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롤란드 백작 영식에게는 복수할 생각이지?”
그 질문을 받은 리벨은 고민도 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놈 잘 사는 꼴을 이 두 눈 뜨고 어떻게 봅니까?
“물론이에요.”
리벨이 가볍게 답하자, 시스테인의 시선이 리벨에게 꽂혔다.
‘이용’이란 단어에 유독 신경 쓰던 그를 떠올린 리벨은 슬그머니 덧붙였다.
“결혼 생활과는 별개로요.”
그 말에 시스테인의 시선이 거짓말같이 다시 식탁으로 내려갔다.
자신을 이용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처럼 무심하게 말하더니, 그건 아니었던 걸까.
리벨은 그의 머릿속이 조금 궁금해졌다.
“결혼 생활과는 별개라…….”
리엔 황후는 그 말에 빙그레 웃었다.
그녀에게 그 말은 아마 ‘그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시스테인에게는 다르게 들릴 터다.
“네, 복수와 앞으로의 제 삶은 확실히 별개라고 선을 긋고 싶어요.”
리벨은 그것만큼은 다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저번에 했던 이야기가 단순히 분위기를 타서, 단둘이 있었기에 한 빈말이 아니란 걸 말해 주고 싶었다.
시스테인에게, 이 결혼을 자신이 이용한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았다.
“…….”
말을 끝낸 리벨은 시스테인을 흘끗 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얼굴로 식사하고 있었다.
좀 더 고개를 들면 표정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근래 며칠간 아주 가까이에서 그를 살피면서, 그가 극도로 표정을 감춘다는 걸 알게 된 리벨이었다.
하지만 감춘다는 건, 결국 무언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가 무덤덤하게 짓고 있는 가면 같은 표정 아래에, 그의 진짜 감정이 가려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감질날 정도로 아주 잠깐씩 보였다.
말없이 식사하는 그의 금빛 머리칼에 방 안의 옅은 주홍빛 조명이 비춰져 반짝였다.
흠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식사하는 그는 하나의 조각상 같았다.
아마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의 짙푸른 눈동자는 단정하게 가라앉아 있으리라.
“호오.”
리벨이 그를 멍하니 보는 사이, 리엔은 그녀를 보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어떻게 복수할지는, 생각해 두었고?”
그 말에 리벨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 그건 제가 기가―”
―막힌 기삿거리를 하나 물어 놨거든요! 그거 하나만 터뜨리면 롤란드 놈 한동안 뒷목 잡고 침대에서 못 나올걸요!
라고 외칠 뻔한 리벨은 제 입을 고기로 틀어막아 버렸다.
하마터면 불어 버릴 뻔했다!
얼굴에 홀려서 불어 버릴 뻔했어! 리벨은 눈을 꽉 감았다 뜨면서 정신을 차렸다.
“기가?”
황태후가 되물었다.
하필 식사하던 시스테인마저도 식기를 움직이는 걸 멈추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위, 위기다!
리벨은 기자 생활로 다듬어진 언변을 총동원했다.
“기가…… 허해 가지고요.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
리벨은 애써 옅게 웃었다. 그냥 넘어가 주시지 그걸 또 왜 물어보셔 가지고!
그녀의 말에 리엔 황태후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피었다.
리벨은 그 미소를 보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일부러 캐물으신 거다! 내가 말실수한 거 알면서!
리벨은 똑바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포크를 꽉 쥐었다.
호랑이 굴에 물려 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고 했어!
여긴 호랑이 굴이 아니라 황가이며, 정신을 차린 사람들도 자주 모가지가 썰려 나가는 곳이란 사실은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다.
“방법은 슬슬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러면서 대사를 치는 것까지 성공했다. 잘했다, 장하다, 리벨!
리벨이 스스로를 칭찬할 때였다. 예상외의 천재지변(?)이 그녀의 뒷머리를 후려갈겼다.
“원하신다면 영지전을 요청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한 건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썰던 시스테인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리벨을 향했다.
“이 자리에서 요청한다면 인가받는 데에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리벨은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예? 영지전이요? 여기서요? 갑자기?
평범(?)하게 살던 소시민 입장에서는 하기 힘든 사고였다.
하지만 리엔 황태후에게는 익숙한 생각이었는지 그녀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역시 명예를 건 싸움에는 피가 흘러야 좋지 않겠니?”
―푸욱!
그녀의 칼끝이 레어 스테이크를 자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하필 그 말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를 드시면서 하셔야겠습니까?
리벨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 영지전은…….”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복수 방법이었다.
하지만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롤란드 디엘렌, 그 싹수 없는 놈의 뒤통수를 한 대, 아니 여러 대 후려갈겨 버리고 싶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상관도 없는 수많은 기사들을 전장으로 몰아넣을 생각은 없었다.
“싫어?”
리엔 황태후는 조금 실망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쪽 손을 펴 보였다.
“하긴, 영지전은 좀 그렇지?”
그녀는 다시 칼을 들며 말했다.
“파멸은 한 번에 주어져서는 안 되지. 점점 고통스럽게, 잃을 것을 모두 잃은 후에야 마지막에 끌어안고 있던 것을 빼앗는 것이 인간을 무너뜨리기에 가장 옳은 방법이란다.”
리엔 황태후의 파멸론이었습니다.
리벨은 분명 원작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들으니 머릿속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리벨은 피 냄새를 싫어합니다.”
그의 단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식사를 하던 방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리엔 황태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리벨을 돌아보았다.
“어머, 시스한테 말해 준 거야?”
그게 말하고 싶어서 말한 건 아니고……. 그런 설정(?)이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리벨은 진땀을 흘렸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 말씀드렸었어요.”
사실 애먼 기사 모가지 날아갈까 봐 급조한 설정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걸 기억해 주다니 섬세하기도 하지, 내 아들.”
리엔 황태후는 환하게 웃으며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그때쯤 되면 시선 한번 마주쳐 줄 만도 하건만, 시스테인은 제가 언제 말했었냐는 듯 다시 식사만 하기 시작했다.
―달칵.
그리고 그 침묵은 리벨 앞에 미디움레어 스테이크를 내려놓은 요리사의 손길에 깨지고 말았다.
무심코 리벨의 시선이 살짝 잘린 스테이크의 단면으로 향했다.
하필 이야기하던 중간이라 리엔과 시스테인의 시선 역시 같은 곳에 멎었다.
“…….”
시스테인이 서늘한 시선으로 요리사를 올려다보았다.
“대화를 듣지 못했나.”
물론 시종들은 이야기를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해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눈치껏 들은 척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바로 이런 경우.
“그, 무슨…….”
요리사는 그렇게 말하다가 뒤늦게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의 시선이 예비 대공비를 향했다.
잠깐, 이분이 피 냄새를 싫어하신다고?
그는 제 손 끝에 아직 걸쳐져 있는 접시를 보았다.
당연히 다 익지 않은 스테이크에서는 피 냄새가 날 터였다.
“죄송합니다!”
그가 접시를 번쩍 들었다. 예비 대공비께서 혹시나 피 냄새를 더 맡으실까 염려한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바짝 익혀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제발! 그러면서 그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
리벨은 그 뒷모습에 대로 아련하게 속으로 외쳤다.
아니야, 바싹 익은 스테이크를 무슨 맛으로 먹어!!!
물론 그걸 이 자리에서 할 순 없었다. 대신 그녀는 속으로 작은 소원을 빌 수밖에 없었다.
그…… 육즙만 안 빠지게…… 제발…….
그러는 사이 리엔이 혀를 찼다.
“아직 눈치 없는 아이가 남아 있었구나.”
요리사의 목숨 줄이 달랑거리기 시작했다. 리벨은 재빨리 손을 들었다.
“다 익은 스테이크가 너무 기대돼요.”
“아, 그러니?”
리엔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사의 목숨이 다시 선명해졌다.
리벨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리엔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나저나 복수하는 방법이라……, 그런 건 내게 묻지 그랬어.”
“네?”
다음 날 롤란드가 죽은 채로 발견될 것 같은데요? 그걸 황태후 폐하께? 리벨이 눈을 필사적으로 깜빡일 때였다.
리엔이 눈부시게 웃었다.
“내가 잘 가르쳐 줄 수 있었을 텐데.”
“…….”
“…….”
그 말에는 시스테인도 잠깐 식기를 멈추었다. 리벨은 진땀을 흘렸다.
그러게요, 전문가이시긴 하지…….
롤란드 모가지가 내일 성벽에 장식될 거라는 것만 빼면…….
리벨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아니, 잠깐만.
‘파멸은 한 번에 주어져서는 안 되지.’
그렇게 말했던 리엔 황태후였다.
그녀의 파멸론(?)에 따르면 정말 리엔에게 좋은 생각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혹시 여쭤봐도 될까요?”
그 말에 리엔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단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아예 식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여느 때보다도 해사하게 웃는 저 얼굴은!
“롤란드 디엘렌, 그 아이를 묻어 버리면 되지.”
“예? 묻어요?”
리벨은 순간 멍청하게 되물었다.
머리만 남기고요? 아니면 발끝만 남기고요?
그러는 동안에도 시스테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기를 썰고 있었다.
리벨이 눈을 크게 뜰 때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의 결혼 소식 말이야.”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아, 사람 말고 소식을……. 간신히 한숨 돌린 리벨이 간신히 어깨를 늘어뜨릴 때, 리엔이 손을 펼쳐 보였다.
“한낱 백작가 영식이 이슈가 되어 봐야.”
느긋하게 말한 그녀는 칼을 들어 고기 위에 서서히 문질렀다. 칼날이 닿은 곳이 살살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공가의 결혼식만 할까.”
―푸욱!
리엔은 들고 있던 칼을 고기에 찔러 넣었다.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말씀은…….”
그때 줄곧 조용하던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