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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32)화 (32/167)

제32화

“콜록.”

누가 황태후 폐하 아들 아니랄까 봐! 리벨은 마른기침 몇 번을 하다가 말했다.

“……네, 사실 제 본업은 기자입니다.”

이거 사실 비밀 아닌 거 아니야? 시스테인 경도 사실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 아니야?

리벨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근데 그게…… 대공비가 되면 활동하기 힘들거든요. 그런데 더 높은 권력을 가지게 된다면 당연히 더더욱 하기 힘들어지니까요.”

그 말에 카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때려치우면 되잖아. 시스테인이 돈 안 줘?”

원래 돈 많은 백수가 꿈이긴 했습니다만!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시스테인 경께서는 물론 제가 직업 없이도 잘 지내게 해 주시겠지만, 그, 제가 사교계에서의 귀족 영애로서의 의무에 익숙지 않아…….”

리벨은 사교계 언어를 쓰기 위해 힘썼다. 그 모습이 보였는지 카리스가 손을 휙 내저었다.

“지금부터 말 쓸데없이 꾸밀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을 자르겠다.”

아니, 미래의 동생 아내한테 이래도 되는 겁니까?

리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제가 사교계에서 하하 호호 하면서 남의 뒷담 까는 건 질색이거든요?”

하지만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직설적인 말에 카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싫어한다고 하더군.”

그거까지 이미 조사했냐고! 소름 돋았지만 그렇다면 이야기하는 건 쉬워질 터였다.

리벨은 결국 자신을 오픈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대공비가 되는 것도 모자라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면 당연히 사교계에서 하하 호호 떠들어야 하잖아요? 솔직히 기자 일 하면서 더러운 꼴 다 봤는데 귀족들하고 어떻게 제가 친해지겠습니까?”

아니, 너무 막말했나? 쏟아 놓고 보니 가관이었다. 리벨의 머릿속이 이번엔 새까매졌다.

하지만 카리스는 과연 리엔의 아들이었다.

그는 오히려 돌려 말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맞아. 귀족들은 더럽기 짝이 없지. 그래서 더 높은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카리스는 툭, 툭, 황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모르겠어. 무엇보다 넌 먹고살려고 기자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제 먹고살 걱정도 없어졌고, 무엇보다 기자 일을 계속해 봐야 시스테인한테 정체만 탄로 날 텐데.”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아무리 시스테인이 감정이 없다는 헛소문이 돌아도, 어릴 땐 그놈도 한 성깔 하는 놈이었어.”

어릴 땐 한 성깔 했다고? 이건 새로운 정보였다.

하지만 리벨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틈이 없었다.

황제가 턱을 괸 채 말을 이은 탓이었다.

“네가 벨인 걸 알고도 시스테인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기자 일을 계속하는 거지? 게다가,”

그가 손을 펴 보였다.

“시스테인과는 만난 지 이틀 만에 결혼을 결정했다지. 난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위 안 믿어. 시스테인이 너에게 함부로 손을 댔을 거란 생각도 안 들고, 그랬다 한들 너를 책임지겠다고 결혼하려 들 놈도 아니지.”

그가 황좌 끝에 걸터앉아 말을 이었다.

“게다가 기사단도 아니고 어머니의 기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동생보다도 어머니와 더 친한 것 같은 내 동생의 아내라.”

서늘한 살기가 내려앉았다.

“자, 털어놓아 봐. 너와 어머니 사이에 무슨 작당이 오가는지.”

이게 작당이라면 작당이고 아니라면 아닌데…….

리벨은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에요.”

“더불어서 기자들이 떠드는 것처럼 세기의 사랑도 아니겠지.”

카리스는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리벨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좀 어색하지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정도거든요.”

물론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감정을 감출 뿐이지. 리벨의 말에 카리스는 대꾸조차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어색한 관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롤란드 디엘렌이라는 자에게 파혼당한 날에, 시내에 있는 세이프티 바에 갔는데…….”

리벨은 시스테인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기억나는 대로 털어놓았다.

카리스는 당연히 어이없어했다.

“거기서 밤을 보냈다고?”

그 시스테인이?

“그러고 나서 바로 어머니께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고 했단 말이지.”

리벨의 말은 카리스가 언뜻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 그 시스테인이 아무리 술을 마셨기로서니 여자와 밤을 보냈다는 것부터.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이상한 건 바로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저도 대공 전하께서 왜 그러셨는지 정말 모르겠거든요?”

그러는 동안 리벨은 슬슬 입의 봉인이 풀리고 있었다.

편히 말하라고 했겠다, 모가지는 달랑거리겠다, 억울하긴 엄청나게 억울하겠다, 말이 줄줄이 새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사실 저랑 대공 전하랑 결혼해 봐야 대공 전하께서 손해잖아요? 전 처음에 디란타 가에서 무슨 복지 사업이라도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말도 안 되잖아요? 자기 혼삿길 막아 가면서 하는 복지 사업이 어딨어요?”

“그렇지.”

카리스는 진심으로 울분에 차 말을 잇는 동생의 예비 신부를 신기한 동물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처음엔 누가 사기 치는 줄 알고 초대도 무시했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아예 대공가 마차가 와서 절 픽업해 갔다고요!”

“그랬다고 하더라.”

“그런데 거길 갔더니 시스테인 경이 갑자기 어머니를 뵈러 가자면서 여기로 그대로 데려왔어요! 진짜, 믿기지 않겠지만 그러셨어요!”

리벨의 말은 정말 간절해 보였다.

카리스는 저 얼굴을 알았다.

대충 반역자들을 한 3시간쯤 고문하고 나서 목에 검을 댄 채 진실을 불어 보라고 하면, 그제야 제 모가지가 달랑달랑거린다는 걸 아는 놈들이 저런 얼굴로 술술 털어놓는다.

요컨대 그의 경험에 의하면, 리벨은 정말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꼴로?”

그가 리벨을 가리켰다.

시스테인, 그 무심한 놈이 당연히 드레스를 새로 사 줬을 리가 없으니 그녀의 옷은 낡은 드레스 그대로였다.

그것도 유행이 한 3년은 지난.

“……네.”

그때 당시가 떠오른 리벨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사실 황태후 폐하께서 바로 쓱싹하실 줄 알았는데…….”

“쓱싹?”

카리스가 되묻자 리벨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헉, 너무 막말했잖아!

“쓱싹이 뭔데?”

하지만 카리스의 흥미는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도 흥미롭기 그지없었지만, 그는 드디어 듣고 싶은 부분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지?

“그, 목을 이렇게, 네.”

리벨이 제 목에 대고 손날을 슥슥 그어 보였다.

“아, 죽일 줄 알았다고. 어머니께서 직접 베진 않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카리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리벨은 아련하게 웃었다.

황태후 폐하께서 직접 목을 베시나 그 휘하의 기사가 베나 날아가는 모가지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 아닐까요?

“그래서?”

“그런데 오히려 황태후 폐하께서는…… 저랑 거래를 하자고 하셨어요.”

“거래?”

카리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더러…….”

리벨은 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최고로 이상한 짓을 하라고 하셨어요.”

“?”

이상한 짓? 카리스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시스테인 경이 오래전부터 마음을 닫으셨다고, 감정을 다른 사람처럼 드러내길 원하신다고요. 근데 그걸 자극한 게 저뿐이었고, 그래서 시스테인 경을 계속 자극해 달라고 하셨어요.”

사실 이거 불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리벨은 필사적이었다.

황제 폐하께 모가지 날아가나, 황태후 폐하께 모가지 날아가나 시간 차 문제 아닌가?

그럼 일단 풀어놓을 건 다 풀어놔야 했다.

“대신 제가 벨인 건 눈감아 주시겠다고요.”

카리스는 리벨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한마디로 권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머니의 흥미란 말인가?

따지자면, 시스테인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

‘난 너희가 잘되는 것만으로도 기뻐.’

맨날 하는 그 되지도 않는 소리? 카리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 걸리고 싶으면 그냥 기자를 안 하면 되잖아.”

“근데 제가 기자를 해야…….”

리벨은 아련한 얼굴로 말했다.

“―시스테인 경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긴 그건 그렇지. 나도 그놈이 의자 집어 던졌다는 소리 듣고 놀랐어.”

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넌 기자인 걸 안 들키기 위해 기를 쓰고 있고, 시스테인은 모종의 이유로 너를 결혼 상대로 지목했지만 이유는 모르겠고, 어머니는 네가 이상한 짓을 하면 시스테인이 반응하니까 너를 옆에 붙여 뒀다?”

정리하고 보니 말이 좀 이상한데?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리벨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정답은 너한테 있는 게 아니네.”

카리스는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다.

“시스테인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가 관건이로군.”

탁, 탁. 그가 다시 팔걸이를 두드렸다.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시스테인 경은 정말 권력에 관심이 없어 보이세요.”

“그건 머리를 갈라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지.”

아니, 갈라 봐도 모를 것 같거든요?

“좋아. 네 말은 어머니 아랫것들을 좀 족쳐 보면 진실 여부를 알 수 있겠지.”

“관심이 있었으면 저랑 결혼한다곤 안 했을 거예요. 제 직업을 모르셨으면 더더욱, 이벨라 자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집안이니까요.”

“맞아. 밑천 하나 없는데 자작이 저택 담보로 도박까지 하고 있었다며.”

카리스가 무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 자작이 도박으로 돈…….”

잠깐, 저택 담보?

리벨은 순간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네? 저택까지요?”

카리스는 몰랐느냐는 듯 손을 펴 보였다.

“어. 니네 집 지금쯤 화장실 빼곤 다 다른 놈 소유일걸?”

벌써 거기까지 갔냐고! 아아악!

리벨은 머리를 싸맸다.

“기어코 이 인간이!”

“네 아비 욕은 나중에 하고.”

그때 서늘한 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앗. 리벨이 재빨리 머리를 감싼 손을 내렸다.

지금 집이 화장실 빼고 날아간 게 문제가 아니다! 내 목숨줄!

리벨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 여하튼, 시스테인 경이 황위를 노리셨으면 집도 화장실밖에 남지 않은 저보다는 좀 더 좋은 혼처를 찾으셨을 거라는…….”

멘탈이 날아가자 헛소리는 마구 튀어나왔다.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카리스는 결국 폭소했다.

“그렇겠지, 그건 그렇지.”

―탕탕탕!

그는 황좌 팔걸이를 내리치며 웃다가,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네 말은 잘 들었어. 네 어이없는 사정도 잘 알겠고. 물론 알아보고 거짓이 섞여 있다면 마차사고로 생을 하직하게 될 거야.”

아니면 어느 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든지.

그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의 행동도 기대할 테니, 잘 처신해 봐. 시스테인이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면 말려 주길 기대하지.”

그가 손짓했다.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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