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미묘하게 다른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한눈에 봐도 그가 이영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선민은 천천히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선배?”
“……!”
드르륵-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영훈은 순간, 멈칫하다 당황한 듯 의자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서, 선민아…….”
혹시나 이 자리에 안 나오면 어떡할까. 마음이 바뀌어 보기 싫다고 하면 어쩌나 싶던 이영훈은 그녀를 보자 상당히 놀란 표정을 보였다.
이영훈만큼은 아니었지만, 김선민도 그를 보며 살짝 놀라긴 했다.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를 보자 기분이 참 묘했다.
“선배가 남긴 쪽지 봤어.”
“그랬구나. 일단 이쪽에 앉아. 뭐 좀 마셔야지. 뭐, 마실래? 커피? 주스?”
“아니야. 선배. 나 괜찮아.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나야 똑같지 뭐. 나 이혼했어.”
오래전, 김선민과의 일로 결혼과 담쌓고 살던 이영훈은 극성 부모님의 성화로 인해 중매로 결혼했었다. 하지만 애정 없는 결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혼 생활은 막을 내렸다.
“선배, 이혼했다는 소리는 들었어. 괜찮아?”
“벌써 예전 일이고 아무렇지 않아.”
“다행이네. 오래 기다렸다고 들었어. 내가 폰을 정지시켰다가 다시 풀었는데 오늘 바빠서 폰을 볼 시간이 없었어.”
이영훈은 지금까지 승우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
그런 그가 다급함이 가득한 편지 한 장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하니 김선민은 그에게 미안했다.
“선배,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긴. 나 얼마 안 기다렸어.”
“아니, 갑자기 편지 남긴 것도 그렇고 승우…… 일도 그렇고 미안해서.”
“선민이 네가 왜 미안해.”
이영훈은 김선민을 기다리는 동안 편지 한 장으로 알게 승우의 존재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이라면 내가 미안하지. 지금까지 너 혼자 승우를 키웠을 거 아니야.”
“나보다는 친할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
김선민은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영훈에게 그동안의 일을 전부 설명했다.
그 당시 왜 본인이 그렇게 모진 말을 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과 승우가 자폐아이라는 것도 알렸다.
마지막으로 왜 편지 한 장을 들고 이영훈을 찾아갔는지에 대한 이유도 숨김없이 다 말했다.
적어도 있는 사실 그대로 말을 하는 게 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에 수소문한 끝에 선배가 사는 곳을 알게 됐고 무작정 찾아갔던 거야.”
“그랬구나. 그때……. 우리 누나랑 어머니 때문에 네가 그런 결정을 하고 떠난 거였어.”
지금 이 순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영훈은 김선민에게 미안해 그녀를 쳐다보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어떻게 아직 학생인 어린 친구에게 그렇게 모질게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누나와 어머니가 많이 미웠다.
“선민아, 너무 늦었지만 정말 미안해. 우리 누나와 어머니가 너에게 한 일 내가 사과할게. 그리고 내가 어머니와 누나가 직접 사과할 수 있도록 할게.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따지고 보면 네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인데……. 정말 미안하다.”
“아니야. 선배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도 있어. 우리가 너무 어렸고 잘 몰랐던 거 같아. 그때의 일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 그래도 승우 낳은 일은 후회하지 않아.”
이영훈은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김선민을 보며 그녀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배네 누나와 어머니가 사과할 필요도 없어. 그때 당시에는 속상하고 그분들이 미웠던 건 사실이야. 그런데 지금은 안 좋은 감정도, 좋은 감정도 없어.”
“그래도 미안해. 내가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한 것도 미안해. 선민이 네가 혼자 고생 많았겠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고생은 좀 했어. 그런데 선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 좋은 의사 선생님 때문에 승우랑 내 인생에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일들이 생겼어.”
김선민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은 오늘 일을 이영훈에게 알렸다.
“승우가 천재……라고?”
“선배도 놀랐지?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런 좋은 기업에서 후원까지 해 주시고 승우도 선민이 너도 정말 잘됐다. 그 의사 선생님이 진짜 대단한 분이시네.”
“나랑 승우한테는 은인 같은 분이야.”
“선민아, 그런데…….”
잠시 머뭇머뭇하던 이영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일과는 별개로 내가 승우를 도와주고 싶어.”
“나, 이제 괜찮아 선배.”
“알아. 너 이제 괜찮은 거 아는데 그동안 너랑 돌아가신 할머님께서 고생만 하셨잖아. 나도 승우를 위해 뭔가 하고 싶은 거뿐이야.”
생물학적 아빠니까 인제 와서 아빠 노릇을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정말 사심 하나도 없이 승우와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양육비 주는 게 맞아. 거절하지 마.”
“거절하지 않을게. 대신 이 문제는 나랑 선배랑 좀 더 이야기해 보자.”
“그래,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선배 승우 아빠 맞아. 다만 지금은 승우한테 나는 엄마가 아니라 누나야. 그러니까 선배가 아빠라는 사실은 조금 천천히 말할게.”
김선민은 이 문제를 혼자서 자주 생각하고는 했었다.
언제가 승우가 아빠에 대해 묻는다면 사실대로 다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영훈의 존재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나까지 신경 쓰지 마. 나는 다 괜찮아. 저기 그런데…… 내가 승우를 가끔 보러 와도 될까?”
이영훈은 승우가 보고 싶었다. 그것도 몹시 많이 보고 싶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핏줄에 대한 끌림이기도 했다. 그리고 김선민도 계속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반대한다면 몰래 볼 생각은 없었다.
잠시 말을 아끼던 이영훈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끔 안 되면 1년에 한 번이라도……. 아니다. 내가 괜한 욕심을 부렸나 봐. 못 들은 거로 해 줘.”
“승우 보러 와도 돼. 선배도 아빠잖아. 그러니까 보러 와.”
“그, 그래?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도 우리 승우 생각해 줘서 고맙고 여기까지 달려와 준 것도 고마워.”
“아니야. 당연히 와야지.”
“선배, 미안한데 나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아. 승우가 기다리고 있거든.”
김선민은 승우가 걱정할 거 같아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어, 그래. 얼른 가 봐.”
“그러지 말고 선배도 같이 가.”
“어? 나도 같이?”
“응. 승우 보고 싶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보고 싶겠어. 보고 가.”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영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당연히 승우를 보고 싶었지만 그게 오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 가?”
“아니, 가! 갈 거야.”
잠시 후, 빌라 앞에 도착한 두 사람 앞에 연락받은 윗집 할머니가 승우와 함께 내려왔다.
“누나?”
“우리 승우 잘 놀았어?”
“응. 할아버지랑 그림 그리고 할머니가 볶음밥도 만들어 주셨어.”
“집에 가서 제가 밥해 주면 되는데……. 죄송해요.”
“그런 소리 하지도 말아. 그게 왜 죄송해. 우리 영감님이랑 내가 밥 일찍 먹잖아. 먹는 김에 승우 거 간단하게 했어. 아이고. 손님이 계셨나 보네. 나 이만 들어가 볼게.”
“할머니 감사해요. 제가 이따 들를게요.”
“누나, 이 아저씨는 누구야?”
윗집 할머니가 빌라로 들어가고 승우는 아까부터 자신을 빤히 보고 있던 이영훈을 궁금해했다.
“어. 이분은…….”
“나는 누나 친구야.”
김선민이 잠시 생각하던 그때 이영훈이 자연스럽게 말하며 승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누나 친구?”
“응. 누나 친구 맞아. 승우 어릴 때 이 아저씨가 승우를 많이 예뻐하셨어.”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만나서 반가워. 승우야…….”
이영훈의 눈매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실제로 마주한 아이는 김선민과 자신을 반반씩 닮은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아저씨는 어디 살아요?”
“어. 아저씨는 서울이 아니라 저기 멀리서 살아. 오늘 일이 있어서 왔다가 오랜만에 친구인 누나를 보러 왔어.”
“그렇구나. 아저씨?”
“응. 승우야.”
“우리 누나 예쁘죠?”
“승우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는 승우 때문에 김선민은 상당히 당황했다.
“부끄러우면 저한테 몰래 말해도 돼요.”
승우가 귀에 손을 대고 다가가자 이영훈이 아주 작게 속삭이고 승우는 싱긋 웃었다.
“저기, 승우야? 아저씨가 승우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
“음……. 잠깐은 괜찮아요.”
고민하던 승우가 허락하자 이영훈은 아이가 놀라지 않게 아주 살짝 안았다.
“아저씨가 안아 보게 해 줘서 고마워. 선민아 나 이만 가 볼게.”
“어. 그래. 오늘 고마웠어. 선배.”
“내가 더 고맙지. 승우야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우리 또 보자.”
“네, 다음에는 저랑 퍼즐 놀이해요.”
“그래. 아저씨가 재미있는 퍼즐 갖고 올게. 누나랑 잘 지내고 있어.”
“네, 아저씨 안녕.”
이영훈은 빌라로 들어가는 김선민과 승우를 향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밝게 인사했다.
처음 우리병원에 왔던 승우도, 현실에 넘어져 슬퍼하던 김선민도, 커피숍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기다리던 이영훈까지.
각자 사정이 있고 힘들었던 세 사람의 얼굴에서 더 이상 근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선민아, 승우야. 이제 내가 지켜 줄게.’
김선민과 승우의 뒷모습을 보며 이영훈은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이렇게 우리병원을 발칵 뒤집었던 승우의 사건은 모두의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 * *
우리병원-
“이제, 수치도 정상이고 퇴원해도 되겠네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모레 오전에 퇴원하시고 외래 때 보는 걸로 하죠.”
태경은 마지막 병실에서 저녁 회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최모나와 병동을 돌고 지금은 이찬희와 함께하는 중이었다.
“네, 선생님.”
“그러면 또 뵐게요.”
“어디서 자꾸 똥냄새 비슷하게 구린내 나지 않아요?”
6인실 회진을 마치고 병실 밖으로 나오려는데 안쪽에 있던 환자가 옆 베드 환자에게 물었다.
“자네도 느꼈어? 나만 느낀 게 아니었네. 뭔가 좀 기분 나쁜 냄새가 솔솔 나더라고.”
“그러니까요. 전 괜히 샤워 못 해서 나한테서 나는 건가 하고 여기저기 맡아 봤잖아요.”
“샤워 며칠 못했다고 그런 냄새 안 나. 저기 오 씨 할아버지? 혹시 똥 지린 거 아니에요?”
“뭐! 이놈아? 뭘 지려?”
건너편에 있던 중년 남자의 말에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던 노인이 상체를 일으키며 얼굴을 붉혔다.
“야, 이눔아! 얌전히 있는 사람한테 갑자기 뭔 헛소리야.”
“아니, 저번에 할아버지 침대에 똥 살짝 지리셨잖아요. 그래서 물어본 건데 뭘 그리 화내세요.”
“그거야, 수술 전에 관장하다가 대변이 갑자기 쏟아져서 살짝 나온 거지. 그러는 네가 똥 지린 거 아니야?”
“무슨 말씀이세요. 전 할아버지가 아니에요.”
“넌 나이 안 먹을 거 같아!”
“자자! 우리 환자분들 왜 갑자기 언성을 높이시고 그러실까. 다들 진정하세요.”
옆에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환자들을 진정시키는 사이 태경과 이찬희는 병실을 나왔다.
두 사람의 표정이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는데, 특히 이찬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 보였다.
두 사람이 병실을 나가자 스테이션에 있던 병동 간호사가 웃음을 참음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쌤? 이거 무슨 냄새예요?”
“아. 그게요. 아까 응급실에서…….”
점점 멀어지는 태경과 이찬희 뒤로 방금 인사한 간호사가 질문한 간호사에게 냄새의 정체를 알려줬다.
“이 선생?”
한참을 말없이 걸어가던 태경은 복도 끝에서 평소와 다르게 아주 부드럽고 아주 다정한 말투로 후배를 불렀다.
“찬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