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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82)화 (82/167)

제82화

몽롱한 기분. 꿈속이다.

리벨에게 보이는 곳은 그녀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방이었다.

달빛이 흐릿하게 비쳐 들어오는 곳. 그녀는 시스테인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

말없이 오가는 시선도 잠깐, 온통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흐릿한 시야가 초점을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맸다.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시스테인의 열기가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 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에 달아올랐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롤란드……!’

*  *  *

그 확 깨는 이름이 울리는 순간 리벨은 번쩍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자 아까 그곳이 아니었다.

일단 밤도 아니었고 달빛 대신 햇빛이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 왔다.

물론 그 빛은 아주 가늘어, 방 안을 간신히 밝힐 정도였다.

하지만 리벨은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꿈이지?

그런데 마냥 꿈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감 있었다.

무엇보다 그 배경에 그 상황은 꿈에서 몇 번이나 보았다.

제가 시스테인 위에 있었던 것도, 시스테인에게 벽치기했던 것도, 아니 그 전에, 시스테인을 방으로 끌고 들어갔던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그건…….”

리벨이 입을 우물거렸다. 그으으랬다고 할 수 있지! 그래, 사람이 좀 적극적일 수도 있지!

뭐가 문제야! 억지로 한 것도 아니고! 하하하하!

하지만.

‘롤란드……!’

인간적으로 이건 개꿈이 아닐까요? 리벨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움직이자 새삼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시스테인.

그의 고른 숨소리가 리벨을…… 미치게 했다.

“개꿈이겠지?”

리벨은 그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건 정말 개꿈이어야 했다.

사아아람이 말이야! 아무리 밤을 핫하게 보냈기로서니, 그리고 그 X끼가 너무 X같기로서니 이런 꿈을 꾸면 곤란하지! 하하하하!

오늘은 문 앞에 소금이라도 뿌려야겠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그렇게 필사적으로 생각하던 리벨의 표정이 돌연 침울해졌다.

애써 부인해도 알고 있었다.

이건…… 이건 개꿈이 아니었다.

리벨은 결국 두 손으로 거듭 얼굴을 쓸어내렸다.

―팡팡팡!

이불을 걷어차면서 발광을 해도 그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떡해!

어떡해!!!!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잖아!!!!

아니, 시스는 이런 사람이랑 결혼할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당시 시스테인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내가 마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롤란드가 아니라 카리스 폐하를 불렀어도 결혼했을…….

아아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리벨이 머리를 싸맬 때였다.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안 좋은 꿈을 꾸셨습니까.”

그 말에 리벨은 얼굴이 새빨개져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귀까지 완전히 달아올라 버렸다.

“안……좋은, 꿈이라고 할 수 있죠. 아니, 꿈이죠. 안 좋은 꿈.”

맞지. 나한텐 좋았지만, 아니 입만 막고 있었어도 좋았지만.

내가 쓰레기인 꿈, 아니 쓰레기였죠, 나는! 내가! 으아아아악!

리벨이 이불 속으로 쏙 숨어 버렸다.

*  *  *

아침을 먹을 때까지도 리벨은 멍한 상태였다.

“식사는 가벼운 것들로 준비했습니다.”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배려해 침실에서 가볍게 이루어지는 식사였다.

하지만 리벨은 그래도 좀처럼 식사를 들지 못했다. 어젯밤의 여파 때문이 아니었다.

몸 이곳저곳이 당기는 건 물론 힘들었지만, 정신적인 데미지가 너무 컸다.

롤란드? 롤란드??? 거기서? 그 상황에서???

그녀는 식기를 감히 들 생각도 안 들었다.

“리벨.”

그때 시스테인이 그녀를 불렀다. 리벨이 화들짝 놀라 그를 보았다.

“네?”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린 채였다. 아니, 죄는 지었다. 확실하게 지었다.

심지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였다.

“…….”

그쯤 되자 주인을 살리기 위해 리벨의 행복회로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그런 걸 기억하고 있으면 정떨어져서라도 나랑 결혼을 안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따지려면 진작 따지지 않았을까?

위이이잉! 그녀의 행복회로는 열심히 일했지만 좀처럼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시스테인은 너무……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혹시…….”

리벨은 결국 입을 열었다.

“예.”

시스테인의 상태는 어제보다 괜찮아 보였다. 보다 멀쩡해진 얼굴의 그가 곧바로 답해 왔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안 괜찮아!

리벨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걸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 처음 만난 날 밤…… 기억하세요?”

시스테인은 그 말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답했다.

“예.”

아니, 그걸 기억하고 계세요?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면 세상살이 퍽퍽하지 않으세요?

아니지, 그래, 첫날밤은 나도 기억이 나. 디테일이 문제지. 음음.

“그, 빠짐없이 전부……?”

리벨이 다시 물었다.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도 시간이 지났는데 좀 까먹으셨겠지?

나 같으면 내 위에서 다른 여자 이름 부르는 남자면 당연히 안 까먹고 두개골을 갈라 버렸을…… 아아아니야!

“예.”

리벨은 생각에 빠져 그의 답을 놓칠 뻔했다.

“네?”

리벨이 되묻자, 시스테인은 그녀에게 똑바로 시선을 맞추어 왔다.

“깨끗하게, 완전히, 빠짐없이 전부 기억합니다.”

“…….”

그걸 그렇게 못 박아 주실 필요가 있을까요? 어흐흑…….

시스테인은 아무래도 모든 걸 다 기억하는 게 분명했다.

리벨은 포크를 잡으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설마…… 그…….”

이걸 뭐 어떻게 물어보지? 리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물었다.

“롤란드 디엘렌에 대해서 알아보신 것도, 그날…… 때문인가요?”

차마 자신이 그날 롤란드 이름을 불러 대서 알아보셨냐고 물어볼 순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시스테인은 이상하게도 그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에는 시스 성격에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부인의 전 남친(?)을 조사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설마, 밤에 이름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찾아본 거면…….

“그건 업무였습니다.”

그때 시스테인이 간단하게 답했다. 리벨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터뜨렸다.

“그렇죠? 업무였죠?”

맞아, 감찰이 디엘렌 털었잖아! 그래, 그것 때문이었을 거야! 리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달칵.

리벨은 그제야 수프를 한 스푼 떴다.

“…….”

그런 리벨에게 시스테인의 시선이 박혔다. 그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채 생각했다.

그는, 사실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원래 디엘렌 가가 수상쩍긴 했지만, 다른 안건들 중에 유독 디엘렌 가에 시선이 갔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덕에 감찰 일은 실마리를 잡았으니 물론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첫날밤 일을 굳이 물으시는 건.

시스테인은 리벨이 스푼을 거듭 수프에 집어넣는 걸 보며 말했다.

“첫날밤의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콜록!”

리벨은 수프를 그대로 분사할 뻔했다.

“네?”

당황한 그녀에게 시스테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 이름을 모르시지 않았습니까.”

“…….”

리벨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평온한 시스테인의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리벨의 불안한 시선이 마주쳤다.

이……름이란 말을 굳……이 한다는…… 건……?

리벨의 불길함이 구체화되었다.

내가 첫날밤에 딴 놈 이름을 불렀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

리벨이 설마 아닐 거야, 하는 회로를 다시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이 못을 박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자 때문에 리벨의 심기가 불편했던 것으로―”

“우워어어어!”

리벨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시스테인이 멈칫할 정도였다.

곰 같은 소리를 지른 리벨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진짜로 미안해요!”

이걸로 사과가 될 리가 없지만 정말 미안해! 내가 미안해!!!

이름 몰랐다고 그런 순간에 남 이름 불러도 되는 거냐고! 그렇게 멀쩡하게 괜찮은 얼굴 하지 말라고!

리벨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가 정말 괜찮아서 그러는 건지, 감정을 감추는 데에 익숙해서 저렇게 담담한 건지 헷갈리려고 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여기서 더 말을 덧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벨이 입을 오물거릴 때 시스테인이 덧붙였다.

“―다시, 그러시지만 않는다면요.”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리벨은 그 시선에서 아주 약간의 불쾌감을 찾아낸 것 같았다.

그가 미처 닫지 못한, 아니 이제 열리기 시작한 문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그의 감정.

“이제는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니.”

“다당연하죠.”

제가 미쳤다고 그 X끼 이름을 부르겠습니까? 리벨은 얼굴에 황급히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계속했다간 혼절할 것 같았다. 귀가 빨개진 리벨이 사용인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 쫓아내는 거 까먹었다! 뒤늦게 나가려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

없네? 사용인들은 이미 자리를 비운 지 오래인 듯했다.

“제가 내보냈습니다.”

시스테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벨의 입가에 파르르 떨리는 미소가 그려졌다.

이렇게나 감동적이고 배려 넘칠 수가.

“그랬군요…….”

고맙습니다, 이런 쓰레기에게……. 리벨은 결국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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