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6)화 (6/167)

제6화

설마가 리벨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황태후 폐하요? 지금 당장요? 롸잇 나우? 저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리벨이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자작저에서 입던 옷 그대로였다.

돈 벌어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번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빙의 전 이벨라 영애가 사 둔, 벌써 몇 년이나 유행이 지난 옷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 레이스 끝은 조금 닳아 있기까지 했다.

“아직 준비가…….”

“괜찮습니다.”

디란타 대공은 그녀의 옷을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고풍스러운 의상도 좋아하십니다.”

“네?”

요컨대 빈티지도 좋아하신단 소리? 근데 이건 그냥 빈티 나는 의상인데?

리벨의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후 폐하라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황태후는 이 황가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

사실상 황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권력을 쥔 사람. 물론 황가의 가장 웃어른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가 유명한 것은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폭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황제가 오히려 유약하게 보일 정도로 그녀의 손속은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서늘한 얼굴로 사람의 목을 날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사람을 죽여 버린다는 점이 더 무서웠다.

그녀의 피 묻은 웃는 얼굴이 몇 번이나 기사화되었을 정도로 그녀는 피를 자주 보았다.

물론 쓸데없이 피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 어떤 정보통을 어떻게 끼고 있는지는 알려진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그녀는 모르는 게 없었다.

반역의 싹을 자르다 못해 그 땅까지 불모지로 만들어 버린 그녀는 불과 한 달 전에도 수도 뒷골목에서 황가를 기만한 자를 찾아 없애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화려한 취미 생활로도 유명했다.

디란타 대공이 말했듯, 한계를 실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마차 안에 사람이 최대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지 실험해 본다든지, 마법으로 움직이는 마차를 말이 모는 마차로 따라잡게 한다든지 하는 기이한 취미를 즐겼다.

물론 재미없는 결과가 나오면 시합에 참가한 사람들의 인생도 재미없어진다.

“…….”

그 수많은 소문을 생각한 리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가, 새하얘지고 입술은 보라색으로 푸르딩딩하게 물들어 버렸다.

대공님한테는 온화한 어머니겠지만, 나한텐 아니라고요!

그것도 이 늦은 밤에!

황가를 제대로 모시지 않은 죄로 쥐도 새도 모르게 목줄이 틀어 잡힐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게다가 리벨은 찔리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대공에 대한 기사를 낼 때도 불안에 떨어야 했다.

황태후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물론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이 낸 기사였다.

이벨라 영애가 기자였다는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편집국장의 압박으로.

그런데 왠지 모르게 황태후 폐하는 그녀의 목을 뽑아 버리는 대신 귀족들의 목만 뽑아 버렸다.

그 기사로 떼돈을 번 후 떵떵거리며 살 거라던 편집국장은 웬일로 목이 안 날아가나 했더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의로 자취를 감춘 건지, 타의로 감춰진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살벌한 곳에서 살아남은 건 리벨 하나뿐이었다.

‘혹시 편집국장이 내 정체를 불기 전에 죽었나?’

그땐 그렇게 희망차게 생각하기도 했다.

편집국장을 제하면 그녀의 정체를 아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알려진 건 벨이라는 이름뿐.

그래서 편집국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해!!!!

상대는 황태후 폐하였다. 그 황태후 폐하!

“이 시간에는 주무시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대공은 리벨이 걱정하는 게 보였는지 짧게 말했다.

주무시지 않는 게 문제일까요? 오늘 밤 이후 제가 영원히 잠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 아닐까요?

“늦게 찾아가도 내치는 분도 아니고.”

다시 그가 덧붙였다.

그야 그렇겠지!

창문 밖으로 그를 환영하는 얼굴의 기사들이 보였다.

당연하다.

황태후 폐하를 제대로 뵈러 가지도 않는 둘째 아들이 늦은 밤에나마 찾아왔으니 황태후 폐하께서도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 옆에 있는 군더더기만 아니면 말이야! 미치겠네! 미치고 팔짝 뛰겠네!

“귀하신 피, 디란타 대공님을 뵙습니다.”

리벨이 미쳐 가는 사이, 마차는 황태후의 거처에 닿았다.

마차 문이 열리자 리벨은 높디높은 궁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흐리면 건물의 끝도 안 보일 것 같은, 가히 탑에 가까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머니께 안내해라.”

대공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리벨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모시겠습니다.”

귀족가 영애를 모시려는 자세였다.

그래도 아직 내 목이 잘리진 않을 모양이다.

리벨이 그 손을 잡으려는 때였다.

─탁.

디란타 대공이 기사의 손을 쳐 냈다. 기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

“신부님의 에스코트는 내가 한다.”

친절도 하시지!

리벨은 지옥문에 케르베로스와 손을 잡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케르베로스는 지옥이 집이겠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아 돌아 버리겠네!

그것도 아들을 그렇게나 아끼는 황태후 폐하께서 웬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몰락가 영애를 에스코트한 아들을 보시면 기분이 째지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황태후 폐하 때문에 대공 전하의 에스코트를 무시하기에는 리벨의 목숨줄이 너무 가늘었다.

“실, 실례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근데 손이 내쳐진 기사가 철썩 무릎을 꿇었다.

검으로 제 목을 베어 달라는 듯 어느새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검까지 풀어 앞에 내려놓은 채였다.

갑자기 왜?

“감히 대공 전하를 불편하게 만든 죄, 달게 받겠습니다.”

“…….”

불편해하시나?

리벨은 슬쩍 디란타 대공을 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기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로 안 불편해하시는 것 같은데?

리벨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의 입매가 미묘하게 비틀리는 것을 리벨은 찰나에 포착해 냈다.

그녀가 평소 사람을 파악하는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짧은 변화였다.

이상한 살벌한 예감이 리벨을 스쳤다. 그 순간 리벨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잠, 잠깐!”

어느새 대공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반쯤 뽑힌 검에 대공의 시선이 닿았다가, 리벨에게로 향했다.

“아는 자입니까?”

여전히 입매는 비틀린 채였다.

아뇨, 여기서 일면식 얘기가 왜 나옵니까?

리벨은 단호하게 답했다.

“아뇨.”

그러자 디란타 대공은 검을 마저 뽑았다.

리벨이 기겁했다.

“잠시만요!”

귀족이란 여유를 아는 자들이다.

하지만 리벨의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멀쩡한 사람 하나 눈앞에서 죽어 나가게 생겼는데 여유가 문제냐!

그녀의 말에 대공의 검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이번에는 기사의 목 앞에서였다.

그가 리벨을 돌아보았다.

“누구인지 기억나셨습니까?”

아뇨, 모르는 사람인데요.

하지만 리벨은 그렇게 대답했다간 기사의 목이 날아갈 거라는 걸 직감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것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려고 하는 것이다.

리벨은 처음으로 조금 소름이 돋았다.

대공이 무미건조한 사람이라는 건 원작에서 봐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피를 보려는 사람이라니, 두려움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임기응변을 살렸다.

일단 살리고 보자.

“이대로면 제 드레스에 피가 튈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목 날리지 말고 그냥 갑시다!

“…….”

그녀는 나름 반짝이는 눈으로 대공을 쳐다보았다.

―펄럭!

그러자 대공은 말없이 제 제복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아, 아냐! 이런 친절함 필요 없어!

“그리고 피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서…….”

피 냄새는 기자 일 하면서 많이 맡아 봤지만, 귀족 영애 리벨 이벨라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 뒤에야 디란타 대공은 검을 거두었다.

“갈까요.”

캉! 바닥에 검이 그대로 박혀 들어갔다.

리벨은 눈이 튀어 나가는 줄 알았다.

아니, 검날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바닥이 무슨 푸딩도 아니고 칼이 저기 박혀 들어가?

방금 검을 잡았던 손이 리벨에게 내밀어졌다.

디란타 대공은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어머니께는 이미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요컨대 기다리게 할 셈이냐는 소리죠?

아뇨! 제가 미쳤습니까?

리벨은 그의 손을 빠르게 잡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간 애꿎은 기사 목 하나만 날아가는 걸로 그치진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곳은 그 황태후 폐하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분을 기다리게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얼른 가요.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죠.”

리벨은 그 말을 뱉고 나서야 얼렁뚱땅 황태후 폐하께 인사드리러 간다는 계획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람 목이 왔다 갔다 하니 그럴 법도 했다.

그녀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하얗게 질렸다.

*  *  *

“세상에, 내 아들.”

황태후 리엔.

현 황제 옆에서 그의 황권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인물. 황제가 폭군이라는 평가는 이 리엔 황태후 덕에 파묻혀 버렸다.

그만큼 황태후의 악명이 높다는 소리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을 빠르게 쳐 내는 손속과 결단력으로는 특히 더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리벨의 눈앞에서 웃는 사람은 그저 한 아들을 둔 어머니였다.

“얼마 만이야, 이게.”

리엔이 디란타 대공에게 빠르게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대공은 짧게 인사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통보를 했다.

“제 아내입니다.”

아니, 이렇게 다짜고짜 소개를 한다고?

리벨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삼박자로 울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