자 오지 않았나요?”
“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병원에서부터 열심히 뛰어온 이찬희는 제일 가까운 커피숍에 들어와서 안을 둘러본 뒤 나갔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곧장 근처 카페로 들어간 뒤, 다시 나와 인근 카페로 들어갔지만 최모나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도 늦었고 첫 만남인데 밥집을 가진 않았을 텐데…….”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근무해야 했기에 이찬희는 최모나가 커피숍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주변 커피숍을 다시 검색했다.
“우와! 이렇게나 많다고?”
대한민국에 커피숍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병원 근처에도 이렇게나 많은 커피숍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
이찬희는 프랜차이즈 커피숍부터 개인 커피숍까지 전부 들락날락하며 최모나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가운이 휘날리도록 병원 근처 커피숍이란 커피숍을 이 잡듯이 잡고 다니며 정확히 두 군데만 남겨놓고 있었다.
“없네.”
첫 번째 커피숍을 들어갔지만, 마음과 달리 최모나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도 없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있어라. 제발 있어라. 있을 거야.’
이찬희는 간절한 마음을 속으로 빌며 마지막 커피숍을 들어갔다.
“하…….”
입구에 서서 매장 안쪽을 쳐다보던 이찬희는 답답한 한숨을 내뱉었다. 기대와 달리 최모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거의 포기한 상태로 커피숍을 나가려던 이찬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2층으로 향했다.
“……!”
그런데 2층을 둘러보던 눈동자가 크게 팽창하며 커지고 말았다.
2층 매장 안쪽에 그토록 찾던 최모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ㅊ…….”
순간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솟구친 이찬희가 최모나의 이름을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그리고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최모나 맞은편에 정확히 남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말끔히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뒷모습만 본 거였지만 잠깐 본 남자의 체격이 상당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잘 차려입은 여자와 남자는 누가 봐도 소개팅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1층으로 내려온 이찬희는 고민했다. 이미 소개팅을 하는 최모나에게 가는 게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닌가? 저 남자한테도 실례잖아?’
조금 전까지 그렇게 찾아다닐 땐 언제고 막상 최모나가 눈앞에 보이자 마음이 망설여졌다.
솔직히 말하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이찬희는 머릿속이 백지가 된 거 같았다.
‘너 그러다가 모나 씨 다른 사람한테 뺏긴다.’
‘일이든 사람이든 그 타이밍을 잘 잡는 사람이 잘되는 거야.’
그렇게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던 그때 친구 김일상의 말과 태경의 말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그래! 인생은 타이밍이야.’
꺼져 가는 용기에 불씨가 붙은 이찬희는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x신 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소개팅 남자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차피 선택은 최모나의 몫이니 마음이라도 전하고 가는 게 맞는 거 같았다.
“가자.”
마음을 굳힌 이찬희는 씩씩하게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향했다.
“최모나!”
“이, 이 선생이 여긴 어떻게 왔어?”
이찬희를 본 최모나가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찾아와서 정말 미안한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
등 뒤에서 앉아 있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찬희는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할 말이라니.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