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10화 (309/472)

310화. 누구야? 최 쌤? 이 쌤?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할 말이라니. 무슨 소리야?”

“최모나! 나 너한테 좋은 감정 있어. 그러니까 이 소개팅 하지 마.”

용기를 낸 이찬희는 찾아온 이유를 분명하게 전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무사히 말을 해서 다행이었다.

다행인 이찬희와 달리 최모나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

그 말을 들은 최모나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고, 곧이어 미스트같이 분사되는 물이 이찬희의 손을 적셨다.

“푸핫!”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물을 뿜는 소리였다. 이찬희는 남자의 행동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잔뜩 기대하고 나온 소개팅일 텐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갑자기 등장해서 깽판을 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었다.

그래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때문에 놀랐을 텐데 갑자기 미안합니다.”

적당히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런데 숙인 고개 너머로 격한 웃음소리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큭!”

애써 참던 웃음소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크큭! 큭큭큭!”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이렇게까지 기분 나쁘게 웃나 싶던 이찬희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오랜만이야, 이 선생?”

당연히 백 퍼센트, 아니 만 퍼센트 김말순 환자의 남동생이자 소개팅 남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최모나의 친오빠인 최태식 대위였다.

“나 너한테 좋은 감정 있어. 그러니까 이 소개팅 하지 마.”

최태식은 이찬희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다시 읊은 뒤 감탄했다.

“와! 나 머리털 나고 이렇게 감동적이고 진심 가득한 고백은 처음이네. 우리 이 선생 아주 상남자였구나.”

“……!”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진 않던 이찬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나가 소개팅하는 줄 알고 불나게 뛰어왔나 보네.”

“오빠! 됐으니까 그만해.”

놀란 이찬희 대신 최모나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너 오늘 소개팅하려고 한 거야? 그래?”

“아니거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가 봐.”

“아, 왜! 동생아, 이런 재미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냥 가니? 안 그래? 이찬희 선생?”

최모나와 이찬희.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대충 눈에 보이는 최태식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상당히 신나 보였다.

쉽게 말해 지금 당장 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 오빠가 좀 도와줄까?”

“됐거든! 나 병원도 들어가 봐야 하니까 얼른 가라고.”

“너, 원장님한테 허락받고 나온 거라며. 이 선생도 허락받고 나온 거지?”

“…….”

그저 이 상황이 웃겨 죽겠는 최태식과 달리 이찬희는 여전히 얼음 그 자체였다. 아직까지 표정이 굳은 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 선생, 뭐라고 말 좀 해 봐.”

“진짜 그만해라.”

“태식 씨?”

그렇게 최모나와 최태식이 이찬희를 두고 아옹다옹하는 사이, 한 여자가 최태식을 다정하게 부르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우리 이만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모나 씨도 병원 들어가 봐야 하잖아.”

“자기야, 지금 병원이 문제가 아니야.”

갑자기 다가온 여자는 최태식의 여자 친구로, 화장실을 갔다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셔?”

“아! 이분은 말이지. 누구냐 하면은…….”

이찬희 얼굴만 보며 웃음이 터질 것만 같은 최태식이 이 상황을 설명하려던 찰나,

“언니!”

최모나가 재빨리 오빠의 말을 끊으며 먼저 말했다.

“여기 이분은 저랑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료 선생님이세요.”

“아, 그러시구나.”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다시 병원을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래요? 그럼 얼른 가 봐야죠.”

“야! 급한 일은 무슨 급한 일이야. 딱 보니까 두 사람…….”

여전히 두 사람을 놀리는 데 진심인 최태식이 또 한 번 짓궂게 굴려 하자 눈치 빠른 여자 친구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무마시켰다.

“동료분이 직접 오신 거 보면 많이 급하신가 봐요. 모나 씨 얼른 가요.”

“네, 저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그래요. 오늘 반가웠어요.”

“이 선생, 조만간 보자고.”

최모나는 말없이 꾸벅 인사를 하는 이찬희를 데리고 서둘러 커피숍을 나왔다.

“너 괜찮아?”

한 걸음 앞서 걷고 있는 이찬희에게 성큼 다가간 최모나가 물었다.

“아니. 지금 내 심정이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니까 묻지 마.”

“뭐래! 혼날 소리만 한다.”

최모나는 액션만 크게 하면서 이찬희의 팔을 살짝 쳤다.

“명색이 의사 입에서 죽는다는 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오냐?”

“내가 왜 죽어. 그게 아니라 그만큼 쪽팔린다는 뜻이잖아. 아! 몰라. 맞다! 개모나 너!”

툴툴거리며 걷던 이찬희는 최모나 쪽으로 몸을 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개팅하러 나간 거 아니었어?”

“이제 개모나라고 하는 거 보니까 정신이 다시 돌아왔나 보네. 소개팅이 아니라 아까 네가 본 대로 잠깐 오빠 만나러 나온 거야.”

“그런데 오늘 왜 그렇게 꾸미고 온 거야?”

“아……. 이거?”

살짝 멋쩍은 표정을 짓던 최모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오늘 그녀가 모두가 놀랄 만큼 꾸미고 온 이유는 바로 부모님의 리마인드 웨딩 사진 겸 가족사진 때문이었다.

평생 군인의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온 최모나의 어머니는 작은 꿈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웨딩 사진과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결혼했을 당시 고집 센 아버지 때문에 전통 혼례를 했던 어머니는 웨딩드레스를 입지 못했다.

그래서 늘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어 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던 자식들은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 리마인드 웨딩을 준비한 것이다.

처음에는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냐고 절대 안 한다고 하던 아버지도 간절히 원하는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고집이 쇠심줄처럼 강한 아버지가 하겠다고 하자 최모나의 어머니는 이참에 가족사진까지 밀어붙였다.

군복을 입은 가족사진이 아닌 다른 가족처럼 평범한 사진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모나는 어머니가 사 준 투피스를 입고 부모님의 리마인드 웨딩 촬영과 가족사진을 찍은 뒤 출근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생전 꾸미지도 않은 사람이 작정하고 꾸미고 온 모습을 보고 다들 소개팅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근무 시간에 따로 외출한 적이 없던 최모나가 부탁까지 하며 외출을 하니 태경은 당연히 소개팅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정작 당사자인 최모나는 낮에 최태식이 잠깐 가방에 맡겼다가 깜빡했던 USB를 돌려주기 위해 외출한 거였다.

“가족사진 때문에 아까 형님도 정장을 입고 계셨구나?”

“맞아.”

“너도 형님도 대단하다.”

“대단하긴. 엄마가 그렇게 원하는 일인데 치마 입고 화장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하루 잠깐 불편하면 끝나는 일이잖아.”

“그럼 너, 그 소개팅은 결국 안 하기로 한 거지?”

“아니, 소개팅 내일 하는데?”

“뭐! 그게 진짜야?”

안심하고 있던 이찬희는 최모나의 말에 다시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풋! 농담이다. 농담.”

“나 이미 심장 한 번 철렁했거든. 그만 놀려. 그래서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안 하지. 내가 그 소개팅을 왜 해.”

“근데 사진은 왜 받았어?”

“사진을 받기는 누가 받아. 환자분이 얼굴 한 번만 보라고 하면서 가운 주머니에 넣고 가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서 정중하게 말씀드렸고 아까 잠깐 오셔서 사진도 찾아가셨어.”

“그래? 다행이네.”

“내가 소개팅 안 하는 게 너한테 다행이야?”

“어. 솔직히 말하면 너 소개팅 할까 봐 되게 조마조마했어. 이런 말 들으면 네가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맨날 서로 으르렁거리고 놀리고 입씨름하던 사이인데 어느 날부터 계속 네가 신경 쓰이더라.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봤는데?”

“내가 개모나 널 좋아하고 있더라고. 말을 해 볼까 했는데,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데 괜히 어색해질까 봐 속으로만 생각했어. 그러다가 너 소개팅 한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아까 그렇게 날 찾아온 거야? 내가 소개팅하고 있을까 봐?”

이찬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실 아까 오빠 때문에 신경 쓰느라 표정 관리해서 그렇지 속으로 기분 좋았어.”

“그래? 진짜야?”

“어. 나도 이 선생한테…… 좋은 감정 있어.”

“뭐! 야! 개모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최모나의 속마음을 들은 이찬희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순간 최모나를 와락 끌어안다 놀라며 떨어졌다.

“어. 미안. 쏘리. 내가 너무 좋아서.”

“미, 미안하긴. 괜찮아.”

사실 그동안 최모나는 이찬희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늘 장난식으로 툭툭 내뱉던 말투가 점점 줄어들더니 한결 부드러워졌고, 어느 날부터는 평소 좋아하는 젤리를 자주 갖다 주기까지 했다.

조금씩, 조금씩 티 나게 바뀌는 언행과 은근히 자기를 챙기는 이찬희의 모습을 보며 최모나 역시 점점 눈길이 가게 됐고 마음이 가게 된 것이다.

“최모나? 우리 앞으로…….”

“갑자기 무슨 최모나래. 맨날 개모라라고 하더니. 그냥 하던 대로 해.”

“그렇지? 나도 그게 편하긴 해. 개모나! 앞으로 내가 잘해 줄게. 우리 잘 지내보자.”

“그래. 잘 지내보자.”

그렇게 한동안 이찬희의 마음을 들쑤셨던 소개팅 사건은 잘 마무리됐고 두 사람은 좋은 만남을 약속했다.

“그런데 나 앞으로 형님 얼굴 어떻게 보냐?”

이찬희는 나란히 걷고 있는 최모나의 손을 은근슬쩍 잡으며 말을 이었다.

“볼 때마다 놀리시겠지?”

“당연하지. 아까 우리 오빠 표정 봤지? 우리 갈 때까지 웃겨서 웃음을 못 참더라.”

“하! 어떡하지?”

“괜찮아. 서로 볼 일도 없는데 뭐가 걱정이야?”

“왜 볼 일이 없어. 나중에 형님이랑 술 한잔 같이할 수도 있지.”

“뭐래. 너 나보다 술도 약하면서 무슨 오빠랑 술을 같이해. 그 인간 완전 술고래야.”

“개모나! 네가 아직 날 잘 몰라서 그래. 내가 작정하고 마시면 꽤 마신다.”

“우리 오빠 소주 10병 먹고도 끄떡없는 사람인데 괜찮겠어? 괜찮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을게.”

“10병은 좀 심한데……. 형님이랑은 밥을 먹어야겠네. 한국 사람은 밥심이잖아.”

“그래. 잘 생각했어. 근데, 근무 시간에 어떻게 온 거야?”

“선생님이 잠깐 시간 주셨어.”

“뭐! 잠깐. 그러면 원장님도 우리 사이 아신다는 소리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계시는 거 보니까 같이 들어가면 대충 눈치채지 않으실까?”

“그게 진짜야? 아니야. 같이 들어가는 건 아닌 거 같아.”

“뭐! 왜?”

“생각해 봐. 이대로 같이 들어가면 앞으로 적어도 한 달 내내 놀림당할 텐데 감당 가능해?”

“……!”

최모나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이찬희는 곧장 수긍했다. 순간 짓궂은 의료진들이 놀린다고 생각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네. 병원 전체 소문나면 은근히 피곤할 거 같아.”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피곤할 수도 있어.”

“당분간 조심하는 게 좋겠다.”

“그렇다니까. 그러면 이건 어때?”

“뭔데? 뭐, 좋은 생각 있어?”

“응.”

한편, 이찬희와 최모나가 병원 정문 근처에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우리병원 직원들은 두 사람을 두고 야식 내기를 진행 중이었다.

“자! 그러면 팀장님과 장 보안은 같이 들어온다고, 나머지 분들은 다들 따로 들어온다죠?”

“네. 근데 원장님은 아직 안 하셨는데?”

“어! 저기 오시네. 원장님?”

마침 응급실에서 나온 태경을 임정숙 간호사가 불렀다.

“지금 야식 내기 중인데 최 쌤, 이 쌤 같이 온다. 따로 온다. 어느 쪽에 거시겠어요?”

“이건 보나 마나 후자죠.”

“에이! 우리 원장님이 뭘 모르시네. 따로 오면 더 티가 날 텐데 당연히 같이 오죠.”

옆에 있던 최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원래는 그게 맞는데 두 사람은 거기까지 생각 못 했을 거예요. 같이 오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분명히 따로 들어올 겁니다. 우리 귀여운 후배들이 생각보다 순진한 면이 있거든요.”

“와요! 다들 정문에 집중하세요.”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뽑으면 창문을 보고 있던 간호사가 대기실 쪽으로 뛰어오며 말하자 직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누구야? 최 쌤? 이 쌤? 아님 같이?”

“들어올 때 됐으니까 직접 보세요.”

직원들은 각자 일을 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흩어진 채 눈동자만 입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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