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리벨은 근래 들어 만나게 되는 사람의 면면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물론 이 나라에서 세 번째로 귀한 신분의 대공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변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리고, 그 형인…… 황제 폐하를 뵙게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냐고!”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만남은 NOOOOO! 사절! 절대 사절!
물론 준비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리벨은 기습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황제 카리스가 어떤 사람인가?
황태후 리엔의 기행이 너무 대단해 묻혔을 뿐, 그의 사고회로도 정상인의 것은 아니었다.
원작을 읽을 때, 리벨은 황제를 솔로몬이라고 불렀다.
똑똑해서가 아니고……. 그의 해결법은 늘 기상천외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잘라. 팔이 아프면 팔을 자르면 되지.]
기적의 의료법을 선보이는 그의 명대사는 이거였다.
[동부 지방에 반역의 기미가 있다고? 그럼 동부를 싹 불태워. 알아서 반역자들을 갖다 바치지 않으면 내세는 장작더미에서 시작될 거라고 전해.]
초가삼간을 태워 버리는 그의 화력(?)은 반란 초기 진압에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했다.
리엔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 즐긴다면, 이쪽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제게 위협되는 사람은 모조리 죽이는 피의 황제.
그런 그에게 불려 간다는 게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동생 연애 생활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시는 건 아닐 테고…….”
아니, 관심이 없진 않겠지.
그래도 시스테인은 현 황제인 카리스가 죽으면 차기 황제가 될 적통자였으니까.
하지만 리벨이 알기로 시스테인과 그의 사이는 원만했다.
물론 원작은 시스테인의 로맨스…… 아니, NO맨스판타지가 주류인 내용이었으므로 황제의 내면에 대해 제대로 서술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막 기 싸움 했다는 서술은 없었는데?
리벨은 머릿속을 볶아 대며 알현실 앞에 섰다.
“폐하, 리벨 이벨라가 폐하를 뵙고자 청합니다.”
옆에 있던 시종이 외쳤다. 리벨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뵙고자 한 적 없거든!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거든!
“들라.”
하지만 폭군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
성인 남자를 세로로 세 명은 세워도 통과할 것 같은 거대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 사이로 여유로운 모습의 황제 카리스가 보였다.
리벨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단 심기를 거스르면 곤란해진다. 리벨의 머리가 다시 풀가동되기 시작했다.
“네가 리벨 이벨라인가?”
몇 계단 위 황좌에서, 두꺼운 카펫을 소리 없이 밟고 내려온 카리스는 리벨 앞에 멈춰 섰다.
리벨은 바로 시야에 보이는 황제의 구두를 보며 당황했다.
아니, 왜 이렇게 가까이 오십니까? 예?
“예, 폐하.”
물론 그렇게 물을 순 없었으므로 곱게 답했다. 황제는 그런 그녀에게 불쑥 말했다.
“고개를 들어 봐.”
아니, 굳이 꼭 왜 높으신 분들은 고개를 들라고 하는 걸까?
리벨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잠재우며 슬그머니 시선을 들었다.
시스테인과 닮았지만 훨씬 탁한 색의 금발과,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최근 유독 황족과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 컨택할 기회가 많아지고 있었다. 황송하기 그지없다.
조만간 심장마비로 실려 갈 것 같았다.
“흐음.”
그의 짙은 눈동자에 살짝 이채가 감돌았다.
환한 금발을 가진 시스테인과는 달리 그를 감싼 퇴폐적인 탁한 색은, 황제라는 자리에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흐으음.”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말했다.
“얼마 전이었지.”
탁. 황좌에 도로 앉은 그가 리벨을 내려다보았다.
“새벽에 갑자기 어머니께서 연락하시더군. 급한 일이라고 말이야.”
그거 설마 혼인 인가 건?
리벨이 필사적으로 표정을 숨기는 사이 황제는 보란 듯이 종이 한 장을 흔들어 보였다.
그건 리벨의 예상대로 정말 혼인 인가서였다.
“시스테인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카리스는 종이를 흔들어 보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알다시피 시스테인은 대공가의 대를 제 대에 끊어 버리겠다고 말한 놈이지. 그런데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을까?”
―툭, 툭.
그 말에 리벨은 황제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아차렸다.
원작에선 언급이 없었지만 확실히, 황제는 시스테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황제 카리스는 어머니 리엔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황좌를 가지려면 직접 가졌겠지만 지금까지 안 가진 이유를 모르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난 내 아들들이 잘되는 게 최고거든.’
리엔은 그렇게 말했지만 카리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뻔했다.
언제 리엔이 황제 자리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고 섭정을 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녀는 변덕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리엔을 경계하던 중에, 이번엔 동생 시스테인에게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황태후 리엔의 총애를 받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사실 어이없게 차였는데 우연히 첫날밤을 보낸 게 폐하 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동생분이 감정 좀 드러내고 살게 해 달라고 어머님께서 부탁하셔서 이렇게 제가 아내가 됐습니다!
하하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폐하!
……라고 말해 봐야 저쪽에서 믿을 리가 없었다.
진짠데…….
황제 카리스의 눈이 의심으로 빛났다. 그가 궁금해하는 건 아마 이것일 것이다.
시스테인은 무슨 생각으로 결혼하려고 하는 건지. 그는 정말 권력에 관심이 없는지. 무슨 생각인지.
그리고 그건 리벨이 지금 당장 풀어 줄 수 없는 의문이었다.
황제는 어머니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뭐든 이루면 난 그걸로 족하다’라는 내리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시스테인 이 권력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건, 원작을 읽어 줘도 안 믿을 거다.
리벨의 모가지가 새로운 방식으로 달랑달랑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카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조용한 영애로군.”
그럼 여기서 떠들까요?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모가진데? 리벨이 진땀을 흘릴 때였다.
“네가 벨인 거, 시스테인은 모르고 있지?”
리벨은 그 말에 비틀거릴 뻔했다. 얼굴이 새파래진 건 물론이었다.
저건 확신을 가지고 묻는 것이었다.
“설마 지금 벨 아닌 척하려는 거 아니지?”
리벨은 그 말에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아아닙니다!”
다 알고 있는 황제에게 뻥을 쳐 봤자 밉보이기만 할 게 분명했다.
아니, 그런데 그 이야기는 대체 왜 하는데요, 갑자기!
“어머니께서 그래서 관심을 가지신 걸까? 어머니는 특이한 걸 좋아하시거든.”
카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리벨은 이번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시스테인 감정 되돌리기 프로젝트’ 같은 복잡한 건 빼고 따지자면 그게 팩트인데!
하지만 그래 봐야 황제는 믿지 않을 것이다.
원작에서, 리엔의 사랑조차 이해관계로 해석하려다 실패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게 카리스였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자작가의 영애와 제 아들을 결혼시킨다는 사실을, 카리스가 이해할까?
“정말 단순히 그것 때문일까? 어머니께서 네게 관심을 보이는 게.”
카리스가 눈을 반짝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의심이 머물러 있었다.
한참 리벨을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돌려 말하는 취미 없으니, 내 직접 묻지.”
그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리벨에게 말했다.
“장난치지 않고 답하는 게 좋을 거야, 영애.”
목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장난을 누가 합니까! 리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가 턱을 매만졌다.
“시스테인은 현재 황위계승권상 1순위야. 알고 있나?”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리벨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카리스가 웃었다.
“그럼 내가 죽으면 그 애가 황제가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네?”
이거 혹시 죽음의 스무고개인가요?
인터넷에서 뭐 다운받을 때 ‘네’만 하면 쓸데없는 거 잔뜩 깔려서 컴퓨터 고장 나는 것처럼, 예스만 하면 죽는 그런 시스템?
“대답.”
카리스가 죽음의 대답을 재촉했다. 리벨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스테인은 관심 없다니까요? 혹시 지병이라도 있어서 일찍 돌아가실 예정은 아니시죠? 리벨이 재빨리 말을 덧붙이려는 때였다.
카리스가 곧바로 물었다.
“너는, 그 상황에 관심이 없나?”
리벨은 덧붙이려던 말을 관두고 멈칫했다.
이건 정말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난 돌려 말하는 취미 없어. 어머니처럼 우아하게 말하는 취미도 없지. 그러니까 아주 대놓고 묻는 거야. 너는.”
그가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었다.
“나를 적대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다음 황위를 이어받을 자 옆에서, 더 권력을 탐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으거는 자신 있죠!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폐하, 저는 더 높은 자리를 노리지 않습니다.”
사실 대공비로도 이미 너무 높거든요! 여기서 사람 뒤에 더 붙으면 기자 일은커녕 집에서 하하 호호 먹고 놀면서 배둘레햄만 쌓게 생겼거든요!
리벨이 필사적으로 말하자 카리스가 웃었다.
“왜?”
여기서 그런 서술형 문제를? 리벨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치 아는 걸 다 서술하라는 교수님의 텅 빈 시험지를 본 기분이었다.
[출제자의 의도를 분석하시오(100점).]
리벨의 머리가 필사적으로 돌아갔다.
하나 확실한 건, 여기서는 거짓말을 해선 곤란했다.
아무리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 근거를 거짓으로 대 버리면 의심 많은 황제는 믿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감히 짐작하건대 폐하께서 제, 그…… 과거를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리벨은 최대한 말을 돌려 했다. 하지만 황제는 곧바로 답했다.
“맞아. 시스테인이 고자라고 기사 썼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