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그간의 커리어를 포기하는 건 굉장히 아까웠지만, 어차피 그 커리어의 시작도 결국은…… 시스테인의 기사 때문이니까…….
리벨은 이마를 짚었다.
왜 우리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을까? 이래야만 했을까?
하필 왜 내가, 하필 왜 시스테인을, 하필 왜 고자라고 했어야 했을까?
물론 그건 그런 기사를 쓰게 강요한 전 편집장만 알 노릇이었다.
그놈을 확! 내가 확 그냥! 리벨은 주먹을 떨며 눈을 떴다.
“대공비 전하?”
나인이 그녀를 다시 불렀다. 리벨은 목을 다시 가다듬었다.
“흠흠. 여하튼 혹시 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막 사람들 쓱싹하면 안 돼.”
이 말 미리 안 해 두면 피 볼 것 같았다.
그럼 제국 기사단에 연락이 갈 거고 당연히 기사단장인 시스테인 경 귀에…….
NO! NOOOOOOOOO!
“절대 안 돼, 절대.”
리벨이 재차 강조하자 나인이 심각하게 되물었다.
“감히 대공비 전하 되실 분을 건드린 자들을 내버려 두란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내가 대공비 전하 모습이 아니잖아.”
리벨은 평민의 모습으로 변한 자신을 가리켰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감히 그런 짓을 한 자들을―”
“어차피 걔네들도 다 나중에는 벌 받게 돼 있어.”
리벨은 나인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기사 제대로 쓰면 벌 받을 건 당연한 일이니 굳이 이쪽에서 손을 써서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는 없었다.
“여하튼 내가 정말 급해서 ‘살려 줘!’ 외치기 전엔 나오기 없기야. 알았어?”
그 말에 나인은 짧게 침묵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생명에 위협이 있으실 때에는 즉시 난입하겠습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인 리벨이 마차의 창문을 닫아 버렸다.
―탁.
전생 현생 통틀어서 이렇게 화려한…… 아니, 조마조마한 잠입 취재는 처음이었다.
오늘의 목적.
1. 잠입 취재 성공하기.
2. 시스테인 경 귀에 안 들어가게 곱게 좋게 부드럽게 처리하기.
2번이 제일 중요했다. 명줄을 위해서는 그러했다.
리벨은 푸른 눈으로 신문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시스테인을 떠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깊이 있는 눈동자였지만 그때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적어도…… 벨 기자를…… 가만히 두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만큼은.
리벨은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만났냐고!”
결국 작게 외치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리벨이 부릅니다…… 잘못된 만남.
* * *
리벨이 디엘렌 영지에서 가장 큰 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막 낮 시장이 열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어디 보자…….”
리벨은 주변을 살피다가, 빈 곳에 슬그머니 가판을 폈다.
옆에는 디엘렌 영지 경계를 통과할 때 ‘상인’으로 출입을 허가받으며 받았던 패를 걸어 놓은 채였다.
그럼 디엘렌 영지 어디에서든 상업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건 오늘만 허가되는 하루짜리 패였지만 이걸로도 충분할 터였다.
―펄럭!
천을 펼치고 위에 과일을 늘어놓은 리벨이 사과 몇 개를 앙증맞은 토끼 모양으로 썰어 그릇에 담았다.
비록 하루짜리 장사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건 매너잖아?
그런 핑계로 리벨은 상인들에게 씩씩하게 다가갔다.
“어어…….”
다른 시장의 상인들이라면 반갑게 반겼을 텐데, 이곳의 상인들은 그녀가 다가오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예상대로다.
역시 뭔가 있는 거다.
“이거 하나라도 드시고 일하세요! 날이 덥죠?”
리벨이 토끼 사과를 내밀며 묻자, 바로 옆자리 가판대의 남자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그, 고맙네. 근데…….”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 법!
싱글벙글한 얼굴로 사과를 들이대니 결국 남자는 사과를 받아 들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근데 거기 자리 편 건가?”
그의 손끝이 리벨의 가판대를 가리켰다.
“아, 혹시 아저씨 자리예요?”
리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건 아니고. 시장 바닥에 자리가 어딨…… 아니, 뭐, 그래, 아냐.”
남자는 더듬더듬 말하면서 가판대를 슬그머니 옆으로 밀었다.
그녀에게서 떨어지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여하튼 오늘 장사 힘내세요!”
리벨은 그걸 보면서도 모른 척 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상인들에게도 사과를 나누어 주었다.
“저, 저도 주시는 건가요?”
“받을 테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가요.”
상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외부인을 꺼리는 건가, 싶어도 그건 아닐 터였다.
그럼 시장에 오는 손님은 늘 아는 사람만 오게?
리벨이 원하는 정보는 일곱 번째로 만난 상인에게서 나왔다.
잡화점을 하는 여자는 사과를 받아 든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과 고마워요. 그런데 여기 이번에 처음 오시는 거예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리벨은 용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처 작은 영지에서 왔어요! 직접 수확한 과일들인데 이번에 풍작이라 조금 가져다 팔려고요!”
리벨의 말에 여자가 곤란해했다.
“아……, 그럼 여기는 안 될 텐데.”
“혹시 외부인은 장사하면 안 되나요?”
리벨의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상인 패만 받으셨다면 가능하죠. 그런데…… 앗!”
말을 잇던 여자는 뭔가를 발견한 듯, 재빨리 잡화점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리벨이 의아함에 뒤를 돌아봐도 시장을 오가는 손님들과 시끄러운 상인들의 외침뿐이었다.
그래도 뭔가 수상한 일이 일어나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리라.
리벨이 씩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 * *
“아가씨, 이거 다 사면 얼마야?”
웬 껄렁한 놈 하나가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싶었다.
정상적인 손님이 몇 번 과일을 사 가고 난 후의 일이었다.
“다 사시면…… 어디 보자…….”
리벨이 가격을 세는 사이, 껄렁한 놈은 다섯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자세로 삐딱하게 선 채, 리벨의 가판대를 둘러쌌다.
그리고 각자의 무력을 열심히 어필하기 시작했다.
목을 뚜둑 꺾는 식상한 놈부터 손을 털어 대는 놈까지 여러 가지였다.
이…… 익숙한 레퍼토리는?
리벨이 눈썹을 꿈틀거릴 때였다.
“응? 이거 아주 사과가 맛있어 보이는데. 얼마냐고.”
처음 왔던 껄렁한 놈이 두 손으로 사과를 꽉 쥐었다.
―파삭!
그리고 사과를 으스러뜨려 버렸다.
여기서 갑자기 돈도 안 내고 차력쇼 관람을?
리벨은 놀란 걸 굳이 감추지 않았다. 대신 달달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 동전 하나면 세 개…… 드릴 수 있는데…….”
그녀의 말에 껄렁한 놈이 손을 툭툭 털었다.
“뭐야, 난 하나만 먹었는데 그럼 얼마야?”
리벨은 여전히 떠는 척 말했다.
“세, 세 개 단위로만 팔아요.”
남자는 그 말에 표정을 확 구겼다.
“이야, 이거 완전 강매 아니야? 난 하나만 사고 싶은데 세 개를 묶어서 팔아?”
쾅! 남자가 발을 굴렀다.
“나 같이 돈 없는 사람은 억울해서 쓰나, 어!”
누가 봐도 시끄러운 상황이었지만 주변 상인들은 마치 리벨이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리고 시장의 손님들도 절반은 그들을 무시하고, 절반은 무서워하면서도 상인들의 괜찮다는 말에 후다닥 물건만 사고 도망치고는 했다.
바쁜 틈에 제대로 흥정도 하지 못한 손님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불만을 터뜨리기보다 도망치기 바빴다.
“포도는 얼마야?”
그러는 사이 남자는 리벨의 가판대 과일을 하나씩 툭툭 건드려 보기 시작했다.
―똑!
그러다가 포도 알갱이를 하나 따서 입에 집어넣었다.
“토마토는?”
퍽! 토마토는 먹기 싫었는지 바닥에 패대기쳤다.
“꺄악!”
리벨은 소리를 질러 주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상인들에게서는 적어도 자신이 타깃이 될 거라는 공포라도 느껴져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자신들에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이래서 여기 있지 말라고 한 거구만.
리벨은 잡화점 주인을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이건 동전 하나고, 이건 두 개에 동전 하나…….”
그사이 답을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캬…… 이걸 다 팔아 봐야 동전 여덟 개밖에 안 된다는 거네? 응? 아가씨.”
가격을 하나하나 다 들어 본 남자가 껄렁거리면서 물었다.
그러고는, 가판대의 천 끝을 꽉 그러쥐었다.
“이딴 푼돈거리 왜 팔고 있어! 엉?”
―펄럭!
남자의 힘찬 소리와 함께 과일들이 하늘로 비산했다.
정말 드라마틱한 장면이었다.
“꺄악!”
리벨은 다시 한번 비명을 질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쾅!
껄렁한 놈들이 다시 센 척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발을 구르며 말했다.
“자, 아가씨. 시장엔 전통이란 게 있고, 전통은 누구든 따라야 하는 것이지. 안 그럼 눈치가 보여, 안 보여?”
어떻게 협박하는 불량배들은 세계를 막론하고 레퍼토리가 이렇게 똑같단 말인가?
리벨은 소리 없이 감탄하며 대꾸했다.
“보, 보여요.”
그녀의 답에, 남자가 사과즙 묻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 시장의 전통이 무엇이냐. 봐라, 저기 아저씨도 냈고.”
불량배는 아까 리벨의 사과를 받은 바로 옆 가판대 남자를 가리켰다.
“저어기 천 파는 할머니도 냈고, 저번까지 이 자리에 있던 놈도 낸, 자릿세라는 게 있다.”
불량배가 꼴에 근엄하게 말했다.
설마하니 정말 자릿세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