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롤란드 디엘렌 영식에게 할 말이 있어 왔는데.”
시스테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그는 디엘렌 백작을 돌아보았다.
“디엘렌 백작이 자리해도 상관은 없다.”
그 말에 롤란드와 디엘렌 백작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대공을 모셔 온 디란타 가의 기사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련을 해 온 만큼 더 잘 느껴지는 것이다. 대공이 마치 활화산같이 터져 나오려는 마력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지금까지 저런 방대한 마력을 숨겨 왔나 싶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은, 어지간한 기사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련한 디란타 가의 기사들조차 공포에 빠뜨리고 있었다.
억눌린 대공의 살기는 서서히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았다.
엄청나게…… 화나신 거다.
디란타 가의 기사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이 디란타 대공 시스테인을 모신 이래,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표정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눈에는 그 무표정함이, 터져 나오기 직전인 마력을 억누르는 마지막 얇은 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화날 만한 상황이었다.
롤란드 디엘렌이 감히 대공비 전하의 뒤에 사람을 붙여,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것도 모자라 사진까지 보내왔으니.
사진을 찍은 사실은 물론이요, 몰래 그녀의 뒤를 쫓으라는 명령을 했을 롤란드 디엘렌이 어떤 저급한 의도를 가졌을지 생각하면 화가 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던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만 아니라면, 말이다.
기사들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응접실 소파에서 디엘렌 백작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롤란드에게 하실 말씀이라니, 저는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그는 수련을 쌓지 않아 마력을 예민하게 느끼진 못했다. 그렇다고 살기를 제대로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한은 느껴졌다. 뭔가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본능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
시스테인은 디엘렌 백작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기묘하게 빛나는 푸른 눈이 롤란드 디엘렌을 바라보았다.
그 살얼음판 가운데, 머릿속에 꽃밭이 피어 있는 건 롤란드뿐이었다.
다들 긴장하기는.
롤란드는 그런 한가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긴, 이 중에 대공께서 왜 여기까지 친히 행차하셨는지 아는 건 나밖에 없으니 당연하겠군.
롤란드는 가벼운 얼굴로 몸을 폈다.
제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로.
―달칵.
응접실 문이 닫히고, 기사들과 사용인들까지 물러간 응접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보내온 사진을 보았는데.”
그 말에 롤란드는 웃음이 나오려는 얼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애써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 매우 유―”
“사진을 리벨의 허락 없이 찍었더군.”
시스테인은 그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잘라 버렸다.
롤란드가 잠시 멈칫했다. 지금 그게 문제야?
리벨이 보았다면 눈치 제로에 띨빵한 놈이라고 했겠지만, 롤란드 옆에는 지금 이 상황을 대신 파악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그는 아주 마음껏, 실수를 저질렀다. 물론 실수인지도 모르는 채.
그가 시스테인의 굳은 얼굴을 보며 입을 뗐다.
“……물론 사진을 얻는 방식이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스테인의 서늘한 시선은 그 말에도 거두어질 줄을 몰랐다.
근데…… 이 사람, 눈이 좀 빛나는 것 같은데. 아닌가?
롤란드는 그제야 몸을 슬쩍 움츠렸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사라지자 그제야 주변의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럼 뭐가 더 큰 문제라는 거지? 감히 대공비를 따라다닌 자들을 아직 제대로 단죄하지 않은 것? 아니면 그걸 사주한 자를, 죽이지 않은 것?”
마지막 말에는 특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씹어 뱉는 듯한 분노가 묻어나는 듯했다.
롤란드 디엘렌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는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물론 사진을 리벨의 허락 없이 찍긴 했다. 그럼 이런 용도로 쓸 사진을 허락받고 찍는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비의 뒤에 사람을 붙인 셈이니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공비가 대공비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밤에 몰래 딴 놈 집 들어가고, 은밀한 사교계에나 출입하는 여자가 대공비로서 자격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그러니 대공비 뒤에 사람을 몰래 붙였다 해도, ‘디란타 대공가를 위해 애석한 소식이지만 전해 드린다’는 식으로 운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디란타 대공의 반응은 롤란드의 생각 밖이었다.
일단, 리벨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감정이 없다고까지 알려져 있던 시스테인 폰 디란타는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이 사진을 내게 보낸 의도가 뭐지?”
시스테인은 테이블 위에 사진 뭉치를 던져 놓았다.
롤란드 디엘렌이 얼마 전에 그의 앞으로 보낸, 리벨의 사진들이었다.
서늘한 말에 롤란드 디엘렌은 문득 입이 타는 것을 깨달았다.
제 아비처럼 수련을 제대로 하지 않아 살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는, 오한이 심하게 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의도한 그 저급한 생각을, 직접 입으로 읊어 보라 말하고 있는 거다.”
그의 싸늘한 말이 떨어져 내렸다. 사교회에서 언뜻 스쳐 지나가던 무표정한 남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롤란드 디엘렌이 공식 석상에서 본 시스테인 폰 디란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롤란드는 숨이 막힐 것처럼 공기가 무거워졌다고 생각했다.
기분 탓만은 아닌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 대공 전하께서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아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가 말을 더듬거리며 뱉어 냈다.
“뭐?”
시스테인이 짤막하게 되물었다. 롤란드는 긴장감에 말을 고르지도 못하고 쏟아 냈다.
“그 여자는……! 저하고 약혼했을 때도 새벽마다 나가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녔단 말입니다! 몰래 나가서 온갖 남자들을 만나고, 귀족가의 저택부터 사교회에 이르기까지 안 가는 곳이 없었습니다!”
“약혼했을 때?”
시스테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아차.
롤란드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약혼은 외부에 이미, 철없는 리벨 이벨라 영애의 착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는 주변의 공기가 이제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시스테인의 얼음장 같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래서, 그녀가 어디를 들르든 그걸 왜 네가 알고 있어야 하며, 왜 내게 알려 주려고 하는 거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롤란드 디엘렌은 결국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대, 대공 전하를 위해서입니다! 리벨 이벨라가 얼마나 문란하고―”
“그래서 지금 리벨을 욕보이는 건가?”
시스테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 당황한 롤란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대공 전하! 디란타 가의 체통이 있지 않습니까? 밤마다 어딜 나가서 뭘 하고 돌아오는지 모르는 자입니다! 그런 자를 대공비로 들이시는 건 디란타 대공가에도 해가 될 겁니다!”
누가 보면 디엘렌 가가 디란타 가의 가신 가문이라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스테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헛소리를 들었다.
그가 조용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감정에 반응한 마력이 마구잡이로 날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제 앞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롤란드 디엘렌이 입을 노렸다.
“막말로 그게 어디서 누구와 뒹굴지 모를―”
―쾅!
롤란드는 순간 제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건, 디란타 대공이 의자 팔걸이를 거세게 내리쳤다는 것뿐이었다.
―쿠콰쾅!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센 바람과 흙먼지가 방 안을 휩쓸었다.
“콜록!”
저택 한가운데에 있는 응접실에 흙먼지라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가 무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그는 입에 흙먼지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입을 떠억 벌렸다.
디란타 대공이 마주 보고 있던 벽. 벽이, 사라져 있었다.
벽뿐만이 아니었다. 벽과 마주한 천장은 물론이고 응접실의 절반을 넘어, 저택 한쪽이 폭발하듯 날아가 버렸다.
―쿵…… 쿠르르릉…… 끼익…….
1층 한쪽이 없어져 버린 4층짜리 건물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서서히 천장 일부가 기울면서, 저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으아아악!”
롤란드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디란타 대공이고 리벨이고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는 그렇게 간절하게 생각했지만 그의 다리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마치 무언가 자신을 묶은 것처럼, 아니면 제 몸이 의자에 들러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니, 리벨을 의심하라는 말은,”
디란타 대공은 무너져 가는 건물 한가운데에서 저만 태평했다.
둘 사이로 천장의 돌 조각이 떨어져 내리는데도,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더러 롤란드 디엘렌과 리벨 중 누굴 더 신뢰하느냐 묻는 말 같군.”
시스테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웃는 것처럼. 롤란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대공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이건 경고다, 롤란드 디엘렌.”
시스테인이 입을 뗐다.
감히 리벨 뒤에 몰래 사람을 붙이라 명령한 입을 영원히 닫게 해 줄 수도 있고, 죽기 전까지 제 죄를 속죄하도록 고통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콰지직……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방의 천장에 불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무, 무너진다!”
“도망쳐!”
저택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사용인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응접실까지 전해져 왔다.
이대로 두면 롤란드 디엘렌은 사망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스테인이 롤란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쾅!
롤란드가, 디란타 대공이 발을 조금 거세게 굴렀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건물은 강한 지진이라도 온 것처럼 흔들렸다.
―콰직!
그리고 응접실을 받치고 있던 기둥에 가로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저택은 폭삭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살, 살, 살려 주십시오.”
롤란드가 말을 더듬었다. 시스테인의 차가운 시선이 그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