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시스테인은 감정 때문에 제 마력이 폭주했다고 했다.
리벨은 이내 자신이 몰랐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마주하게 되었다.
“……설마, 그때 이후로 감정을 억누르고 사는 거예요?”
폭주하지 않으려고?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낮은 숨이 흘렀다.
“그러다가,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의 시선이 리벨을 향했다. 푸른 눈동자 안에 리벨의 모습이 담겼다.
감정을 억누르다 못해 그 자신조차도 무뎌지려고 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리벨 옆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도 마력이 가라앉았다.
그건 평생 마력에 휩싸여 지내온 자신조차 못 하는 진짜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날 밤도 그랬습니다, 리벨.”
시스테인이 리벨의 목가로 손을 뻗었다.
온기 이상의 찌르르한 느낌이 리벨의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당신과 처음 만난 날.”
그날은 시스테인이 카리스와 만난 나이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카리스는 여전히 시스테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열 살 때의 사고가 폭주하는 마력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고도 그랬다.
어릴 때 차라리 시스테인이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괴물로 죽어 버렸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강대한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만일 시스테인 폰 디란타가 반기를 들고, 어머니인 황태후 리엔의 총애가 그에게로 간다면?
변덕 심한 어머니 리엔이 그의 손을 들어준다면?
카리스는 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를 경계했다.
‘되도록 대공령에서 나오지 마.’
카리스는 그날 그렇게 말했다. 시스테인은 차라리 감옥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괴물이라 인정하게 만드는 그 대공령이, 그는 너무나도 싫었다.
“……술은 감정을 마구잡이로 날뛰게 하죠.”
기억을 되짚어보던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시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은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당신을 만났고.
시스테인의 손이 리벨을 끌어당겼다.
“……!”
리벨이 눈을 크게 뜨는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마치 처음 만난 날의 그 밤처럼.
“그날 밤도, 당신이 나를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의 숨결이 리벨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당신은 내가 대공령을 벗어나 마력을 쓰지 않아도, 마력을 제어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내 옆에서 감정을 조금이라도 드러낼 수 있었던 걸까.
리벨은 지금도 쓴맛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할, 그녀만이 볼 수 있는 그의 감정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탓에 조금 어색하게 드러나는 표정.
“그래서 내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조적인 웃음이 드러났다.
리벨이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의 얼굴에서 다양한 표정을 보는 건, 신기하면서도 슬픈 일이었다.
“난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고요.”
“아…….”
리벨은 이제야 그 말이 완전히 이해가 갔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력을 가라앉히기 위한 유일한 도구, 라고.
하지만.
“이용이라기보단,”
리벨의 생각은 달랐다. 줄곧 듣고만 있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게 손해가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용당한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리벨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웃었네요?”
“예, 웃었습니다.”
이번엔 시스테인도 부인하지 않았다. 조금 쓴 맛이 더해진 웃음이 그렇게나 어색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이 제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통증으로 옅은 숨을 내뱉은 그가 말했다.
“당신 앞이라서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리벨은 그 짧은 순간 그의 눈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는 걸 분명히 보았다.
저번에 봤던 게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녀가 멈칫했을 때였다. 시스테인이 더운 숨을 내뱉었다.
“이제 한계입니다, 리벨.”
―덜컹!
리벨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와 그녀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의 열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의자에, 리벨이 푹 묻혔다. 시스테인의 손이 양쪽 팔걸이를 짚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해요.”
그의 품에 갇힌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녀에게 시스테인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그날 밤처럼, 나를 가라앉혀 주세요.”
* * *
리벨에게 왜 마력을 가라앉히는 능력이 있는지, 시스테인은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창백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는 보다 갈급해 보였고, 리벨을 순식간에 침범해 왔다.
그래도 그는 끝내 리벨을 거칠게 대하지 않았다. 리벨은 제게 닿아 올 때마다 손끝이 떨려 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아주 아끼는 것을 만지는 것처럼.
그래서 리벨은 입을 떼었다.
“시스는 나를 이용한다고 했잖아요.”
내 안에 당신을 담는 것이 당신을 가라앉게 하는 거라면, 당신은 몇 번이고 제멋대로 나를 안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갈증을 느꼈다는 지금조차도 그는 그녀를 충분히 배려해 주고 있었다.
“예.”
방 안의 조명은 꺼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스테인이 손으로 쓸어 버린 책상 위에는 그의 겉옷이 깔개처럼 깔려 있었다.
그 위에 누운 리벨은 시스테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제 목을 끌어안은 채 가깝게 닿아 있는 그에게 말했다.
“아닌 것 같아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그의 표정은 이제 조금 더 풀려 있는 듯했다. 아까보다 좀 더 편안하게.
이 사람이 나를 정말 마력을 가라앉히는 도구로만 생각한다면, 이렇게 내게 시선을 맞춰 오지 않을 것이다.
리벨이 생각했다.
내게, 당신을 가라앉혀 달라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으면서도 내가 숨 고를 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벨의 시선이 그의 떨리는 손끝을 거쳐, 밭은 숨을 내쉬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이 모든 것에, 감정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도구를 감정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리벨이 물었다. 적어도 그녀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스쳐 지나갈 것 같았던 관계였다.
원작 내용에 따르면 절대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사람.
하지만 거기서 이 사람은 내 명예를 살려 줄 동아줄로 변했다가, 리엔 황태후 덕에 목숨줄이 매달린 무언가로 변해 버렸다.
그러다가 그에 대해 점점 알게 되면서, 리벨은 그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
땀에 반짝이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리벨은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는 정말, 정말로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겠다고.
이 안쓰러운 사람에게.
감정을 감추고 억눌러서라도 사람들 옆에 남아 있고 싶었다던 이 사람에게.
나마저 당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그에 대한 나쁜 기사를 썼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겼기 때문에, 들키면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일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에게…….
감정을 애써 감추고 억누르느라 제 안에 상처가 난 이 사람에게.
그 상처가 자극될 때마다 폭주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혼자 고통을 삭였을 이 사람에게.
당신이 지금 희망이라 생각하는 나조차 당신을 속였노라고, 당신이 폭주할 위험 속에서도 배려하고 있는 나조차 당신에 대해 뒷이야기를 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에게 얼마큼의 상처가 될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무덤덤한 얼굴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도 가지 않아서.
“…….”
리벨은 시스테인의 푸른 눈동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이 만남은 너무나도 잘못되었다고.
처음에는 단지 황태후 폐하의 과제를 위해 당신을 만났고, 점점 진심으로 당신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궁금해하던 잠긴 마음속의 감정을 본 지금.
……정말로,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됐다.
어떡해.
리벨은 속으로 되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지금까지 내게 한 모든 행동이, 지금의 이 모든 행위에,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나를 도구로만 여겼다고 할 수 있어요?
조금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울린 순간이었다.
―탁.
시스테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면서 그의 그림자가 완전히 그녀를 덮었다.
두 사람이 다시 가까워졌다. 리벨은 그가 자신을 뒤흔들기 전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답하는 걸 들은 것도 같았다.
아니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