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대공가로 모셔진 리벨은 말 그대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응접실로 모셔지는 것이 아니라 대공 개인의 손님을 받는 저택 상층의 방 안까지 안내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모시겠다는 하녀들도 열 손가락을 넘었다.
마치 쁘띠 황태후라도 된 것 같았다. 리벨 이벨라, 자작 영애로서도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정말 대공가인데, 아니, 진짜 대공이 온다고?
리벨의 혼란스러운 머리가 풀리기도 전에 대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리벨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어냈다.
황가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 같은 화려한 금발, 조용하고 침착한 벽안까지.
정말 디란타 대공 본인이 맞았다.
멀리서야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먼 거리에서도 어지간히 빛나는 외모다 싶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더했다.
순간 그녀는 원작의 리벨 이벨라 영애를 이해할 뻔했다.
쫓아다닐 만한 얼굴이다!
한 번에 뻑 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하하하지만 스토킹은 아니지!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
무미건조하기로 유명한 디란타 대공의 시선이 리벨을 주시했다.
리벨이 침을 꼴깍 삼켰다.
황태후의 주접에 가까운 사랑을 받으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던, 여러 의미로 목석이라 불리는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이다.
무엇보다 대공은 원작에서 리벨 이벨라의 목을 날려 버린 인물이다.
절대 얽혀서는 안 될 사람.
근데 어쩌다가 내가 이 사람 집까지 왔담.
……설마 내가 빙의하기 전에도 리벨 이벨라가 대공을 쫓아다녔나? 그걸 들켰고?
그래서 쓱싹하기 전에 그 담대한 녀석 얼굴이나 보자꾸나 하면서 부른 건가?
“주인님을 뵙습니다.”
하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리벨은 그녀들을 따라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이려고 했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그녀의 턱 아래를 받쳤다.
그건 남자의 커다란 손이었다.
팔을 따라가 시선을 올려 보니,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디란타 대공이었다.
“헉.”
그렇게 리벨이 숨을 삼켰을 때였다.
디란타 대공은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아니, 입꼬리가 조금은 올라간 것도 같았다.
“그대는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습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없었다.
대공이 손을 들어 올리자, 방 안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렇게 둘만 남자, 대공이 입을 열었다.
“신부님을 뵙기가 매우 힘들군요.”
‘신부님’이라는 사랑스러운 단어를 말하는 목소리치고는 왠지 딱딱한 목소리였다.
* * *
디란타 대공과 리벨은 마주 앉아 있었다.
요컨대 디란타 대공이 상석에 앉아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어디까지나 동등한 상대라는 것처럼, 디란타 대공은 마주 앉는 자리를 고수했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입니다.”
디란타 대공이 입을 열었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무표정이라는 서늘한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냥 큰 감흥이 없는 얼굴?
리벨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대공은 과연 반짝이는 태양 같은 미모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지금 목이 달랑달랑해지는 기분이었다.
“……리벨 이벨라예요. 그런데, 대공 전하.”
“예.”
디란타 대공은 순순히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방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최대한 이 상황을 무마해야 한다! 아니, 물려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물론, 제가 감히 대공 전하를 의심할 수는 없지만, 감히 조심스럽게 묻건대 혹시 사람을 잘못 데려오신 건 아닌지…….”
복잡한 머릿속에서,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부드럽게 돌려 말한다는 걸 실패한 셈이었다. 리벨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내가 뭐라고 한 거람!
아아아냐, 괜찮아!
그녀는 애써 속을 가라앉혔다.
디란타 대공이 비록 싸늘한 사람이고, 의미 없는 소릴 지껄였단 이유로 적국의 사신을 목을 베어 선물로 보낸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혹시 돌아 버리셨습니까?’ 하진 않았잖아!
리벨이 애써 매끄럽게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가 그렇게 스스로를 구제하려 애쓰는 동안, 디란타 대공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짧게 답했다.
“실수는 없었습니다.”
예?
순간 리벨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실수가 없었으면 내가 대공비가 맞는단 소리?
정말 사기 치는 거 아니고…… 아니, 애초에 진짜 대공저로 모셔져 온 이상 간덩이가 배 밖으로 편도 여행 떠난 사기꾼들은 아니란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말이었다.
진짜 내가 대공비라고? 왜?
“그, 뭔가 오해가―”
“없었습니다.”
디란타 대공이 다시 한번 말했다.
리벨은 침착해지려 애썼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생각해 보았다.
자, 생각해 보자, 리벨 이벨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디란타 대공이랑 진짜 결혼했을 리가 없지.
내가 미쳤냐? 모가지 날아가려고 대공 옆에 접근하게?
그럼 어딘가에서 뭔가 잘못된 거야. 그 부분이 어디인지만 짚으면 돼.
만일 그게 안 된다면?
그냥 가장 중요한 걸 짚으면 되지.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디란타 대공 전하, 제가 알기로는, 디란타 가의 대를 대공님께서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던데…….”
디란타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그럼 왜 나랑 뜬금없이 혼인 승인까지 받아 버리신 건지?
매끄럽게 튀어나오려는 막말을 리벨이 삼켰을 때였다. 디란타 대공의 말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모두가 철회하길 바란 결정입니다.”
그야 그랬겠지…….
리벨이 듣고 있자 디란타 대공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걸 되돌렸는데, 반대할 자가 있겠습니까?”
없겠죠. 게다가 무려 대공 전하 결정인데요.
리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공비가 될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쫄딱 망한 자작가의 영애를 굳이 데려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혹시 대공가에서 새로 복지 사업이라도 하나? 자기 혼삿길 막아 가면서?
“그건 그런데 대체 왜 굳이 저를……?”
디란타 대공이 제 한 몸 던져 가면서 자작 영애의 인생을 구제해 줄 이유가 없었다.
리벨의 말에 디란타 대공은 가볍게 답했다.
“그날 밤.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예? 무슨 밤이요?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디란타 대공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이 밤을 함께 보내면,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겠다고.”
“예?”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언제요? 그 밤이 언젠데?
“내가 누구든, 평생 내 옆에 있겠다고.”
“아니, 제가요? 언제요?”
디란타 대공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변화 없는 표정으로 리벨의 뒤통수를 풀스윙으로 후려갈겨 버렸다.
“설마 제 순결을 가져가 놓으시고, 지금 와서 시치미라도 떼실 생각이십니까?”
“네???”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순결이요? 누구요? 제가요? 제가 대공 전하 순결을?
가져갔으면 대공님이 내 순결을 가져갔지, 내가 왜 대공님 순결을? 아니…….
리벨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헛소리를 집어삼켰다.
귀족 영애! 귀족 영애! 난 지금 기자가 아니다!
“순결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신지……, 오해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전하.”
“오해는 없습니다.”
디란타 대공이 리벨을 가리켰다.
“그날 밤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다음엔 제 가슴을 가리켰다.
“제 위에서.”
“예?”
무려 위에서? 위……에서 뭘?
“흔적까지 남았습니다만.”
그가 팔을 걷어 올렸다. 그의 팔에는 선명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누군가 손톱을 박아 넣은 흔적이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팔을 꽉 잡다 못해 할퀸 흔적.
“……그거 제 거 맞나요?”
하지만 제 건 아닌 듯?
본의 아니게 디란타 대공의 화려한 밤 생활을 관람하게 된 리벨이 물었다.
하지만 디란타 대공은 확신이 있는 듯했다. 그가 되물었다.
“제가 신혼 사흘 만에 바람피운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담담한 얼굴로 말해서 말려들 뻔했다.
리벨은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전에, 진짜 실수가 아니란 말씀이세요?”
“네. 먼저 제 위로 올라오신 건 영애였습니다.”
덤덤하게 그런 말 하지 마!
리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게 진짜고 가짜고 간에 디란타 대공이 밖에 나가서 ‘이벨라 자작 영애가 나를 덮쳤습니다.’ 하면 그건 사실이 될 터였다.
누가 제국의 실세 대공님 말을 믿지 내 말을 믿겠냐!
“그래서, 디란타 대공비가 된 것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디란타 대공이 물었다.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이상하고 당황스러운 거지. 아니, 그보다 이미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인가하셨는데 물릴 수는 있나요?
리벨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근데 생각해 보면 좋은 거 아닌가?
대공비가 되면 자작가에서 도박쟁이 자작을 뒷바라지할 필요도 없는데. 막말 들어 가면서 저택 빌려 쓰는 값인 셈 치고 주던 돈도 안 줘도 된다는 뜻이잖아.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녀가 당당한 직업인이라는 점.
그것도 귀족가의 비리를 터는 기자라는 점.
그리고…… 본의는 아니지만 어쨌든 대공에 대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는 점.
“그렇다면?”
디란타 대공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저기, 원래 결혼이고 뭐고 인륜지대사를 그렇게 충동적으로 해결하십니까?
“그…… 대공비가 된다면, 그, 제 취미 생활이 조금…….”
사실 취미 생활이 아니라 본업에 조금 많이 타격이 가는데.
속마음을 숨긴 리벨이 애써 돌려 말했다.
그렇다고 사실 내 본업이 기자이고, 사실 대공님 기사 썼던 것도 나라고 까발릴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