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73화 (372/472)

373화. 모든 일에 원흉

그사이 또다시 병실을 찾은 태경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유혁진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설득한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틈만 나면 그의 병실을 찾았다. 30분을 있을 때도 있었고, 20분을 있을 때도 있었으며 단 5분이라도 여유 시간이 있으면 병실로 올라갔다.

그 뒤, 유혁진이 누워 있는 베드 옆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콜이 들어오면 또다시 응급실과 진료실을 찾았고, 응급 수술이 잡혀 수술방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다시 여유가 생기면 그때부터 한 시간이고 계속 의자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드르륵-

“원장님 오셨어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처음에는 상당히 신경 쓰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교도관들도 주구장창 병실로 올라오는 태경의 모습에 익숙해졌다.

드르륵-

“원장님 또 오셨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벌써 열 번 넘게 들락날락하는 태경을 보며 교도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말로 의사라는 직업이 할 일 없이 노는 직업도 아니고, 환자 보기도 바쁘고 원장이라면 병원 일을 진두지휘해야 할 텐데 여전히 입을 꾹 닫고 있는 유혁진을 틈만 나면 찾아오는 게 참 대단했다.

“안 힘드세요?”

“저야 늘 하는 일이라서 힘든 건 없습니다.”

“원장님, 아무래도 그만 오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선배 교도관이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태경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말했다.

“네?”

“저 친구 말하지 않을 거 같은데 이제 수고스럽게 그만 오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세상에 고집 없는 사람 없다지만, 저 친구 은근히 고집 있는 사람이라서 한번 아니라고 생각하면 자기 생각을 안 굽혀요.”

보통 교도소에 들어오면 같은 방 재소자들끼리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사회에서 했던 일이나 어떻게 교도소에 들어오게 됐는지 등 쉽게 말해 서로의 사적인 부분을 오픈하게 된다.

그런데 유혁진은 그런 게 없었다.

교도소 안에서도 선생님이라 칭하며 여러 사람이 그에게 고민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털어놓았지만, 정작 본인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재소자가 있다면 주저 없이 도와주고 문제도 해결해 주려 했지만, 반대로 본인은 누구의 도움도 받으려 하지는 않았다.

교도소 안에 돌아다니는 유혁진의 이야기도 본인이 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퍼진 건지 모르지만 맞는 부분도 있고 풍선처럼 부풀려진 것도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교도소 안에는 재소자를 돕기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상담이나 심리 프로그램도 있는데 다른 프로그램은 다 해도 유혁진은 그런 쪽으로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저 친구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교도관도 거의 없습니다. 본인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거든요.”

몇 번이나 상담사가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지만, 유혁진은 괜찮다는 말과 함께 거절했다.

“괜히 바쁘신 분이 아까운 시간 낭비하실까 봐 말씀드렸습니다.”

선배 교도관 역시 여러 번 손을 내밀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기에 태경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우리 병원에 입원한 제 환자니까 여기 있는 동안 노력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땐 어쩔 수 없죠. 말씀 감사합니다.”

교도관과 대화를 마친 태경은 또다시 의자를 가져와 베드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는 유혁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한테 그랬죠?”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잘나고 가진 거 많은 사람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지 않는다고? 내가 가진 거 많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럼 날 잘못 본 건데……. 사람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어요.”

태경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병실 안에 교도관들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특히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 다가갈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다.

사람은 나와 공통점이 있는 사람에게 끌리고 그 안에서 어느 정도 동질감이란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태경은 본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유혁진의 눈에 비친 젊고 성공한 병원장에 가진 것도 많고 잘난 사람이 아닌 진짜 모습을 알려 주고 싶었다.

“우리 아버지는 술 때문에 힘들어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파출부랑 식당 일을 하시면서 자식을 키우셨어요. 우리 집은 가난했고 난 의대 공부하기 위해 학원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공부했어요. 의사가 됐지만, 형 빚을 오랫동안 갚았고 절망에 빠져 죽을 고비까지 넘겼어요. 지금 내가 가진 건, 이 병원 원장이라는 직함과 환자들과 직원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에요. 아직도 내가 가진 게 많은 사람처럼 보여요?”

“…….”

순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유혁진은 눈가가 일그러졌다.

“유혁진 씨, 교도소에서 따르는 사람도 많고 어려운 사람도 도와준다면서요? 다른 사람들은 도와주려고 하면서 왜 자기 어려움은 바보같이 혼자 안고 있으려고 합니까?”

“……!”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뭔 줄 알아요? 바로 잘 먹고 잘 내보내는 겁니다. 그런데 몸만 그런 게 아니에요. 마음도! 우리 마음의 찌꺼기도 잘 내보내야 잘 살 수 있어요. 그렇게 계속 혼자 버티고 있으면 마음에 병 생겨요. 유혁진 씨가 재소자들에게 열심히 살라고 했던 것처럼 당신도 열심히 살려면 도움도 받고 마음의 찌꺼기도 배설해야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거예요.”

할 말을 다 한 태경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같은 말도 여러 번 하면 지겨울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요. 지루한 이야기 들어 주느라 수고했어요.”

“정말입니까?”

그렇게 진심 어린 말을 끝낸 태경이 돌아서던 그때였다.

“배설하면!”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눈을 감고 어떤 반응도 하지 않던 유혁진이 목소리를 높이며 입을 열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도 배설하면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까?”

“그로 인해 유혁진 씨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땐 죽고 싶다는 그 마음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원장님께서 날 도와주겠다는 말? 그 말 아직도 진심입니까?”

“난 환자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태경의 진심 어린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생각이 바뀐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혁진의 마음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였다.

“잘됐네! 이 사람아, 진작 그럴 것이지. 사람은 뭐가 됐든 입 밖으로 말을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법이야.”

“원장님이 애쓰신 보람이 있네요.”

“교도관님?”

“그래. 말해 봐.”

병실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일처럼 좋아하던 교도관들은 바로 뒤에 들려 온 유혁진의 말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허락만 해 주신다면 원장님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유혁진은 오직 태경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좀 곤란해. 안 그래?”

“그럼요. 선배님. 자네가 어렵게 말 꺼낸 건 잘 아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도주하려 했던 유혁진을 태경과 둘만 있게 할 수는 없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 도망가려는 것도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정 그렇게 염려되시면 원장님과 이야기할 동안 발에 수갑을 채우셔도 됩니다.”

“그렇게 하시죠. 제가 잘 보고 있을게요. 그리고 두 분이 병실 앞에 계시면 괜찮을 거 같은데요. 제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결국 발에 수갑을 채우는 조건으로 유혁진의 말을 들어 주기로 했다.

잠시 응급실 상황을 살피고 온 태경이 병실로 돌아오고 교도관들은 병실 문 밖에 앉아 대기하기로 했다.

“이제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요.”

“그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제가 계속 치료를 거부했으면 정말 창규를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나요?”

“아니요. 유혁진 씨를 치료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어요.”

“역시 그랬군요. 그런데 원장님이 날 왜 그렇게 도와주겠다고 한 건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유혁진 씨의 죽고 싶다는 그 말이 나한테는 도와 달라는 말로 들렸어요.”

“……!”

태경의 말에 잠시 움찔하던 그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본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의사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잔인한 말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도 제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땐 제 심정을 이해하실 겁니다. 그리고 제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해요.”

“원장님 어머니처럼 우리 어머니도 파출부 일을 하셨거든요. 뭔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느끼니까 그때부터 원장님이라면 내 이야기를 듣고 부탁을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는…….”

유혁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무섭고 흉측하고 처절하고 기분 나쁜 이야기인데 들으실 수 있겠어요?”

“네, 들어 볼게요.”

“전 부모님과 나이 터울이 꽤 나는 여동생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살았습니다.”

부모님은 평범한 분들이셨지만, 두 분만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주 멋진 분들이셨다.

그리고 세상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유혁진과 여동생을 목숨보다 사랑하며 아꼈다.

네 식구는 하루하루 행복했다.

집안 형편도 괜찮았다.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거나 부족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어느 집에 기사와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월급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유혁진의 부모님이 일하는 집은 잘사는 집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잘사는 집으로, (*일명) ‘회장님 집’으로 불렸다.

대한민국 재계 순위를 매기면 30위 안에 들 정도의 대단한 집안이었다.

높은 담장이 집 주변을 둘러싸고 집 안에는 부모님 말고도 여러 명의 가정부와 기사, 정원사 등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머니는 주로 주방 일을 했고 아버지는 회장님의 공적인 운전을 담당하는 기사로 일했다.

‘혁진아. 저녁 먹자.’

‘우와! 이게 다 고기야? 무슨 고기가 이렇게 많아?’

‘아빠 엄마 일하는 곳에서 우리 먹으라고 주셨어.’

부모님은 명절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퇴근하면 양손 가득 먹을 걸 들고 오셨는데 회장님 집에서 준 거라고 했다.

유혁진은 부모님이 일하시는 곳이 그렇게 대단한 집이라는 걸 고3이 돼서 알게 됐다.

어느 날, 그는 학교가 끝난 뒤 엄마의 연락을 받고 회장님 댁을 찾았다.

‘아들 왔어? 오는데 힘들진 않았고?’

‘아니. 근데 여기가 아빠 엄마가 일하는 집이야?’

‘응. 집이 크지?’

‘진짜 크네.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님 집 보는 거 같아.’

‘집 좋지? 우리 혁진이랑 현진이도 엄마,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집에 살게 해 줄게.’

‘에? 난 이렇게 큰 집 필요 없어. 우리 집이 아늑하고 더 좋아.’

생전 처음 본 커다란 집에 놀라기는 했지만,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성격이 낙천적이고 씩씩한 유혁진은 남의 집 일을 하는 부모님이 부끄럽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물어볼 때면 늘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오히려 열심히 사는 부모님이 늘 자랑스러웠다.

‘와! 집 엄청 크다. 대빵 커.’

그날은 유혁진의 유치원생인 어린 여동생도 함께 왔다.

‘엄마 여기 궁전 같아. 나무도 진짜 많아. 와! 멍멍이도 있어. 멍멍이 안녕. 귀여워.’

‘현진이도 좋아하네.’

‘엄마, 근데 나 왜 오라고 한 거야?’

뭐든 게 신기하고 놀라운 여동생과 달리 유혁진은 어머니가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사모님이 널 보고 싶어 하셔서 불렀어.’

‘이 집 사모님이 날? 왜?’

‘너한테 음식을 대접하고 싶으시대.’

‘식사? 그게 무슨 소리야, 식사라니……?’

‘들어가 보면 알아.’

아리송한 대화를 끝으로 유혁진은 어머니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모님, 이쪽은 제 아들 혁진이 그리고 여긴 우리 집 막내 현진이에요. 혁진아,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유혁진이라고 합니다.’

‘어서 와요. 만나서 반가워요. 엄마한테 말 많이 들었어요.’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TV 속에 나오는 대단한 사모님들의 뻔한 레퍼토리처럼 아랫사람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도도하지도 않았다.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따뜻한 미소와 우아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부모님을 닮아서 그런지 인물이 아주 좋네요. 우리 현진 공주님은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엄마, 아빠.’

‘말도 잘하네.’

그렇게 사모님의 환대를 받으며 주방에서 맛있는 음식까지 대접받았다.

‘사모님, 큰 도련님 영어 수업 끝났습니다.’

밥을 다 먹고 거실에서 다과를 즐기고 있던 그때 다른 가정부가 다가와 말했다.

“엄마?”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2층에서 남자아이가 내려와 사모님 곁으로 걸어왔다.

‘우리 아들 수업 다 끝났어?’

‘네. 엄마, 이 사람들 누구예요?’

‘인사해. 아주머니 아들이랑 딸이야. 여긴 혁진이 형이고 여기는 현진이야. 태철이보다 동생이야. 예쁘지?’

‘안녕. 난 유혁진이라고 해.’

사모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아이를 보며 유혁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낯을 가리는 몸짓과 유난히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아이는 이 집안의 장남이자 모든 일에 원흉인 차태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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