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세상에, 이게 뭐야?”
리벨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한 리벨이 화원으로 달려갔다.
화원에는 익숙한 식물들이 잔뜩 있었다. 그건 당연히 라이아 약초였다.
라이아 약초가 화원에 가득한 건 문제가 되지 못했다.
이미 시스테인이 그런 용도(?)로 라이아 약초를 구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이거 어제는 안 이러지 않았어?”
“어제는 멀쩡했습니다.”
나인 역시 기이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리벨은 하룻밤 사이에 싹 다 죽어 버린 라이아 약초 무더기를 보았다.
시스테인은 이걸 모으는 이유가 라이아 약초에 마력을 가라앉혀 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근데 이게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싹 다 말라비틀어져 버린다는 건?
마력과 관련해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리벨은 저번에 디엘렌 가의 연회에서 시스테인에게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마력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는 라이아 약초. 그도 우연히 알았다고 했다…….
‘좋았습니다.’
‘조금 더 해 주신다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제가요.’
……그 뒤로 있었던 뜻밖의 스킨십에 다른 걸 물어볼 정신도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에게 마력에 관련된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그가 라이아 약초를 수집하는 이유도, 아파 보였던 그가 라이아 화단에 갔을 때 진정되었던 이유도 설명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랑 비슷해…….”
리벨은 시스테인의 눈동자처럼 짙푸른 색이었을 라이아 약초의 꽃잎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때 시스테인 옆에 있던 라이아도 모두 시들어 있었다.
그때는 그게 롤란드가 제대로 화원 관리조차 하지 못하는 멍청이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일 시스테인의 마력에 뭔가 영향을 받았다면?
이 세계 사람들은 모두 마력을 타고난다고 했다. 정도에 따라 일생에 영향도 안 미칠 수도 있고, 리벨 자신처럼 변신 같은 한쪽 방향으로 특화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만일 시스테인에게 뭔가 마력적인 문제가 있다면?
리벨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급히 저택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걷다가, 빠르게 걷다가, 이내 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와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집사 헬리아였다.
“마님?”
“시스는?”
헬리아는 급히 뛰어오는 그녀를 보고 놀란 듯했다.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리벨은 바로 시스테인의 집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뭔가 불길했다. 디엘렌 가의 연회에서 갑자기 심장 근처를 부여잡던 시스테인의 모습이 떠올라서.
―벌컥!
리벨은 저도 모르게 시스테인의 집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혔다.
“?”
그리고 당황한 것 같은 시스테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안, 안 아픈가?
리벨의 시선이 그의 안색을 재빨리 살폈다.
조금 평소보다 창백한 것 같기도 했다.
“……리벨?”
시스테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어오는 모습도 멀쩡해 보였다.
“무슨 일로, 그리 급히 들어오신 겁니까?”
그 말에 리벨은 그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달칵.
그런 그녀의 뒤로 문이 닫혔다. 리벨은 그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파 보이진 않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숨이 찬 모습에,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건 리벨 그녀였다.
시스테인이 아주 살짝 눈썹을 움직였을 때였다. 리벨이 급히 화원 쪽을 가리켰다.
“라이아 약초가 다 죽었어요!”
속삭이는 말이었지만 다급한 마음 탓에 강한 어조로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아.”
시스테인은 그제야 화원의 이상을 알아챈 듯했다. 그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하루에 한 번 정원사가 관리하는 정원.
저택을 들어오는 입장이라면 모를까 저택 쪽에 있는 사용인들은 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 있는 정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정원은 안쪽으로 갈수록 회색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밤인데도 눈이 좋은 그에게는 그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랬군요.”
그가 제 심장 부분에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리벨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리벨과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서는 아닐지.”
“그…….”
맞는 말 같긴 한데.
지난번 디엘렌의 화원에서 그는 그랬다. 리벨이 옆에 있으면 들끓는 마력이 가라앉는다고.
들끓는 마력…….
그가 뜨겁게 손을 잡아 오는 것에 정신이 없어 자세히 묻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그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는 듯했다.
새하얀 셔츠 차림. 집무실의 밝은 조명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환한 금발.
그리고 그 사이로 반짝이는 푸른빛 눈동자와 다소 창백해 보이는 안색.
“……그런데.”
리벨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팩트를 말씀하시는 건 알겠는데 그걸 이렇게 로맨틱하게 말씀하실 일입니까?
“…….”
“…….”
하지만 시스테인의 담담한 표정에는 로맨틱의 R 자도 없었다.
하긴, 이 사람은 집에 운석이 떨어지고 있어도 저런 표정일 것이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살펴보던 리벨은, 그의 옷소매에 묻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하얀 옷소매에 묻은 건, 분명 핏자국이었다.
“이이이건 뭐예요?”
놀란 리벨이 그의 왼팔 소매를 붙들었다.
“어디서 피 보셨어요?!”
놀란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은 그제야 제 옷소매의 얼룩을 발견했다.
제복 겉옷에 튀었을 피가 소매까지 흘러 들어간 모양이다.
“예. 오늘 저도 외근이 있었던 터라―”
“어쩌다가요?”
리벨은 기겁했다. 시스테인은 뒤늦게 그녀가 피 냄새를 싫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잘못된 정보(?)였지만 리벨이 유독 놀라는 이유를 그는 그렇게 해석했다.
피 보기 싫어하는 그녀에게는 너무 자극적인 모습일 거라고.
하지만 다음 말에 그의 생각은 정정되어야 했다.
“많이 다쳤어요? 어쩌다 다쳤어요?”
아무래도 그의 신부는 오해를 좀 많이 한 듯했다.
그는 제 팔을 붙들고 살피는 리벨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다치게 했습니다.”
“……아.”
그때까지 다친 곳을 찾고 있던 리벨이 그의 팔을 슬그머니 놓았다.
다친 게 아니라 다치게 한 거……. 기사단 일을 하다 보면 덤비는 놈 때려잡을 수도 있고 뭐 그런 거지.
……그런데 제도기사단장이 사람도 다치게 하나?
리벨이 눈을 끔뻑이며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흉악범이 있었나 봐요.”
제도기사단장이 검을 휘두를 정도면 어지간한 일은 아닐 터였다.
누굴 잡은 거지? 현상수배 중인 놈인가?
그럼 이거 특종감인가?
“어디에서 어쩌다가 잡으신―”
아아아니지! 리벨은 솟아오르려는 직업 정신을 밟아 버렸다.
그때 시스테인이 불쑥 물었다.
“흥미로우십니까?”
리벨이 우뚝 굳었다. 보통 귀족 영애가 사람 피 튀는 일에 흥미로워할 리가 없었다.
근데 리벨 자신은 이미 너무…… 많은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가?
위이이잉! 그 짧은 순간 머리를 풀가동한 리벨이 바로 답했다.
“그, 제가 범죄 추리 소설 같은 걸 좋아해서요.”
하하하하! 아주 흥미롭죠!
리벨이 그의 소매를 가리켰다.
“나쁜 사람 잡으면 좋죠, 뭐! 안 다치셨으니까 됐고!”
리벨은 그의 소매를 가리키면서 하하하하 웃어댔다.
그게 며칠 후 일으킬 파장을 생각지도 못한 채.
* * *
며칠 후.
“전생에는 왜 회사 일 할 때 계약서에 겸업금지조항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땐 그냥 사장님이 월급 주고 뽕 뽑아 먹으려고 넣어 놓은 줄 알았지.
그런데 그건 어쩌면 아주 인도적인 처사였을지도 모른다.
본의 아니게 대공비-기자라는 말도 안 되는 조합의 투잡을 가지게 된 리벨은 뇌까렸다.
혹시 그거, 투잡 뛰다가 과로사하지 말라고 그런 거 아닐까?
그녀가 전생을 스쳐 지나간 숱한 사장님들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할 때였다.
“리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집무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의외의 인물의 것이었다.
“시스?”
아니, 직접 집무실까지 왜? 리벨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서류 무더기를 든 시스테인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서류가 너무 많아서 서류가 서 있는 줄 알았다.
“……이게 다 뭐예요?”
리벨이 문가에서 비켜 주자, 시스테인은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와 그녀의 집무용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올려놓았다.
―탕.
가볍게 내려놓았지만 무게가 상당한지 소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설마 오늘부터 저 과로사로 죽는 건가요?
지금까지 대공비로서 일한 건 예습이었고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가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이던 리벨은 쌓여 있는 서류철 중 맨 위의 것에 시선을 주었다.
[서부지역 사건 T-03271-A 조사 내용]
“……사건?”
사건 조사 내용? 리벨이 슬그머니 서류철을 펼쳐 보았다.
시스테인이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피가 있는 현장 사진이 있는 사건은 제외하고 가져왔습니다.”
그, 피 냄새 싫어한다고 했지 피를 못 본다고 하진 않았거든요?
아니 애초에 피 냄새 싫어하는 것도 사실은 아니었는데…….
리벨은 떨떠름한 얼굴로 사건 기록지를 살펴보았다.
“근데 이걸 왜 저한테……?”
그러다가 결국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시스테인은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좋아하신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