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추? 추??? 추해? 누가? 내가? 리벨은 순간 창문 밖으로 주먹을 날릴 뻔했다.
얼굴만 봐도 올랐던 혈압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지금 누구 앞에서 자기소개하는 거야, 응?”
리벨이 씹어 뱉듯 말했다.
그러자 다시 롤란드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그러고는 한숨을 쉬더니, 베니카의 이마에 쪽 키스했다.
자꾸 치명적인 척하지 마라! 꼴불견이니까!
“우리 베니카가 허락했으니, 오늘은 내가 비켜 줄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돌아섰다. 그러다가 멈춰 섰다.
“아, 그리고.”
그가 리벨을 돌아보며 그녀의 성질머리에 불을 붙였다.
“앞으론 너무 그렇게, 사람 감정 앞서 해석하지 말고.”
“뭐라고?”
뭐라고, 인마? 리벨은 정말 간신히 뒷말을 삼켰다.
“특히, 결혼 얘기 말이야.”
롤란드 디엘렌이 빙그레 웃었다.
“앞서 해석?”
리벨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롤란드는 뻔뻔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하고 진담은 구분해야지.”
그래서 지금까지 농담이었다?
미혼인 귀족 영애 집에 들락거리면서 어쨌든 농담이었다?
사랑한다면서 결혼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자고 미래 다짐까지 했지만 어쨌든 농담이었다?
리벨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에도 인터뷰한 거 있던데……. 혹시 다른 남자가 농담한 거 또 착각하는 거 아니지?”
신이시여, 그냥 저놈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지옥 불에 바비큐 해 먹으면 그게 그렇게 별미라 하더라고요, 예?
“같은 망신을, 두 번 당할 생각은 아니지?”
“허허.”
리벨은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뇌가 없다는 건 알겠다.
“혹시 이번 기사에 의전원 사진 같이 실린 건 못 봤어?”
“……의전원?”
롤란드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못 본 게 분명했다.
이놈, 또 안 보고 소문만 듣고 와서 조잘거리는 거지?
하긴, 롤란드 디엘렌은 활자를 10분도 쳐다보기 싫어하는 놈이었다.
새삼 콩깍지를 벗고 보니 이놈이 얼마나 한심한 놈인지 보였다.
‘…….’
문득 리벨은 신문을 보던 시스테인의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늘 업무에 휩싸여 있는 그는, 입만 터는 롤란드 디엘렌과는 달리 진중하고 과묵한 남자였다.
‘시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 그때 잠깐 통했던 감정들.
그런 걸 생각하면 어쩌면, 롤란드 디엘렌 같은 쓰레기보다 짧은 시간 만난 그와 더 진심을 나눴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때였다.
“어쨌든, 다음에 또 보자.”
좀 당황했는지, 롤란드 디엘렌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멍청한 새X.
리벨이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저걸 확 뒤통수에 칼을 박아 버릴 수도 없고.”
그 말에 나인이 불쑥 답했다.
“가능합니다.”
“뭐가?”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순간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철컥.
그러다가 나인의 소매에서 단도가 나오자 리벨은 뒤늦게 기겁했다.
“아아아니야.”
진짜 박는다는 건 아니고! 난 문명인답게! 해결할 거야!
말조심, 말조심! 리벨은 다시 한번 속으로 되새겼다.
“저대로 둘까요?”
나인이 다시 단도를 집어넣으며 물었다. 뭔가 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머리에 단도를 박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거든.”
원래 누구든 털어 보면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게다가 리벨은 무려 롤란드 디엘렌의 약혼녀였다. 그는 부인했지만, 분명히 한동안 그러했다.
“좋은 방법이라시면……?”
나인이 작게 되물었다. 리벨이 씩 웃었다.
“디엘렌 가에서 뭘 하는지 대충 알아.”
그리고 디엘렌 가와, 불량한 자들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도 얼추 알고 있었다.
콩깍지 씌었을 때야 몰랐지만, 벗으니 비로소 제대로 보였다.
저놈이 바로 특종감이라는 사실을.
“아무래도 일 나가야겠다.”
리벨이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목을 풀었다.
요즘 식사도 잘했겠다, 한번 힘 좀 제대로 빼 줄 때였다.
* * *
다음 날 낮.
원래 잠입 취재를 나가는 날에는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리벨은 이것저것을 챙기면서 생각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오늘은 무슨 모습으로 나가지?”
이 세계에 빙의하자마자 이 세계의 언어와 함께 자연스럽게 알게 된 능력.
외모를 바꾸는 마법.
조상님 중에 마법사라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잠입 취재 자주 나가는 기자 후손 입장에선 땡큐였다.
“남자 모습으로 나갈까?”
아냐, 이건 최근에 썼지, 참.
롤란드 그놈의 바람 현장을 목격한…… 그날에…….
리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자 모습이 낫겠어.”
무엇보다 이번에 조사할 건 디엘렌 가였다.
정확히는 디엘렌 가의 ‘일꾼’에 대해서.
그들은 디엘렌 가의 기사단은 아니었지만, 롤란드 디엘렌과 자주 접촉하는 자들이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우리 예쁘고 사랑스러운 리벨은 알 필요가 없는 자들이에요.’
“으으아아악!”
리벨은 그때 당시의 롤란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가 비명을 질렀다.
귀도 뇌도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아! 으아악!
그때야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갔지만, 콩깍지를 벗고 보니 아무리 봐도 수상한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솎아내고 영지민들을 안전하게 해 주는 게 영주의 일인데, 그놈은 뭔가 다른 것을 꾸미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
변신할 모습을 정한 리벨이 눈을 감았다.
마법사가 아니라 그냥 ‘마법 능력’을 가진 것이라 그런가, 그녀가 변신할 수 있는 모습은 세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저번에 썼던 평범한 남자 모습, 하나는 이 탁한 흑발의 여자 모습,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은발의 화려한 여자 모습.
비록 자줏빛 눈동자는 안 바뀌고, 2시간 후면 변신이 풀려 버리지만 이것만으로도 잠입 취재에는 차고도 넘쳤다.
“옷은 이런 거면 될 것 같고.”
그녀는 옷장에서 평민 여자들이 입는 가벼운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귀족들의 옷은 쓸데없이 비싸서 집에서 입으려고 많이 사 둔 것들이었다.
“아, 이건 롤란드가 아는 옷이지, 참.”
물론 주도면밀하게 그가 모르는 옷을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문제가 있는데. 리벨은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다.
모습 바꾸고 나가도 괜찮을까?
나인이나 다른 황태후 폐하의 기사들은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지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취재를 간다는 말에도 놀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모르는 놈이다! 하면서 나인이 칼이라도 던졌다간 이쪽은 그대로 쓱싹이었다.
―달칵.
리벨이 슬쩍 문을 열자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준비되셨습니까?”
나인은 놀라지도 않았다. 리벨이 눈을 깜빡이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능력에 대해서는 함구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대공 전하께도요.”
그럼 그렇지, 역시 알고 있었구나.
“으응.”
리벨은 슬그머니 문을 닫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취재에 필요한 걸 재차 점검한 리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인이고 다른 기사들이고, 호위이자 감시 역으로 이쪽에 붙은 게 분명했다.
“튈 생각도 없는데.”
혹시나 능력을 써서 튀려고 했다간, 그날 저녁에 바로 황태후 폐하의 안주거리로 춤을 추다가 죽게 될 터였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리벨이 문을 벌컥 열었다.
“좋아, 가자.”
“어디로 가십니까?”
“디엘렌 영지. 아.”
리벨은 주변을 슬그머니 살폈다.
“오늘 나가는 건 이벨라 자작도 대공 전하도 알면 안 돼.”
그녀는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움직임에 주의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좋아……. 그에게 주의를 준 리벨은 발소리를 죽여 저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스테인이 갑자기 자작저에 나타날 것도 아니고, 자작만 조심하면 된다.
―타탁.
저택 본관을 멀찍이 벗어나 담장 뒤에 바깥에 몸을 기댈 때까지, 리벨은 숨소리까지 죽이고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았다 뜬 순간이었다.
“어어어엄마야.”
리벨은 제자리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인과 다른 기사들이 앞에 나타난 탓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대공비 전하의 안전을 지키란 명이십니다.”
나인이 대표로 말했다. 리벨은 볼을 긁적였다.
물론 안전해지는 건 좋다.
리엔 폐하와 이야기했을 때에도 마음껏 기사들을 부려먹으라고 하시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데!
리벨은 그들의 기사단 제복을 가리켰다.
“혹시 그 복장으로 잠입 취재를 하려―”
―스스슥.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기사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아니, 어디 간 거야?”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리벨이 두리번거려도 그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뭐 들키는 것보단 혼자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지.”
복장 때문에 이럴 줄은 몰랐지만 안 따라오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리벨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호위하겠습니다.”
다시 나인과 기사들이 뿅 나타났다.
이번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아니, 그건 어디서 난 거야?”
그 말에 나인이 로브 후드를 벗어 보이며 답했다.
“항시 휴대합니다.”
“?”
리벨은 로브 목 안쪽으로 보이는 기사단 제복을 한참 쳐다보았다.
저 제복 어디에 로브를 넣을 공간이 있단 말인가? 제복 뒤에 공간 있어요?
“……아무튼 가자.”
풀리지 않을 의문은 접는 게 나았다.
“그런데 자작이 대공비 전하의 부재를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그때 나인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괜찮아. 자주 나갔거든.”
“예?”
“그놈은 파블로프의 개 같은 놈이라서 내가 나갔다 들어오면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놈이라, 없어진 거 알고도 기뻐할걸.”
그놈이란 호칭에 멈칫한 것도 잠깐, 나인이 되물었다.
“파블로프란 자가 그를 거둔 것입니까?”
“…….”
아, 여긴 파블로프의 개가 뭔지 아는 사람이 없지.
리벨은 대충 대꾸했다.
“아니, 그냥 개 같은 놈이라고.”
“아.”
나인은 쿨하게도 파블로프가 누군지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얼렁뚱땅 리벨의 화려한 잠입 취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