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위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소 거리가 있는 곳에서 마차를 다시 갈아탄 리벨은 이벨라 자작가의 마차를 탄 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그리고 오래전부터 이벨라 자작가의 사용인이었던 척하는 황태후의 그림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바깥에서 들어온 온갖 편지와 선물들을 한쪽 구석에 쌓아 놓고 있었다.
“여러 귀족가에서 편지와 작은 선물들을 보내왔습니다.”
리벨이 저택으로 들어서는 사이, 그림자들이 말했다.
“편지 줘 봐.”
내 짐작이 맞는다면.
리벨은 쌓여 있는 수십 통의 편지 중 하나를 받아 들고 눈썹을 꿈틀했다.
“그럼 그렇지.”
[리벨 이벨라 영애를 중부 사교회 ‘오후’에 초대합니다.]
고급스러운 초대장은 다름 아닌 사교계 초대장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벨라 영애.
사교 모임 ‘오후’를 대표하여 이펠란타 가에서 초대장을 보냅니다.
저는 서부 이펠란타 백작가의 안주인 로스티 이펠란타입니다.
저희 영지가 자랑하는 이펠란타산 포도주를 대접해 드리고자…….]
편지를 접은 리벨은 다른 편지를 빼 들었다.
내용은 죄다 비슷했다.
처음 뵙는다, 사교회 어쩌고에 초대한다, 잘 모르겠지만 우리 영지 특산물은 이거다.
특산물 이야기를 꼭 끼워 넣는 이유야 뻔했다.
디란타 대공가와 어떻게든 특산물 거래도 트고 안면도 터 보겠다는 거겠지.
한마디로 미래의 대공비에게 열심히 비벼 보려는 편지들이었다.
“어휴.”
하여간, 귀족들의 행동 양식은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저건 보나 마나 한 번씩 이쪽을 떠보기 위해 보낸 것일 터다.
귀족가를 수도 없이 취재한 리벨은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이 듣도 보도 못한 가문 출신의 대공비를 떠보고, 만만하다 싶으면 뭐 좀 뜯어먹으려는 목적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런 건 피곤한데.”
이벨라 자작 영애로서 지방 사교 모임이야 몇 번 참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초대하는 곳은 대부분 중앙 사교계의 모임들이었다.
분위기가 당연히 다를 터다.
중앙 사교계도 몇 번이나 잠입 취재를 간 적이 있으니 사교계 매너를 모르지는 않지만, 주인공으로 주목받았다간 무슨 실수를 할지 몰랐다.
그러면 그 여파가 대공가에까지 번질 거고, 자칫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역시 안 돼.”
대공비로서 실수하면 시스테인은 무표정하게 넘어가겠지만, 황태후 리엔 폐하는 가만히 안 계실 게 분명했다.
다음 날 머리만 남아서 황가 기사단 족구용 공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리벨은 수십 통의 사교계 편지를 든 채 졸졸 쫓아오는 그림자에게 다시 편지를 돌려주었다.
“어디 갈 만한 사교계 파티를 선택하긴 해야겠는데…….”
규모가 큰 곳은 너무 주목받아서 문제, 규모가 작은 곳은 대공비가 데뷔할 만한 곳이 아니니 문제다.
“으으!”
리벨이 머리를 싸매자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편지들은 모두 어떻게 할까요?”
“일단 내 방 테이블 위에 올려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림자는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편지 중에서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건 반드시 보셔야 합니다.”
“?”
뭔데? 리벨은 돌아보았다가 편지를 봉인한 문양을 보면서 바로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긴 했는데, 보낸 사람이 의외였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황태후 폐하가 아니라?”
“예.”
“황제 폐하께서?”
곱게 편지를 받아 보니 정말 편지를 보낸 자는 황제 카리스였다.
시스테인의 형.
대체 황제 폐하께서 내게 친서를, 왜?
갑자기 이 결혼이 마음에 안 드시나? 그래서 이혼하라고 하시나?
그런데 이미 기사도 다 났는데 물리긴 어떻게…… 아니, 애초에 결혼을 인가해 주신 건 황제 폐하시잖아!
―사락.
리벨은 복잡한 머릿속을 억누르며 편지를 열어 보았다.
“헐.”
그리고 입을 떠억 벌렸다.
* * *
“시스테인이…… 그렇다는 기사를 쓴 애가, 걔란 말이야?”
황제 카리스는 골 때린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도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의 동생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은 제가 황위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로, 저만의 정보 라인을 만들지 않은 상태였다.
본인이 말한 것도, 카리스가 따로 알아본 바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에게 정보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정보력이 황태후나 황제도 손을 댈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게 문제지.
하지만 시스테인은 그걸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이 중요한 정보를 알지 못한 모양이다.
정확히는, 시스테인의 정보 라인에 황태후 리엔이 손을 쓴 게 분명했다.
“이걸 모르게 하려고 그러셨단 말이지.”
황제 카리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손에는 보고서가 한 장 들려 있었다.
기자 벨과 리벨 이벨라 영애에 관한 보고서가.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웃던 카리스는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시스테인은 누누이 말해 왔다. 황위에 관심이 없다고.
어머니인 황태후 리엔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갈고닦은 황좌는 오로지 네 것이라고.
하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어머니가 있는 이상, 황제 카리스는 항상 긴장해야 했다.
‘아름다운 사람은 변덕도 심한 법이지.’
그렇게 말하는 리엔 황태후가, 언제 마음을 바꾸어 시스테인을 황좌에 올리려 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그는 늘 시스테인을 눈여겨보았다. 그가 아무리 정보원이 따로 없다고 해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시스테인이 가지고 있던 인간답지 않은 무력.
검을 배우기도 전부터 손끝에 마력이 맺히기 시작한 시스테인의 잠재력은 엄청났다.
“…….”
카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반면 정치에는 탁월한 기량을 지녔으나 무력 면에서는 평범했던 게 바로 자신, 카리스였다.
지금까지는 물론 괜찮았다.
동생 시스테인은 그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기는커녕 감춰 버렸고, 사교 활동을 하기는커녕 사교 활동에 필수적인 결혼마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 그는 돌연 제 입장을 뒤집었다.
[시스가 결혼이 하고 싶대.]
황태후의 그 연락은 카리스에게 충격적이었다.
시스테인이 사교 활동을 하겠다, 다시 말해, 귀족가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인가하지 않을 수 없어 인가하긴 했지만,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황위를 원치 않아?”
그가 뇌까렸다.
그래, 시스테인이 황위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황제가 제가 원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황제가 되고 싶어도 못 되는 놈이 있나 하면, 황제가 되기 싫어도 주변에서 밀어붙여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시스테인은 어릴 적, 그럴 뻔했다.
그를 총애하는 아비이자 전대 황제에 의해서.
그날 이후로 카리스는 시스테인에게서 눈을 단 한 번도 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직접 움직였단 말이지.”
그는 턱을 매만졌다. 리벨 이벨라의 황당한 정체를 알게 된 것까진 재미있었다.
그런데 웃긴 것과는 별개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벨 이벨라는 시스테인에게 아무런 이점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파도 파도 권력가와의 연결은커녕 어이없는 정보만 나왔다.
“심지어 어머니께서 직접 함구하라 명하신 게, 이거야?”
얘가 기자인 거? 그것도 시스테인에 대한 기사를 썼던 거?
물론 아무리 감정이 없는 것처럼 구는 시스테인이라도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예. 그 정보가 확실합니다.”
그 사실을 알아 온 카리스의 정보원은 진지하게 답했다.
“시스테인은 확실히 모르는 거지?”
“예.”
그 말에 카리스가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모르니까 결혼한다고 했겠지?”
그럼 이 여자는 왜 시스테인한테 접촉한 거지?
“미친 건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시스테인을 어디까지 건드려야 화를 내는지 궁금한 건가?
어머니께서 혹시 그게 궁금해서 실험하려고 이 여자를 부른 건가?
“…….”
그게 현재 상황에서는 가장 신빙성 있는 추론이었지만 찜찜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카리스는 눈썹을 꿈틀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직접 알아보면 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충분히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폐하, 리벨 이벨라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그중 하나는, 리벨 이벨라를 직접 불러와 물어보는 것.
“들라.”
말보다도 얼굴, 행동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드러낸다.
과연 리벨 이벨라는 뭘 목적으로 시스테인에게 접근했을까.
아니, 시스테인은 무슨 생각일까.
리벨 이벨라가 시스테인에게 무슨 이점이 될 수 있을까?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는 카리스의 눈이 반짝였다.
대체 어머니와 리벨 이벨라는 무슨 관계일까?
―달칵.
카리스는 알현실의 문이 열리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이미 리벨 이벨라의 뒤는 다 캔 상태였다. 그리고 어머니, 황태후 리엔이 너무나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관심을 보이시는 걸까?”
특별한 거라고는 벨이라는 기자 신분밖에 없는 여자인데.
정말, 시스테인이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현실로 들어오는 리벨을 그의 눈이 빠르게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