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41)화 (41/167)

제41화

“……기본적인 예의를 지켰을 뿐입니다.”

“흐음.”

리엔은 그 답에 시스테인을 살폈다. 시스테인은 굳은 얼굴로 리엔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리벨은 그 사이에서 눈을 깜빡였다. 묘한 분위기였다.

“……그래, 그나저나 급 떨어지는 곳에서 대공비가 데뷔할 순 없지.”

리엔은 조금 흥이 식었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우리 아가가 데뷔할 연회라…….”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황가의 연회가 아니고서야 어디든 질 떨어지는 연회가 아니겠니.”

서서설마 황가에서 직접 데뷔 연회를 열어 주실 건 아니죠?

리벨은 결혼식 때의 까마득한 돈X랄을 떠올리며 리엔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리엔의 생각은 좀 다른 듯했다.

“시스, 아가가 어디에서 데뷔하든 에스코트해 줄 거지?”

“…….”

시스테인은 여전히 굳어 있는 얼굴로,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도리이니, 물론입니다.”

도리라는 것을 유독 강조하는 것 같다고, 리벨은 생각했다.

“그럼 곧 열릴 사교회 목록을 좀 볼까.”

―툭툭.

리엔은 노크하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소리 없이 들어온 하인에게 그녀가 손짓했다.

“앞으로 한 달 이내로 계획된 사교회 목록을 가져오렴.”

“알겠습니다.”

사교회를 연다고 황가에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황태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교계의 일을 꿰고 있었다.

이미 조사를 해 놓은 듯, 그녀의 앞에 사교회 목록이 빠른 속도로 배달되었다.

“어디 보자…….”

리엔이 테이블 위에 사교회 목록을 내려놓았다. 세 사람의 시선이 보고서로 모였다.

“어차피 대공가를 초대하지 않은 집안은 없을 테니, 초대장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

리엔은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리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에서 원치 않아도 디란타 대공 부부는 지금 사교계의 화두인 데다, 모두가 은근히 대공비와 줄이 닿고 싶어 할 테니까.

예의 삼아 보내는 초대장이 반, 은근한 기대감을 담아 보내는 초대장이 반일 터였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예정된 사교회라고 했는데도 종이는 벌써 십수 장이 넘어갔다.

그만큼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작은 사교회까지 포함해 많은 정보가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사락.

종이를 넘겨 보던 리엔은 네 번째 페이지에서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 여기 좋은 사교회가 있구나.”

리엔 황태후의 마음에 들 정도면 대체 얼마나 호화로운 사교회란 말인가?

리벨은 의외의 말에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눈이 튀어 나갈 뻔했다.

시스테인도 조금 놀랐는지 찻잔을 든 손을 멈칫했다.

“여기가 좋겠어, 우리 아가. 그렇지?”

리엔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리벨은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딱이네요…….

리벨은 사교회의 주최 가문명을 보면서 작게 말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사악하고도…… 기쁜 생각을 하십니까?

리벨은 경탄스러운 얼굴로 리엔을 바라보았다.

“왜, 아가?”

“아니, 존경스러워서요.”

리벨이 저도 모르게 뱉어 버렸다. 리엔이 다시 해사하게 웃었다.

“우리 아가는 말도 예쁘게 하지.”

리엔이 리벨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부드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그녀가 가리킨 사교회의 주최 가문은…….

리벨은 그 가문명을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커서 리엔 황태후님처럼 돼야지.

*  *  *

롤란드 디엘렌과 디엘렌 백작이 감찰기사단의 조사에서 풀려난 건, 잡혀 들어간 지 며칠 후였다.

그들은 조사받는 동안 귀족다운 인상을 거의 잃어버렸다.

눈 밑이 퀭해지다 못해 판다 분장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다크서클이 짙게 깔렸다.

“드디어…… 끝났다…….”

―털썩!

롤란드가 감찰기사단 건물 앞에 털썩 쓰러지면서 중얼거렸다.

디엘렌 백작은 한심한 아들놈의 뒷모습을 보면서 씹어 뱉듯 말했다.

“뭐가? 조사가? 아니면 우리 가문이?”

그는 머릿속이 까마득해진 기분이었다.

감찰기사단에서 아무리 털어 봐야 불법 자릿세를 걷은 것만 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찰기사단은 모르는 게 없다는 소문이 맞았는지, 그들은 디엘렌 백작 본인조차 까먹고 있던 가문의 온갖 비리들을 끌고 와 들이댔다.

덕분에 벌금이나 처벌도 불법 세금 징수만으로 나올 수 없는 규모로 나와 버렸다.

“이 멍청한 놈.”

디엘렌 백작이 씹어 뱉듯 말했다.

“아, 왜요!”

롤란드 디엘렌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이 끔찍한 감찰기사단 건물에서 나가야 했다.

저 담장만 넘으면 조사 끝이다!

두 사람은 감찰기사단에서 잡기라도 할세라 재게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네놈이 생각 없이 말해 대는 바람에 조사만 길어졌잖아!”

“내가 뭐요!”

그러면서도 속삭이면서 싸우는 건 잊지 않았다.

그들의 조사가 길어진 건 불법 세금 징수 때문이 아니었다.

뒤로 숨겨 놓은 온갖 검은돈들과 황가에 보고하지 않은 개인 사병…… 즉, 불량배와의 커넥션까지 탈탈 털리면서 길어진 거였다.

물론 처음에는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감찰기사단에서는 디엘렌 백작과 롤란드 디엘렌을 따로 떨어진 방에 가두고 심문했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달리 답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았으니 거짓말이 들통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불법으로 징수한 세금 전액의 두 배를 황가에 상납하는 것은 물론, 지도에 표시한 영토의 20%를 황가에 귀속시킨다.

뿐만 아니라 향후 5년간 디엘렌 가는 황가의 특별관리대상에 들어가며 매해 황가에서 정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세수를 신고할 것을 명한다.]

“…….”

디엘렌 백작은 들고 있던 ‘처분’ 종이를 구겨 버리고 싶었다.

물론 황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종이를 구겼다간 다시 감찰기사단에 끌려 들어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곱게 다시 접어 주었다.

“그래, 작위 회수가 아닌 게 어디냐.”

디엘렌 백작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특별관리대상이 된 만큼 영지민들에게도 적당한 복지를 보여 주지 않으면 감찰에서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올 것이 분명했다.

“근데 아버지, 소문으로는 감찰 나왔던 영지에는 감찰기사단 일부가 와서 살아 본다던데, 진짜일까요?”

그럼 귀찮아지는데. 롤란드가 얼굴을 구기면서 말했다.

디엘렌 백작은 뭐 씹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 소문이 진짜든, 아니든, 한동안은 적당히 눈치 보면서 행동해라.”

불법적인 일에 손대지 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네네.”

그리고 그게 보통 귀족에게는 가장 귀찮고 힘든 짓이었다.

그새 발을 재게 놀린 두 부자는 어느새 감찰기사단 본부의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일단 나가서 알레로 가에 먼저 연락해라.”

그 지옥 같은 문턱을 넘으면서 디엘렌 백작이 말했다.

“네.”

일단 결혼식에서 감찰이 떴으니 알레로 가에서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디엘렌은 반드시 알레로를 붙잡아야 했다.

일단 감찰에서 뭘 털렸는지 적당히 양념을 쳐서 말한 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이야기한 다음…….

무엇보다 알레로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다.

두 부자의 생각은 똑같았다.

알레로 가가 가진 커다란 상단의 자금력을 끌어오지 못하면, 향후 몇 년 동안 계획해 두었던 디엘렌 가의 사업도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될 터였다.

좋아, 일단 알레로부터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이 감찰기사단에서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화려한 카메라 셔터 소리가 그들을 감쌌다.

“?”

이게 뭐람? 디엘렌 백작과 롤란드 디엘렌은 뜻밖의 관심에 당황했다.

그들이 평생 받아 본 적 없는 무수한 인터뷰 세례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제집에 있을 사용인들보다 많을 것 같은 기자 무리를 보면서 멍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디엘렌 백작님이십니까?”

“롤란드 디엘렌 영식이다!”

우르르 그들 앞에 모여든 기자들이 앞다투어 질문했다.

“알레로 가의 입장 선언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아직 디엘렌 가의 공적인 대응이 없는데 구체적인 대응 방안이 있으십니까?”

“알레로 가와 디엘렌 가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레로 가…….”

“……해서 디엘렌……!”

“디엘렌 가의 입장이…….”

“……는 알레로 가에서……!”

우르르 질문이 쏟아져 누가 뭘 묻는지 알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디엘렌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깐!”

그러자 기자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기자들은 특종 잡았다는 얼굴로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기록하려 펜을 든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디엘렌 백작은 아직 상황판단이 안 된 상태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그의 말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불쑥 질문 하나가 솟아올라 디엘렌 백작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알레로 가에서는 이번 결혼을 무효로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디엘렌 가의 공식 입장은 어떻습니까!”

“뭐라고?”

디엘렌 백작과 롤란드 디엘렌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롤란드 디엘렌이 발끈했다.

“아니, 결혼 다 해 놓고 무슨 무효야!”

그 말에 기자들의 눈이 번뜩였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사항인 겁니까!”

“한 말씀 해 주시죠!”

“감찰기사단에서 이례적으로 조사가 오래 걸렸는데 불법 세금 징수 혐의 외에도 다른 것이 있으셨던 겁니까!”

“디엘렌 가와 불량배와의 커넥션이 있었다는데…….”

“베니카 알레로 영애께서는 롤란드 디엘렌 영식께서 아직 반지를 끼워 주기 전이었으니 결혼식은 무효라는 입장이셨습니다! 이에 대해―”

그 말에 롤란드가 발끈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의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노트에 적히고 있었다.

디엘렌 백작이 기겁해 아들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사항이니, 공식 입장은 나중에 발표하겠네!”

그러면서 그가 눈을 부라렸다.

“노트 집어넣지 못해!”

그러고는 재빨리 기자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한 말씀만 해 주시죠!”

“지금 심정은 어떻습니까!”

우르르 쫓아오는 기자들 사이를 지나 그들은 간신히 마차에 올라탔다.

“빨리, 최대한 빨리 가!”

디엘렌 백작이 새하얘진 얼굴로 윽박질렀다.

미리 감찰기사단 본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디엘렌 가의 마부가 재빨리 말에 채찍질했다.

―히히힝!

그런데 너무 서둘러 출발한 탓일까, 운이 더럽게 나쁜 탓일까.

삐걱거리던 마차의 바퀴 한 짝이 빠져 버렸다.

―덜커덩!

“으아악!”

마차 한쪽이 주저앉자 디엘렌 부자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기자들 다 있는데 뭐 하는 거야, 지금!”

두 사람이 아우성치더라도 이미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는 미친 듯이 눌리고 있었다.

도망치듯 자리를 뜬 디엘렌 부자와, 천벌이라도 받은 것처럼 주저앉아 버린 디엘렌 가의 마차.

디엘렌 백작가에 대한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사진이 정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