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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47)화 (47/167)

제47화

베니카의 말에 롤란드의 웃는 얼굴에 실금이 갈 뻔했다.

뭘 알고 있는 거지?

숨긴 게 너무 많아서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 굳으면 곤란했다.

“내가 실망시킨 것 알고 있어. 하지만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봐 주겠어?”

그가 애절하게 속삭였다. 베니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레로 가는 디엘렌 가가 감찰기사단에서 먼지 한 톨까지 털리는 사이, 그들이 숨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결혼을 미루려고 연줄까지 동원했는데, 실패했다고?’

알레로 자작 부부와 함께 그 소식을 들은 베니카는 어이가 없었다.

의전원에 자신 있게 연락해서 대공가와 결혼이 겹치지 않도록 조치하겠다던 건 디엘렌 가가 아니었나?

하지만 그들은 결혼 날짜를 미루지 못했다.

그리고 자세히 알아보니 무려 후작가라는 연줄을 거쳐 의전원에 직접 부탁하기까지 했지만, 차갑게 거절당했다고 했다.

‘어디 위쪽 가문에서 의전원에 압박이라도 넣은 거 아니에요?’

‘아니, 황가 부서에 압박을 넣……을…….’

대화를 하던 알레로 자작 부부와 베니카 알레로는 황가 의전원에도 압박을 넣을 수 있는 한 가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가문…… 디란타 가는 공교롭게도 디엘렌 가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롤란드 디엘렌이 지금은 디란타 대공비가 되어 버린 리벨 이벨라 영애를 아주, 보란 듯이 차 버리지 않았는가?

결혼하자는 말은 농담이었다는 망신까지 줘 가면서!

‘그렇게라도 안 하면 그 눈치 없는 애가 또 기자들한테 무슨 헛소리를 할지 모르거든.’

롤란드 디엘렌은 그 당시에 베니카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베니카는 그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제가 그 기사를 낸 슈 기자라는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알레로 가에서도 그걸 알고 접근한 거니까.

알레로 가의 위치에서 상위 귀족 사회로 진입하기에 가장 알맞은 발판.

그게 바로 디엘렌 가였으니, 내정된 상대가 있더라도 반드시 뺏어 와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하필이면……!’

그렇게 알레로 가에는 괜한 불똥이 튀었다.

그 상위 귀족 사회와의 연줄이 바로, 디엘렌 가가 알레로에 줄 수 있는 마지막 이점이었는데 그것마저 안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금슬 좋아 보이던 그 디란타 대공 부부는…….

하필 리벨 이벨라, 그 여자가 대공하고 결혼할 줄이야!

알레로 가는 디란타 대공비의 눈치를 봐서라도 저들과 손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이 연회에 참석한 것에 가까웠다.

“아직도 안 오시는군.”

“이미 돌아가신 건 아닌지…….”

하지만 그 디란타 대공 부부는 피곤하다며 나가더니 돌아오지도 않았다.

물론 그대로 연회장에 돌아오지 않고 저택으로 돌아가더라도, 디란타 대공 부부에게 감히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대공비는 데뷔탕트 무대로서 이곳을 충분히 사용했으니까.

“그런데 대공비 전하께서 입으신 옷, 어느 의상실 옷일까요?”

“그 진분홍빛 머리칼에 어찌나 보석처럼 잘 어울리던지. 저도 의상실이 어딘지 여쭤보고 싶었는데. 요즘 일을 맡기는 의상실이 시원치 않아서…….”

이미 귀부인들은 디란타 대공비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연회장에 존재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얼마나 대공과 애틋한 사이인지까지 빠짐없이 보여 주고 갔다.

“…….”

비록 디란타 대공 시스테인이 매서운 눈을 뜨고 있어 가까이에서 그녀를 본 자들은 많이 없었지만, 데뷔탕트의 목적이 확실히 귀족 사회의 눈에 각인되는 것이란 걸 생각해 보면 그들은 이미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이 연회장에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적다는 이야기였다.

“돌아가자꾸나, 베니카.”

그 결론을 내린 건 베니카뿐만 아니라 알레로 자작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디엘렌 가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지만 알레로 자작가에서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뭐 어쩌라고?

원래 상인들은 손해 보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 안 있어, 알레로 자작가의 마차가 디엘렌 가의 연회장에서 출발했다.

뒤이어 대공가의 마차 역시도 연회장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물론 사교계에서 연회장 주인에게 인사 한번 없이 자리를 뜨는 건 예의가 아니었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디엘렌에서 얼마나 알레로에 섭섭하게 굴었으면.”

“디란타 대공비께는 또 어때. 그 기사를 나게 한 게 디엘렌 영식이잖아.”

“장난이었다고 해도 귀족 영애에게 그런 소문이 얼마나 치명적인데, 신사라면 막아 줬어야…….”

손님들은 그렇게 떠들면서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물론 디엘렌 백작과 롤란드에게 인사할 때는 웃는 얼굴이었다.

“재미있게 즐기다 가요, 백작님.”

그러면서 뒤로 떠드는 말이 안 들릴 리가 없었다.

한두 명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이내 손님들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디엘렌 백작은 손님들이 떠나가는 마지막 즈음에는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붙잡으며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쿠웅…….

거대한 연회장의 문이 닫히고, 연회장에 제 아들과 단둘이 남겨진 디엘렌 백작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뭐냐, 아들아?”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가문의 모든 저력을 끌어모아 재기의 기회를 노렸던 연회가 허망하게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알레로 가도, 다른 연줄도 그 어떤 것도 유지하지 못했다.

빠져나간 건 돈뿐이었다.

“그러게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대답할 정신머리가 없는 건 롤란드 디엘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앞에 남은 건 이제 빚뿐이었다.

“……아.”

아니지. 하나 더 있을 수도 있다.

롤란드 디엘렌은 문득, 렐라 의상실에 대해 기억해 냈다.

그는 검은 카드를 내밀었던 평범한 외모의 갈색 머리 남자를 떠올리며, 안주머니에서 검은 카드를 꺼내 보았다.

[렐라 의상실]

진짜 옷을 지어 주는 곳인지는 몰라도 진짜는 이곳 지하에 있을 것이다.

명예와 권력이 오가는 곳이라…….

그것도 돈을 기반으로.

기이한 뱀 문양을 보던 그가 뇌까렸다.

“여기나 가 볼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  *  *

디엘렌 가의 연회 이후.

하필이면 200명이나 되는 손님들, 그것도 마당발인 상인들을 중심으로 손님들을 초대하는 바람에 연회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디란타 대공비의 화려한 데뷔탕트였다고.

그 뒤에야 간신히 디엘렌 가의 소문이 따라붙었다. 알레로 가와 디엘렌 가는, 이야기 한마디 못 해 봤다고.

[알레로 가, ‘결혼 무효’ 입장 공고히 해]

[디엘렌 가, “‘결혼 무효’ 인정할 수 없어”]

[의전원은 디엘렌-알레로 가 간의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

리벨은 마지막 신문 기사에 주목했다.

그러게.

지금 알레로 가는 ‘비록 결혼식을 진행하려 했으나, 아직 신랑이 반지를 끼워 주지 않았으니 결혼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디엘렌 가는 ‘결혼식이 시작되어 함께 버진 로드를 걸은 이상 두 사람은 엄연한 부부’라고 주장하고 있고.

신부의 가문은 결혼 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신랑 가문은 결혼했다는 걸 분명히 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렇게 애매한 상황이면 의전원에서 개입하겠구나.”

당연한 일인데 워낙 흔치 않은 일이라 새삼스러웠다.

원래 의전원은 이런 특이한 일이 있지 않은 한, 귀족들 간의 결혼에 관련해서는 날짜 정도나 조절하는 곳이었다.

리벨이 고개를 기울일 때, 시스테인이 그녀와 같은 기사에 시선을 주었다.

“저들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불쑥 들어오는 말에 리벨이 화들짝 놀랐다.

“네, 네?”

시스테인의 담담한 시선과 리벨의 흔들리는 시선이 부딪혔다.

‘좋았습니다.’

‘조금 더, 해 주신다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화원의 짙푸른 라이아 약초를 연상시키는 그의 푸른 눈동자 때문일까.

그 화원에서의 기억이 리벨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제 손끝을 붙잡던 시스테인의 손길.

손끝이 닿자, 옅은 미소를 짓던 그.

‘웃…….’

었다, 라고 말하려다가 말하지 못했던 그때의 기억도.

또 그 웃음이 사라질 것 같아서.

그 묘한 미소에는, 안정감이 서려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그는 그녀의 손이 마치 지옥에서 구해 주는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고 있었다.

손끝으로 계속 찌르고 있기가 뭐해서, 슬쩍 손을 오므려 그의 볼을 감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치 잠든 아이처럼 온순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평소에는 담담하면서도 딱딱해 보이는, 철벽같은 시스테인 폰 디란타가 아닌 것처럼.

그때의 그를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베니카 알레로와, 롤란드 디엘렌 말입니다.”

시스테인의 담담한 말이 다시 떨어졌다. 그는 그날 이후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원래 이런 사람이긴 했는데……!

리벨은 그때 그에게 닿았던 손을 곰지락거렸다.

이미 여러 번 밤까지 보내 놓고 새삼스럽게 이런 스킨십에 반응하는 저도 웃겼지만……, 그보다.

그렇게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그 웃음을 왜 그렇게 금방 없는 것처럼 감추어야만 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그날부터, 계속.

“리벨?”

그가 재차 묻는 목소리에 리벨이 정신을 차렸다. 하여간 그날의 웃음에 신경 쓰는 건, 그녀뿐이었다.

괜히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볼을 긁적였다. 베니카랑 롤란드?

“당연히…….”

X됐으면 좋겠죠!

무심코 이어 말하려던 리벨은 혀를 깨물었다.

“그냥, 그, 둘 다 별로 잘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귀족의 언어, 힘들다. 리벨은 여유로운 것처럼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렇게 남 X됐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놔야 한다니.

“디엘렌은 당연하고, 알레로 가도 분명 나랑 롤란드가 원래 무슨 사이인지 알고 그랬을 거거든요.”

그 말에 시스테인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렇다면 의전원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네?”

뭐, 뭘? 나랑 롤란드랑 사귀었었다는 걸? 그걸 굳이? 결혼한 시점에서? 그런 쓸데없는 정보를?

리벨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벨이, 그리 원하신다고요.”

그들 앞이 가시밭길이길 원하신다고.

그의 말에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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