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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20)화 (20/167)

제20화

리벨이 먼저 간 곳은 이벨라 영지의 시장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마차를 타고 갔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폐하께서 취재를 나갈 때마다 보태 드리라 이르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주어진 금화 주머니를 보고 리벨은 계획을 변경했다.

이렇게 많은 지원금이 있으면 계획을 좀 더 세부적으로 짜도 되니까!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보따리를 슬슬 풀어냈다. 그리고 과일 상점으로 다가갔다.

“음…… 맛있겠다.”

때마침 싱싱한 과일들이 막 진열되고 있었다.

리벨은 그중에서 탱글탱글한 알을 뽐내는 포도를 십수 송이 골라냈다.

“아니, 젊은 처자가 이렇게 포도를 많이 사 가서 어디다 쓰려구?”

과일 가게 주인 여자는 그런 그녀를 보며 멈칫했다.

이렇게 한 번에 사 가면 사재기해서 되파는 놈은 아닌가 의심하게 되기 마련이다.

리벨은 그것에 대비해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아, 제가 동생이 일곱 명이거든요…….”

그녀는 곤란한 듯 고개를 숙였다.

“오메메, 일곱?”

“네. 근데 막내가 이번에 배탈이 났는데 딴 건 못 먹어도 포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리벨은 곤란한 얼굴로 포도를 쳐다보았다.

“너무 많이 사 가면 곤란할까요?”

“아니아니, 난 또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지. 딱하기도 해라.”

과일 가게 주인은 그녀에게서 보따리를 아예 채 가 버렸다. 그리고 손수 포도를 담아 주기 시작했다.

휴, 일이 좀 쉽게 풀릴 것 같다.

거짓말하는 건 죄송하지만 제값도 치를 거고, 비싸게 되팔아서 이득 볼 생각도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잠깐 양심에 기도한 리벨이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이 사 가면 상점 분들이 좀 오해하시더라고요. 어디 가서 되파는 건 아닌가 하고…….”

리벨은 배를 최대한 홀쭉하게 집어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들이랑 나눠 먹으면 몇 알 못 먹는데…….”

“입이 몇인데 당연하지. 아이고, 우리 집에선 더 사 가도 돼. 아니, 그런데 부모님은 어쩌고?”

과일 가게 주인은 포도를 열심히 담으며 물었다.

부모님 이야기에 리벨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도박하시느라 저희한텐 신경도 안 쓰시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염원을 담아 말을 맺었다.

“그러다가 도박 스트레스로 돌아가셨어요.”

그녀의 말에 바쁘게 움직이던 과일 가게 주인의 손이 멎었다.

“저런, 쓰레기 같으니.”

아무래도 도박하는 남편을 둔 모양인지 그녀의 욕은 아주 시원했다.

묵은 속이 내려가는 느낌입니다, 아주머니!

리벨이 속으로 엄지를 척 올리는 동안, 과일 가게 주인은 과일을 이것저것 더 챙겨 주었다.

“여기, 동전 여덟 개요.”

“아이고, 식비도 많이 들 텐데 제값을 다 주면 어째.”

“이야기 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서요.”

해맑게 웃은 리벨이 과일 보따리를 짊어졌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응, 다음에 또 오고!”

과일 가게 주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리벨을 배웅했다.

“평소 같으면 이런 방법은 못 쓰는데.”

과일 가게에서 멀찍이 떨어진 리벨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렇게 많은 과일을 사고도 많은 금화가 남다니.

“대체 얼마야, 이거?”

리벨이 주머니를 뒤적거릴 때였다. 그녀의 짐을 대신 든 나인이 답했다.

“오십 골드입니다.”

“오십 골드……?”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고료보다 많은데?”

이거 안 하고 그냥 지원비만 받아도 되는 거 아니냐?

설마 그 리엔 황태후 폐하께서 쪼잔하게 남은 돈을 회수하시진 않을 것 같고?

이렇게 뜻하지 않게 날로 먹는 인생이 시작되는 건가?

“재미있는 기사를 기대하고 계신다고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리벨의 달콤한 꿈은 3초 만에 박살 났다. 리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옙.”

그럼 그렇지. 취재나 하자.

어차피 디엘렌 가는 제대로 한번 털려고 한 곳이었다.

콩깍지 벗겨지고 나니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거든.

“그럼 다음은 이쪽으로!”

리벨이 손짓했다. 그녀의 뒤를 수많은 그림자가 따랐다.

*  *  *

“마차 하나만요. 아, 디엘렌 영지까지 갈 거예요.”

리벨이 다음으로 들른 곳은 이벨라 영지의 마차 대여소였다.

“디엘렌?”

마차 대여소의 소장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동안 리벨은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별로 멀지도 않은 곳이니 은화 1개 정도면 충분하겠지?

“은화 다섯 개.”

“?”

리벨이 눈을 깜빡거렸다. 소장은 그녀에게 털이 부숭부숭 난 손을 내밀었다.

리벨이 예쁘게 웃었다.

“옆집은 은전 한 개면 빌려주시던데, 요즘은 시세가 다섯 배나 뛰었나 봐요?”

“…….”

평민 옷을 입은 리벨이 시세에 정통할 줄은 몰랐는지 소장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그는 몇 번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아가씨께는 특별히 좋은 마차를 드리려고 했지.”

“오.”

리벨은 영혼 없이 감탄한 다음 마차들이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하나같이 낡아 빠진 마차가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저 마차 중에 어떤 게 특별한 거죠?”

내 눈엔 다 꼬라지가 비슷해 보이는데? 응?

리벨이 다시 웃자 소장은 결국 뭐 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은화 한 개.”

“좋아요! 바가지는 씌우지 맙시다!”

리벨은 은화 1개를 주고는 돌아섰다.

“마차는 이거고.”

소장은 불량하게 마차 앞으로 그녀를 안내해 주었다.

“넵, 수고하세요!”

리벨이 마차에 올라탔을 때였다. 소장이 씨익 웃었다.

“마부 고용은 은화 네 개다!”

“?”

리벨은 다시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이 아저씨가 끝까지 안 지려고 하네?

원래 마차에 마부 고용비까지 포함해 은화 1개면 충분했다.

평민들의 1주일 생활비가 동전 10개, 즉 은화 1개니까 이것도 비싼 거였다.

리벨은 팔짱을 꼈다.

“그럼 마부 안 써요.”

소장은 어이없어했다.

“그럼 아가씨가 말 몰 건가? 응?”

그가 마부석을 가리켰다.

아니, 그럴 거면 말 탔지…….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리벨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전 마부가 따로 있어서.”

리벨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인 군? 설마 취재에 외부인 마부 쓰게 할 건 아니지? 응? 마차 모는 법은 아는 거지?

리벨이 주변을 재차 둘러볼 때였다.

“아, 여기 있었군요, 누님.”

갈색 반팔에 녹색 조끼를 입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평민 남자의 모습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어어어, 맞아.”

목소리 아니면 못 알아들을 뻔했다!

평범한 모습으로 분장한 남자의 목소리는 분명 나인의 것이었다.

아니, 무슨 마법 뺨치게 분장을 해?

황태후 폐하의 그림자들이 변신술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긴 못 들어 봤는데?

“그럼 제가 몰겠습니다.”

리벨이 당황하는 사이 마부석에 나인이 훌쩍 올라탔다.

소장의 표정이 더욱 떫어졌다.

리벨은 그 꼴을 보고 씩 웃었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지!

“마부는 안 사요! 그럼 이만~”

리벨은 들으란 듯이 크게 말하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  *  *

―히히힝!

마차는 빠르게 달려 디엘렌 영지로 향했다.

리벨은 중간에 창문을 열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인 경, 땡큐!”

그녀가 외치는 사이 마차 옆으로 다른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다들 시장에서 한두 번쯤은 봤을 것 같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햇빛이 강해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마부를 제거하기보단 데려가지 않는 쪽을 선택하시다니, 역시 현명하십니다.”

그때 말을 타고 쫓아오던 자들 중 하나가 불쑥 말했다.

당연히 나인 목소리였다. 리벨은 기겁했다.

아니, 마부 역할 아니었어? 언제 말에 탄 거야?

천을 걷어 보니 마부석에는 다른 기사가 앉아 있었다.

“아니 뭐…….”

그런데 뭐? 제거? 현명?

본의 아니게 현명해진 리벨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잠깐 멍해진 그녀의 머릿속에 팩트가 들어왔다.

마부 데려오면 쓱싹할 생각이었냐!

하긴, 잠입 취재는 접촉하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긴 했다.

아니, 그래도 무슨 곰팡이도 아니고 사람을 그렇게 싹싹 제거하면 곤란한 거 아니냐?

“휴.”

리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님, 오늘도 한 명 살렸습니다.

그녀는 과일이 상하지 않게 과일 보따리를 마차 한쪽 구석에 잘 고정해 두었다.

저것들은 오늘 잠입 취재에 도움이 될 터였다.

계획을 천천히 되새겨 본 리벨은 문득 움찔했다.

“잠깐.”

이건 말해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창문 너머의 나인을 돌아보았다.

“오늘 좀 험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거든?”

나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

생각해 보니 좀 위험할 것 같기는 했다.

잘하다가 일 커지면 제도기사단까지 내려올 수도…….

리벨은 눈썹을 꿈틀했다.

그럼 변신한 채로 시스테인 경이랑 현장에서 마주치는 건데.

“…….”

그녀의 머릿속에서 현란한 레드 라이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절대 시스테인 경은 안 된다!

그가 보던 신문 한쪽 구석이 구겨져 있던 걸 생각하던 리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결혼 생활 내내 그 사람한테 안 들킬 수 있을까?

……나, 기자 활동명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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