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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54)화 (54/167)

제54화

틸라 상단주 리카스 틸라.

그는 상단 소유의 별장에 있었다.

이곳은 그가 귀한 손님들을 모실 때만 여는 비밀스러운 별장이었다.

“손님 준비에는 실수 하나 없어야 할 것이야!”

그가 아랫사람들을 며칠이고 직접 갈구면서 연회를 준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연회, 아니, 접대는 근 몇 년 동안의 틸라 상단의 수입을 책임지는 건이었으니 당연했다.

투라 영지를 중심으로 그 일대의 소금값을 천천히 올려 온 것이 벌써 몇 년.

슬슬 원하는 수준까지 시세가 오른 참이었으니 사재기해 둔 물건을 풀 차례였다.

너무 빨리 풀었다간 감찰기사단이나 쓸데없는 곳에서 냄새를 맡을지도 모르니, 천천히 계획에 맞추어 물건을 풀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이 ‘사업’의 규모를 키우기 위한 회동이 바로 이번 회동이었다.

“두 귀족가에서는 오고 계신다고 하나?”

“예. ‘검은 가면’께서는 이미 출발하셨고 ‘하얀 가면’께서는 이제 출발하신다 기별하셨습니다.”

검은 가면과 하얀 가면.

두 귀족가의 대리인을 부르는 말이었다.

가격 담합은 엄연한 불법인 만큼 귀족가들은 철저히 자신을 감추었다.

덕분에 니아 상단과 틸라 상단도 그들이 정확히 어떤 가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 정도의 영향력과 금전을 지원해 줄 수 있을 정도면 적어도 백작가 이상의 규모일 것이다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정체가 중요하진 않지.”

어차피 한탕 장사다. 이번 계획이 끝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이.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건 좀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놓치기엔 너무나 매력적인 거래였다.

그리고 거래를 놓치지 않은 덕에, 니아 상단과 틸라 상단은 근 몇 년간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황가에 들키지 않기 위해 이중장부를 쓴 건 기본이었다.

“루이나 상단주가 도착했습니다.”

그때 하인 하나가 재빨리 달려와 보고했다.

“오, 드디어 오셨는가.”

루이나 상단.

최근 남부에서 세를 불려 가던 루이나 상단은 대담하게도 틸라 상단에 먼저 연락했다.

그리고 혹시 ‘사업’을 함께할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다.

근래 투라 영지 일대에서 벌어진 소금값 변동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는 말과 함께.

그냥 감찰에 신고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나 상단 역시 금전을 중요시하는 상단.

그들은 신고하는 대신 동업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물론 동업자가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루이나 상단에서 계획을 알아챈 듯합니다…….]

두 귀족이 상단에 남겨놓은 사람을 통해, 틸라 상단주는 곧바로 귀족들에게 루이나 상단의 존재를 알렸다.

소금값 담합으로 물품의 시세를 올려 차익을 취하는 것.

이 계획 자체가 일대의 수많은 영지민들의 삶과 관련되어 있는 만큼 황가나 감찰기사단 등에 들켰다간 매우 곤란해진다.

그러니 루이나 상단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본 것이었다.

[루이나 상단과 함께하면 남부까지 계획을 넓혀 실행할 수 있을 것 같군.

조사해본 결과 루이나 상단에 ‘결격 사유’도 없었네.]

하지만 귀족가에서 돌아온 답은 의외로 OK였다.

루이나 상단이 남부에서 세가 넓으니, 그것을 이용해 한탕 더 하자는 것이었다.

“귀족가에서 조사했으면 확실하겠지…….”

그렇게 뇌까린 틸라 상단주 리카스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로 모시게.”

“이미 모셨습니다.”

직접 와서 닦달한 만큼 하인들은 실수 없이 손님을 모시고 있었다.

리카스는 흡족한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 리 루이나, 그녀의 화려한 깃털 챙 모자가 먼저 보였다.

확실한 패션 센스를 고수하는 그녀는 검붉은색의 드레스에 새까만 장갑을 끼는 것을 선호했다.

“흠.”

그런데 오늘따라 그녀의 옷은 달랐다.

평소처럼 레이스 많은 옷을 입은 건 같았지만, 은은한 은색 바탕에 푸른 천으로 장식된 모자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장갑도 새하얬다.

옷 색이 평소와는 달랐다. 뿐만 아니라.

“……눈 색이?”

리 루이나. 그녀는 암흑 같은 새까만 눈동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자줏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평소와 화장법 등도 같았지만 색만 달랐다.

마법으로 바꿨나?

마법 렌즈로 눈 색을 바꾸는 거야, 기분 전환을 위해서 흔히 하는 일이니.

눈앞의 여자는 그 마법 렌즈가 먹히지 않는 특이체질이라는 걸 리카스가 알 리가 없었다.

“귀족들이 저를 감춘다는데, 나라고 내 진짜 모습을 감추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리 루이나가 당당하게 물어 왔다.

하긴, 원래 변덕에 의심도 많은 여자라고 했지.

리카스는 찜찜한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새로 은밀한 거래를 틀 사이인 만큼 그녀에 대해 조사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목에 있는 점이나, 손등에 있는 작은 상처 등의 특징을 금세 파악해 냈다.

누군가 분장했다고 해도 쉽게 신경 쓰지 못할 부분들이었다.

틀림없는 진짜군.

리카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카스 틸라입니다.”

“리, 루이나예요.”

루이나 상단주는 까탈스러운 성격이라는 정보답게 손을 스치듯 악수를 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정말 귀족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나요? 대리인들이 온다던데 심지어 대리인들마저도?”

그 말에 리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제 신분을 중요시하는 모양이라.”

“흥.”

리 루이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귀족들은 전혀 위험을 짊어지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우릴 거래 상대로 보긴 하는 건가요?”

이건 그녀가 거래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서신상으로 줄곧 드러냈던 불만이었다.

그랬기에 리카스는 준비된 답을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건 뒤를 봐주는 귀족가 없이는 진행할 수 없는 일이니.”

물론 소금값 인상의 영향은 일대 영지 모두가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가격을 올린 주축은 분명히 있고, 그 전에 신분을 숨기고 소금값을 따라 시세가 오를 생필품들을 미리 사 놓은 세력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 계획에 참여한 니아 상단과 틸라 상단 외에도, 그들의 뒤를 봐주는 귀족들.

그들이 누구인지 틸라 상단주도 궁금해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귀족가는 귀족가인지, 뒤를 캐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나도 알아보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최근 귀족가에 감찰까지 떴다고 하니, 더 조심스러워진 거겠죠.”

그는 루이나 상단주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래도 몇 년간 거래하면서 신뢰를 쌓아 온 거래처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리 루이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디엘렌 가가 최근에 탈탈 털렸다죠?”

그렇게 말한 루이나 상단주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럴 때였다.

―히히힝……!

먼 곳에서 마차 소리가 들려 왔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는 마차 한 개의 소리는 아니었다.

“저분들인가요?”

리 루이나…… 아니, 그녀로 변장한 리벨은 몸을 홱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문장 하나 안 붙은 두 개의 나무 마차가 이 틸라 별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틸라 상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가면과 흰 가면을 쓰고 오실 겁니다. 각자 블랙 경, 화이트 경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하.”

리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감탄했다.

이야…… 네이밍 센스 쥑인다…….

*  *  *

니아 상단주 역시 검은 가면과 하얀 가면의 마차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늦어 죄송합니다.”

귀족들의 대리인보다 늦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새하얘진 그가 거듭 고개를 숙였다.

“괜찮소이다.”

하얀 가면은 괘념치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검은 가면은 가면 너머로 빤히 그를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

리벨은 검은 가면을 살폈다.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데.

하필이면 잠입할 때 이런 변수가 생기는 건 좋지 않았다. 니아 상단주님, 하필 이런 날에 지각을 하셨어야 했을까요?

잠깐 날카로워질 뻔한 분위기는, 틸라 상단주의 유려한 말발로 금세 풀려 나갔다.

“두 분을 모시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두 분의 주인분들을 모실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저희 역시 그분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그가 두 가면 앞에 상자 하나씩을 내려놓았다.

그건 비상하는 매 모양의…… 순금 조각상이었다.

헐.

리벨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떠억 벌릴 뻔했다.

금화 하나만 봐도 평민들은 눈이 번쩍거리는데, 그 금화를 몇백 개는 녹여서 만든 것 같은 까리한 조각상이 눈앞에 있으니 당연했다.

역시 이 동네고 저 동네고 비싸게 노는 사람들은 다르구만.

“저희 상단들이 준비한 작은 성의이니 받아 주십시오.”

틸라 상단주의 말에 두 가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께는 분명히 전하겠네. 섭섭지 않게 대접받았노라고.”

하얀 가면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는 가운데, 검은 가면은 말이 없었다.

“…….”

“…….”

설마 비상하는 매 조각상으로는 부족한 건가요?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틸라 상단주마저 조금 머뭇거릴 정도로 침묵이 지나갔을 때였다.

검은 가면이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리하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별로 탐탁잖아하는 것 같은데?

세 상단주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검은 가면의 심기는 불편한 듯했다.

“아, 그리고 이쪽은 새로 거래를 트고자 하는 루이나 상단주입니다.”

침묵이 다시 시작되기 직전에 틸라 상단주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갑자기 화살 돌리는 게 어딨어!

리벨은 틸라 상단주의 머리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지만 재빨리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리 루이나입니다.”

그 말에 하얀 가면이 반응했다.

“최근에 남부 거래로 큰 이득을 보았다지?”

그건 나인이 정리한 프로필에 있던 내용이었다. 리벨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이번에 좋은 기회가 있다는 이야길 듣고,”

그녀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속삭였다.

“함께하고자 왔답니다.”

작지만 당당한 목소리였다.

리벨이 프로필에서 파악한 이 여자의 특징은, 당당하고 싸가지 없는 발언이었다.

자고로 연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법은, 큰 줄기의 특징만 기억하는 것.

자세하게 고증하려고 하면 오히려 어색해진다는 걸 초짜들은 모른다.

가령 여기가 현대였으면, 초짜는 완벽하게 위장한답시고 주민등록증 일련번호까지 외우는 법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제 주민등록증 일련번호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는 거야말로 치명적인―

“아, 3월 21일부터 3월 26일까지 남부 틸리아 씨 72수레 거래로 2,021골드의 수익을 올렸다던 상단인가.”

그때 검은 가면이 불쑥 입을 열었다.

“…….”

“…….”

리벨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 큰 건이니까 외우긴 했는데 보통 귀족가가 저런 것까지 신경 쓰고 오나?

순간 묘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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