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그런데 몸 상태는 어떠세요?”
리벨이 정신을 차린 건 식사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시스테인은 그녀의 식사 속도에 맞추어 주고 있었는지, 보다 일찍 식사를 시작했는데도 아직도 식사 중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샐러드로 손을 뻗던 그의 입꼬리가 조금 휘어졌다.
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거 웃은 거지?
“훨씬 나아졌습니다.”
“다행이네요.”
리벨 역시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그때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제 복귀가 늦은 탓에, 어머니와의 티타임에서 곤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그와 함께 못 간 것보단 중간에 나온 게 좀 더 곤란했지만, 여하튼 결말이 좋았으니 되지 않았는가?
“괜찮아지셨으니까 다시 날 잡으면 되죠.”
오늘만 날입니까? 리벨이 밝게 웃었을 때였다.
“…….”
시스테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잠깐의 침묵에 리벨이 그를 보았다.
“시스?”
“그건,”
입을 뗀 시스테인이 조금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한동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직 많이 아프신가? 리벨이 그를 살피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동안은, 황성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푸욱.
그가 음식에 식기를 찔러 넣는 소리가 유독 방 안을 크게 울렸다.
담담한 목소리는, 그다음이었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니, 이런 불안정한 상태로는 갈 수 없습니다.”
작은 목소리지만 분명히 들었다.
리벨이 살짝 입을 벌렸다.
의사도 마법사도 부르지 않을 때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
리벨은 식기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태후와 황제에게 제 상태를 말할 생각이 없었다.
* * *
시스테인 때문에 무산되었던 리엔과의 티타임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오늘도 시스테인은 오지 않았다.
대신 황제 카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공령에 다녀오는 사이에 기사단 일이 많이 밀린 모양이에요. 그래도 다음에는 꼭 참석하겠대요.]
미리 리엔에게 죄송스럽다는 말과 함께 소식을 전했던 리벨은, 의외의 손님을 보고 입을 떠억 벌렸다.
“오랜만이네?”
카리스가 손을 들어 보였다.
“폐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인사도 안 하네?”
아아아니! 리벨이 고개를 바로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 뵙고말고요! 근데 여긴 왜 계시냐고! 리벨은 벌써부터 먹지도 않은 다과가 넘어올 것 같았다.
그녀의 인사를 들은 후에야, 카리스가 양손을 펼쳐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 오면 안 되나?”
리벨은 그 말에 고개를 홰홰홱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죠.”
얼마든지 오십쇼, 넵. 근데 공사다망하신 분이 여긴 대체 왜 오셨는지…….
리벨은 좀 울고 싶었다.
그러는 가운데 리엔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스가 못 온다는 연락은 받았어. 기사단 일이 바쁘다고.”
리엔은 카리스를 가리켰다.
“그래서 대신 카리스를 불렀는데.”
그녀가 가볍게 말했다.
“불편하다면 내보낼게.”
해사한 웃음이 아닌 걸 보니 황태후 리엔은 진심이었다.
요컨대 지금 저더러 불편하다고 황제 폐하를 내쫓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
황태후 폐하는 괜찮으시더라도 제 앞일이 막막해지지 않을까요?
리벨은 전생의 직장 생활에서부터 다년간 수련한 사회적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빵긋!
“그럴 리가요! 오랜만에 뵈어서 너무 기뻐 가지고요.”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하하하하하하!
리벨이 웃으며 가시방석에 착석했다.
* * *
그렇게 리벨만 불편한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시스테인의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가 원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시스테인.
그를 생각하니 먹던 쿠키도 넘어오는 기분이었다.
“…….”
무엇보다 그는……. 리벨은 밝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자지간을 바라보았다.
시스테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 리엔과 카리스를 보니 새삼스럽게 다시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전에 황제 카리스는 리벨을 불러 직접 말한 적이 있었다.
시스테인을 경계한다는 것을.
하지만, 리엔 황태후는 왜 시스테인이 마음을 닫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시스테인이 어렸던 시절 그를 디란타에서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였을 때.
리엔은 그가 어떤 결심으로 이곳에 왔는지, 새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리벨에게 그의 마음을 열어 달라는 부탁을 한 걸 봐서는 아마, 지금도 모를 가능성이 컸다.
알려 드려야 할까.
리벨이 고민했다.
“아가, 넌 안 그래?”
“저도 당연히 그렇죠.”
리벨은 두 사람이 뭔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맞장구를 쳤다.
다행히 이상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리엔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간간이 웃고, 어깨를 두드려 주거나 말장난을 치는 모습.
이렇게만 봐서는 한 나라의 황태후와 황제, 폭군이라는 두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족 같았다.
물론 카리스의 의심 많은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이 모습에 어떤 이면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겉보기에는 가족 같았다.
시스테인이 열 살, 폭주한 이후로 잃었을 그 가족과의 시간이 이런 거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가 이런 시간을 가졌다면 그 먼 디란타에서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처럼 재미있네. 시스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리엔이 손을 펴 보였다. 카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일이 더 좋다는데 어쩌겠어요.”
“그러게. 그 애는 하루라도 일이 밀리는 걸 견디지를 못하잖아. 지금은 수도에 급한 일도 없는데.”
리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리벨은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가 오지 못하는 건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두 분을 해칠까 두려워서 그런 거라고.
……알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말하면 안 되겠지?
시스테인은 그 사실을 숨기고자 했다. 그런데 리벨 자신이 밝히는 건, 누가 봐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가,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리엔이 불쑥 리벨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리벨은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를 뻔했다.
“네, 네?”
“왜, 궁금한 거라도 있니?”
리엔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말에 카리스의 시선도 리벨을 향했다. 흥미롭다는 시선이었다.
“아뇨. 없습니다!”
리벨은 고개를 홱홱 저었다. 없어요, 그런 거!
하지만 리엔은 그녀의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아까부터 왜 그렇게 그 입을 오물거릴까?”
그녀의 검지 끝이 리벨의 아랫입술을 꾸욱 눌렀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말한 리엔이 눈부시게 웃었다.
이, 이 미소는!
혹시 뭔가 알고 계신 건가?
아니 근데, 폭주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둘이 있을 때만 한…….
리벨은 그 이야기 전후로 있었던 뜨거운 밤이 떠올라 얼굴이 홍당무만큼 빨개져 버렸다.
“아가, 얼굴이 터질 것 같아.”
리엔이 풋 웃었다. 그러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혹시, 밤일에 관한 거니?”
“아아아아니요?”
리벨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러는 중에 카리스가 무관심하게 말했다.
“해도 상관없어.”
뭐뭐뭘요? 밤일 얘기를요? 지금요? 여기서요?
“나도 상관없어, 아가.”
리엔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상관이 많거든요? 아주 많거든요? 무엇보다 그런 고민 아니거든요?
리벨이 식은 찻잔을 급히 들어 입술을 축였다.
여기서 입 다물고 있으면 나 수상하다는 거 광고하는 꼴이다!
―달칵.
결국 잔을 내려놓은 리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시스에게서…….”
두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이 제국에서 가장 무서운 두 사람의 시선이었다.
“어릴 때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리벨은 슬그머니 두 사람을 살폈다.
카리스는 ‘어릴 때의 이야기’라는 말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리고 리엔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가, 시스하고 정말 많이 가까워졌구나.”
옅은 미소를 지은 리엔은, 리벨의 식은 차를 치워 버리고 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쪼르르륵.
잠깐의 침묵을 깨고, 카리스가 불쑥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리벨은 김이 폴폴 올라오기 시작하는 찻잔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어릴 때 사고가 있었다고 했어요.”
“하.”
그 말에 카리스는 비웃음 비슷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왼팔 소매를 걷어 보였다.
“……!”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광포한 괴수가 할퀴고 간 자국처럼, 거친 흉터가 팔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때 난 상처야.”
카리스는 제 왼팔에서 복부를 거쳐, 오른쪽 어깨까지 쭉 선을 그어 보였다.
“이렇게 푹 파였지.”
“세상에.”
팔에 저 정도 상처가 남았으면 몸이나 어깨에도 만만치 않은 상처가 남았을 터였다.
당시에는 엄청난 상처였을 것이고.
“……끔찍한 사고였지.”
리엔이 카리스의 팔을 보다가 말을 보탰다. 카리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시스테인이 그때 일에 대해서 뭐라고 했지?”
“……시스는.”
리벨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다른 건 말하지 못해도 이건 말할 수 있었다.
“폐하께, 무척 죄송해했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카리스는 기도 안 찬다는 얼굴이었다. 리벨은 눈을 가늘게 뜬 그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뻗어 나오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몸에 오한이 일게 하는 기운.
―탁.
그때 리엔이 카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만하라는 듯이.
“…….”
카리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제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그 후로 디란타 대공령으로…… 자진해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리벨은 그들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시스테인이 그 땅을 선택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마력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곳이 오직 거기뿐이라서 그랬다는 것.
이분들은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있을까?
리벨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폈다.
그때 카리스가 리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