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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69)화 (69/167)

제69화

“난 어떤 저급한 생각으로 그런 사진을 보내 왔는지, 이해하러 온 게 아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나는 굉음 사이에서도 디란타 대공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울렸다.

마치 마력이 담긴 것처럼.

“아쉽게도 벌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거다. 그 어떤 수작도 부리지 마.”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죽여 버리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마력이 조금이나마 방출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문득 생각나는 자줏빛 눈동자 때문일까.

“…….”

시스테인의 눈에서 일렁이던 기묘한 푸른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약간의 이성이 돌아왔다는 증거였다.

그래, 리벨은 그랬다. 디엘렌이 조금 더 괴로워하길 바란다고.

롤란드 디엘렌은 이제야 가진 것을 조금 잃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야 돈도 잃고 인맥도 잃었으니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시스테인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 롤란드 디엘렌은 가진 게 많았다.

비록 감찰기사단에서 조사를 받고, 알레로 가와의 결혼이 사실상 파투 나면서 수많은 기회를 잃었지만 아직 부족했다.

디엘렌에는 백작가라는 작위도 남아 있을뿐더러, ‘롤란드 디엘렌’이라는 개인은 아직 주목받지 않고 있었다.

다들 디엘렌 가와 알레로 가의 결혼이라고만 할 뿐.

‘농담 결혼’이라는 말로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됐던 리벨과는 사정이 달랐다.

“…….”

시스테인이 벽 한쪽을 쳐다보았다.

―쾅!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뭔가 거대한 것이 벽을 후려친 것처럼 벽 한쪽이 날아가 버렸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가 잘못했습니다!”

시스테인은 진정성 없는 반성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롤란드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그리고 벽이 뚫린 덕에 훤히 보이는 저택 바깥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으으아아악!”

날아가는 롤란드의 비명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가 털퍼덕 흙바닥에 처박히는 소리는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시스테인이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쿠르릉! 쿵!

건물은 기다렸다는 듯 완전히 폭삭 무너져 버렸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이는 가운데, 대공가의 기사들이 그에게 다가가 섰다.

“가지.”

시스테인은 그들을 일별한 후 몸을 돌렸다.

눈치 빠른 대공가의 기사들이 마차를 미리 먼 곳으로 빼놓은 덕에, 박살 난 건 디엘렌 가 소유의 마차 몇 대뿐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기사가 마차에 올라타는 시스테인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마차 문을 닫기 전에, 무너진 디엘렌 가의 저택을 돌아보았다.

“…….”

군데군데 기억이 비어 있었다.

저택을 무너뜨리려고 간 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롤란드 디엘렌에게 제가 직접 찾아올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들끓는 마력이 그를 부추겼다. 오랫동안 억눌린 감정은 틈이 생기자 제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날뛰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날뛴 것이 수도 한가운데가 아니라 디엘렌 저택이어서 다행이었다.

지나치게 흥분한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아니, 화가 났다고?

“…….”

시스테인은 이마를 짚었다.

“리벨.”

그가 문제의 이름을 뇌까렸다.

그녀와 결혼할 때에는 그녀가 제 마력을 가라앉혀 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그는,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저 마력을 가라앉히는 그녀가 쓸모 있다 생각했고, 이 폭주하는 마력을 가라앉힐 방법을 알아낼 열쇠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을 선택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것 하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열쇠는, 마력을 가라앉힐 방법을 알려 주는 열쇠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곳에 쓰이는 열쇠였던 모양이다.

“…….”

리벨은 그의 마력을 가라앉히기도 하고 날뛰게도 하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가 마력을 진정시킬 열쇠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시스테인이 오래전부터 걸어 잠가 두었던 마음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였다.

“하.”

시스테인은 짧게 숨을 터뜨렸다.

그는 누구보다도 저를 객관적으로 보는 데에 익숙했기에 알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폭주한 것도 리벨 때문, 그랬던 자신이 가라앉은 것도 리벨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저를 흥분시키고 폭주하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녀와 헤어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 폭주를 가라앉힐 수 있을지, 대공령에 가면 괜찮아질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

한마디로, 그는 그녀와 헤어지기 싫었다.

어느새 자줏빛 눈동자가 눈에 띄고, 자줏빛의 물건들이 눈에 띄고, 그것이 그녀 같고, 저택에 돌아가면 그녀가 저와는 전혀 다른 발랄한 모습으로 저를 맞이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익숙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여는 열쇠든 상관없이, 그는 리벨과 떨어지기 싫었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꿰찬 리벨이 나가는 순간, 그의 마력은 제어할 수도 없이 뒤흔들릴 터였다.

“……아.”

그가 탄식했다.

그가 오랫동안 걸어 잠가 두었던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만 있던 방에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고.

방의 주인인 그가 그 빛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그의 방에 들어오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하지만 그렇기에 눈을 뗄 수 없는 한 줄기의 강렬한 빛.

그건, 사랑이었다.

*  *  *

디란타 대공이 한바탕 휩쓸고 간 디엘렌 저택.

아니, 디엘렌 저택이었던 곳.

간신히 살아난 롤란드 디엘렌과 디엘렌 백작은 무너진 저택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냐, 아들아?”

디엘렌 백작은 얼마 전에 중얼거렸던 말을 또 하고 있었다. 롤란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땐 답할 정신머리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없었다.

진짜 이게 뭐지?

그의 머리에는 흙먼지와 땅바닥의 진흙, 잡초까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그게 떨어져 나갈 때까지 머리를 마구 흔들어 보아도 눈앞의 폭삭 무너진 저택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건 맨손으로 4층짜리 저택을 폭삭 무너뜨린 디란타 대공뿐이었다.

그는, 괴물이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대체 뭐지?”

어떻게 한 건지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저택은 박살 나고, 알레로 가는 연회에서부터 대화를 시도해도 씹어 대더니 의전원 앞에서는 기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질을 냈다.

그 기자들이 만약 저택이 무너진 꼴까지 본다면?

“…….”

누가 무너뜨렸냐고 묻겠지? 거기에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이라고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물론 대공이 남의 저택을 무너뜨린 건 문제였다. 이건 저택이 무너진 쪽에서 영지전을 걸어도 할 말이 없었다.

문제는 영지전을 건다고 디엘렌이 디란타를 이길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냥 자폭하는 길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 사건이 알려져도 디란타를 탓하는 게 아니라, 대체 디엘렌이 무슨 짓을 했는지부터 궁금해할 터였다.

대체 그 감정이 없다는 소문까지 있는 시스테인 폰 디란타를 어떻게 화나게 했으면 저택을 부수고 가 버렸는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의 분노를 샀는지.

“…….”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이 일이 바깥에 알려져 봐야 좋은 일은 없었다.

결국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분노를 짓씹던 롤란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롤란드?”

“갈 곳이 있어서요.”

저를 부르는 디엘렌 백작의 목소리에 그는 짧게 답했다. 디엘렌 백작이 멈칫했다.

“어딜? 설마 디란타 대공의 만행을 알릴 생각이냐? 이건 우리 가문에 오히려 독이 될 게다.”

“알아요. 그거 아닙니다.”

대충 씻고 옷 갈아입고 가야겠다.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

―쿠르릉, 쿵!

그가 저택, 아니 저택이었던 것을 돌아보는 순간,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저택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씻을 곳도 옷도 다 저 안에 있었다.

“……그냥 가야겠군.”

그가 손짓했다.

“마차를 준비해라.”

그 말에 옹기종기 모여 어쩔 줄 몰라 하던 사용인들 중, 하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도련님. 그…… 마차가 거의 다 부서졌습니다.”

“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젠장!

―팍!

그는 괜히 바닥을 걷어찼다. 물론 디란타 대공이 그랬을 때처럼 주변이 뒤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단신으로 저택을 무너뜨리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벽을 부수는 자.

괴물이다. 디란타 대공령엔 괴물들이 산다더니, 디란타 대공까지 괴물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황가에서 대공이란 위치로 격리해 버린 이유가 있던 거지.

제멋대로 생각한 롤란드가 씹어 뱉듯 말했다.

“거의 부서졌으면 남은 건 있다는 거네. 당장 끌고 와.”

“그…….”

하인은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결국 마차를 끌고 왔다.

문짝 한쪽이 반쯤 떨어져 달랑거리는 처참한 몰골의 마차를.

―콰직!

롤란드는 달랑거리는 마차 문을 확 떼어 던져 버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해.”

“어디로 갈까요?”

“이곳으로.”

그가 마부에게 검은 카드를 보였다. 카드에 있는 약도를 본 마부가, 행선지의 이름을 뇌까렸다.

“‘렐라 의상실’……? 알겠습니다.”

―히히힝!

저택이 무너지는 바람에 흥분한 것이 식지 않았는지, 날뛰려는 말들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그렇게 덜렁거리는 마차 안에, 처참한 몰골로 탄 롤란드 디엘렌은 곧 렐라 의상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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