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취미 생활이 어떤 것이기에.”
디란타 대공이 살짝 몸을 앞으로 끌어당겨 앉았다. 호기심의 표현 같기도 한데, 표정은 또 무덤덤했다.
감정 변화가 없는 것 아니냐는 소문은 들었는데 실물을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라, 이 정도로 표정이 안 드러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느라, 리벨은 답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대공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엇이든 즐겨도 됩니다. 제국의 안위에 폐가 되지 않는 한, 어떤 것이든 괜찮습니다.”
제국의 안위에 폐가 될 정도라면 그게 취미입니까?
리벨은 간신히 표정 관리에 성공했다.
누구 취미 생활을 반역으로 만들려고 하시네!
물론 그녀의 취미는 건전했다.
하지만 제국의 안위는 몰라도 디란타 대공의 안위에는 좀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단독) 디란타 대공, 그가 대공가의 대를 끊겠다 선언한 이유]
가십성이 짙은 그 기사는 기자 벨의 인지도를 순식간에 끌어올린 유명한 기사였으니까.
그때 당시에 의외로 대공가는 조용했다. 그를 아껴 마지않는다는 황가에서조차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안겨 주었다.
그럴 때까지도 디란타 대공은 별 반응이 없었다.
“…….”
아주 오랫동안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는 대공.
게다가 수없이 쏟아지는 많은 연모의 편지를 무표정하게 반송한 것부터, 얼음같이 차가운 모습까지.
권력에 미친 것들이 온갖 미성년자 관람 불가한 사건까지 벌여도,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은 그는 이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까지 선언했다.
대공인 그가 결혼하지 않으면 대공의 사후, 그의 땅은 그대로 황가로 귀속된다.
디란타 대공가는 그대로 끝이라는 의미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기자 벨…… 그러니까 리벨은, 디란타 대공가에서 은밀하게 수집하는 ‘라이아 약초’에 집중했다.
그 약초는 얼마 전에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돌아서 제국에서 씨가 마른 물건이었거든.
물론 그녀도 쓰고 싶어서 쓴 기사는 아니었다.
원작 꼴 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대공한테 접근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그녀도 사면초가인 상태였다.
‘벨 기자의 비밀을 숨겨 달라는 부탁을 할 거면, 벨 기자도 그만큼의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응?’
그렇게 편집국장에게 협박받지만 않았어도, 그런 기사를 쓸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변신 능력을 제대로 못 쓸 때, 하필이면 그놈한테 정체를 들켜 버려서! 젠장!
편집국장은 물론 리벨의 기사로 떼부자가 되었다. 리벨은 기사 고료값 딸랑 조금만 받았고.
그러고 나서 편집국장은 얼마 후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돈을 들고 사라진 건지, 대공가에서 손을 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제게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사이, 대공이 말을 이었다.
“사치스러운 취미입니까, 아니면 규모가 큰 취미입니까?”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최근에 어머니께서 마차 몇 대를 만들어 기차와 경주시키는 걸 즐기시더군요. 그런 종류의 흥미입니까?”
아니, 그 스케일 큰 취미는 또 뭡니까? 말이 끄는 마차가 마법으로 질주하는 기차를 어떻게 이겨요?
“아니면, 마차 안에 한 번에 몇 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지, 그런 것을 살펴보는 것에 취미가 있으신지─”
“아아닙니다.”
그런 이상한 취미 없어!
리벨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그렇다면? 대공비의 취미 생활을 방해하려는 자들을 바깥에서 보신 겁니까?”
봤다고 하면 저 덤덤한 얼굴로 ‘그럼 내일 아침 그자들의 목은 저택의 문 앞에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하고 말할 것 같았다.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아니고요…….”
역시 대공비 노릇은 무리였다.
보는 눈도 너무 많고, 게다가 일개 가문도 아니고 대공령의 안주인이라면 호위하려는 인력도 무지막지하게 붙을 것이 뻔했다.
몰락한 자작가에서야 사용인도 기사도 없으니 몰래 빠져나가기 쉬웠지만, 대공가는 규모부터가 달랐다.
역시 안 될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대공비로 호사 누려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과거에 쓴 기사가 너무 마음에 걸렸다.
원래 옆에 있을수록 비밀을 지키긴 힘든 법이니까.
리벨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 혼인 승인받은 것부터 물리면 안 될까요?”
아무리 황제가 직접 인가한 결혼이라지만, 그래도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대공이니 어떻게든 물릴 수 있지 않을까?
이쯤 되면 이혼녀가 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목숨부터 챙기고 보자!
아무리 무뚝뚝하다는 대공이라도, 본인에 대해 안 좋은 기사를 냈던 기자를 눈앞에 두고도 무미건조할지는 지켜봐야 아는 문제였다.
물론 목숨 걸고 관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면 ‘당신이었습니까.’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 다음, 칼을 휭 휘둘러 이쪽을 내세로 보내 버릴 것 같았다.
역시 대공비는 안 된다!
어떻게, 대공비로 기자 생활을 해!
그녀가 슬그머니 건넨 말에 대공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가로로 굳게 닫힌 입술은 왠지 무언가를 눌러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오한이 들어, 리벨이 살짝 몸을 뒤로 물렸을 때였다.
정확히 그녀가 물러난 만큼 다가온 대공이 물었다.
“그날 밤에 하신 말이, 진심이 아니었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뭔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리벨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취해서 뭔가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정말, 가벼운 말이었습니까?”
되묻는 말에 리벨은 단호하게 답했다.
“네.”
“사랑한다고 속삭인 것도요?”
“네…… 네? 제가 그랬어요?”
리벨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대공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왔다. 집요한 질문이 쏟아졌다.
“저를 끌어안으며, 속삭이셨던 말도?”
“……끌어안아요?”
진짜? 내가?
“저택으로 꼭 초대하고 싶다던 말씀도?”
“초대요? 대공 전하를요????”
그 거지 같은 집구석에? 이건 진짜 금시초문이다!
저도 모르게 리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밤에 속삭인 말이라느니 대공의 밤 생활에 그녀가 끼어 있었다느니 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저택으로 초대는 또 다른 말이었다.
“그럼, 이것도 거짓이었습니까?”
디란타 대공이 입고 있던 제복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불빛을 받자 세이프티 바의 문양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그 종이는, 분명 세이프티 바의 별실에 있는 종이였다.
[나흘 후 저녁, 디란타 대공님을 이벨라 자작저로 초대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 쓰여 있는 건 분명 리벨, 그녀의 글씨체였다.
……좀 삐뚤빼뚤하긴 했지만.
“이이이런 걸 제가 언제!”
리벨은 저도 모르게 종이를 샥 뺏어 갔다. 대공은 순순히 종이를 뺏기며 말했다.
“그럼 내일 밤에 초대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으아아아!
리벨의 내적 비명이 삼중창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결혼식은 언제로 잡으면 될지.”
황제한테 혼인 승인까지 받아 놓고 무슨 결혼식이야! 앞뒤가 심각하게 잘못되신 분이네!
리벨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아.”
그때 디란타 대공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그죠? 뭔가 좀 잘못된 것 같으시죠?”
리벨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묻고 나서 입을 찰싹찰싹 때리고 싶었지만. 너무 기대감에 차서 입 밖으로 본심이 나오고 말았다.
근데 사실이었다.
애지중지해 온 아들 중 하나를 며칠 만에 홀랑 결혼시켜 버린다니, 디란타 대공을 아끼시는 황태후 전하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다.
하지만 디란타 대공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덤덤하게 물었다.
“아니요, 어머니께 인사는 언제 드리러 갈까요?”
이 사람 머릿속엔 내가 대공비라는 생각밖에 없나 봐!
으아아아아아악!
리벨의 머릿속을 맴돌던 비명 삼중창은 오케스트라로 진화했다.
* * *
리벨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비록 창밖으로 황성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생각은 해야 했다.
내가 어쩌다 여길 오게 됐지?
이곳은 중앙 사교계에서도 이름 있는 가문의 귀족들만 드나드는 황성의 중심부였다.
당연히 리벨은커녕 그녀를 그렇게 무시하던 자작 내외도 온 적 없을 곳이었다.
“…….”
하지만 그곳을 디란타 대공은 흥미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그는 황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황가의 피를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만 오는 곳에 내가 왜 오냐고!
물론 기자 벨로서 여길 왔으면 눈을 빛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만 황가에서 정식 취재 요청을 받아들여서, 황성에서 일하는 각 부서를 밀착 취재할 수만 있다면, 내 기사가 실린 신문은 그날로 동이 나겠지.
황성, 그것도 황성의 안쪽 깊은 곳은 그만큼 미지의 공간이었다.
대중들은 물론이고 온갖 곳을 싸돌아다니는 기자들까지도 궁금해하는.
하지만 오늘 그녀는 리벨 이벨라라는 영애였다.
……아니, 정확히는 대공비 리벨 폰 디란타였다.
‘미치겠네!’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은 진심을 간신히 씹어 삼킨 리벨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이제 마차는 이벨라 자작저가 열 채쯤 들어갈 것처럼 넓은 데다 화려하고 장대하게 꾸며진 화원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대공 전하, 설마하니 여쭙는 것입니다만…….”
리벨이 정말 황성의 중심으로 접어들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디란타 대공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시종일관 담담한 시선이었다.
“혹시 저희가 어디로 가는 건지.”
언제 뵈러 갈까요, 하고 묻더니 마차로 태워 데려온 곳이 이곳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벨라 저택으로 돌려보내 주려고 마차에 태운 것이 분명하다는 리벨의 짐작은 아득히 궤도를 벗어나 버렸다.
“황태후 폐하를 뵐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