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95)화 (95/167)

제95화

물론 정황상 그 비슷한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틀림없이 철벽에 얼음장이었을 거고, 쥬리 백작 영애 혼자만 신나게 들이댔을 것이다.

리벨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질문을 철회할 수가 없었다.

리벨 자신의 끊임없는 방해 덕에 시스테인과 이제 처음 만난 쥬리 백작 영애가, 해봐야 별 이야기를 하진 않았을 걸 알면서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까의 냉랭했던 푸른 눈동자에는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리벨은 그 변화에 눈을 크게 떴다.

“……!”

살얼음이 낀 호수에 이른 봄이 찾아온 것처럼, 그의 푸른 눈동자가 온기를 담고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그가 그 아름다운 눈동자로 리벨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저를 흠모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 네?”

뭐요? 그런 얘기를 이렇게 담담하게?

그야 들이댈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갑자기요?

그걸 또 곧이곧대로 전하는 이 사람도 참 별난 사람이었다.

리벨이 어이가 없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시스테인이 보고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외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외모는 또 왜요?”

리벨은 저도 모르게 답을 뱉어 버렸다.

“잘생겼대요?”

불퉁한 뒷말이 붙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금발이 밤하늘과 잘 어울린다고 했습니다.”

“…….”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스테인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보고하는 목소리였다.

저 목소리, 저 톤 그대로 ‘이번 전투에서는 부상 다섯 명, 중상 한 명 외 피해 없습니다.’ 같은 보고를 올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눈부신 미모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의 자화자찬은 자화자찬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

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대체 뭘까.

제 입에서 나오면 자화자찬이 되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시스테인의 말은 진실이기는 했다. 정말 테라스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그의 미소는 눈이 부셨으……니까가 문제가 아니라!

리벨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저게 테라스까지 쫓아와서 그런 뻔한 수작을 걸었다고?

“혹시 나중에 어디서 따로 만나자거나,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진 않았어요?”

쥬리 백작 영애는 시스테인의 외모를 보고 접근한 게 아니었다.

그가 권력에 관심이 있는지 떠보려고 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오픈된 장소에서 물어보려고 하진 않았을 거고, 뭔가 다른 급한 용건이 있는 것처럼 굴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와 단독으로 대면해서 그를 떠보려고 했을 테니까.

“했습니다.”

시스테인은 그녀의 말을 간단히 시인했다. 리벨은 순간 분노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시스는 그런 데 관심 없다니까! 반역 일으켰다가 모가지 뎅겅은 너나 당하라고!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시스테인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거절했습니다.”

“……아.”

리벨은 그 담담한 말을 들은 순간 어깨에 준 힘을 풀어 버렸다.

“그녀와 따로 만나 이야기할 생각, 없습니다. 리벨.”

그의 낮은 목소리가 테라스를 울렸다.

……이런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 믿고 있었지만.

리벨은 뒤늦게 볼을 붉혔다.

마치 믿지 않았던 것처럼, 바람 현장을 잡은 것처럼 취조한 꼴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가 쥬리 백작 영애가 원하는 그 어떤 답도 들려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순간 치솟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것 같다.

“…….”

리벨이 입을 뻐끔거렸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기에.

거리를 두겠다고, 마음을 멀리하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러기가 힘들었다.

잠시 테라스에 어색한 침묵이 다시 지나갔다.

“……시스.”

리벨이 입을 열었다. 시스테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답했다.

“예.”

“혹시, 쥬리 백작 영애랑 내 마차, 만났던 거 알고 있었어요?”

분명 시스테인에게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현장에 디란타 가의 기사들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시스테인은 다시 간단히 답했다.

“예.”

……그림자들은 알리지 않았을 거고, 감찰기사단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야 간단했다. 당시 리벨은 그의 눈에 쥬리 백작 영애란 글자가 박히길 원치 않았다.

원작의 그가 그랬듯, 혹시나 그녀에게 말려들어 상처라도 받을 것 같아서.

“아까 하려던 이야기가 그거였습니다.”

그때 이어진 시스테인의 말에 리벨의 생각이 싹 날아가 버렸다.

리벨은 순간 아까처럼 부리부리하게 눈을 떴다. 시스테인은 그 시선에 낮게 웃었다.

“예, 그렇게 보셨을 때요.”

“앗.”

리벨은 그제야 제 얼굴 상태를 알아차렸다.

분명 이 사람 앞에선 나도 기자 벨이 아니라 귀족 영애 리벨이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의 빗장을 풀고 있는 건 시스테인뿐만이 아닌 듯했다.

리벨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스테인의 마음이 열리는 건 좋았지만, 제 비밀이 쏟아져 나오는 건 위험했다.

그에게나, 그녀 자신에게나.

정신 차리자. 리벨이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을 때였다.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부드러운 울림을 가지고 리벨에게 다가왔다.

리벨이 살짝 입을 벌렸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눈치가 빠르네!’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시스테인이라는 점에서, 그 말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명백히 ‘배려’하고 있었다.

배려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고,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

옅은 미소와 함께 나온 시스테인의 말에는 명백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짙은 감정이.

진심을 담은 그의 감정이. 억눌림에서 서서히 해방되고 있는 자유로운 그의 감정이.

테라스에 단둘이 남아 그런 건지, 그 감정은 리벨에게 유독 가까이 닿아 오는 듯했다.

안 된다니까.

이러면, 안 된다니까.

리벨이 눈을 감았을 때였다.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놀라셨습니까.”

“네?”

화들짝 놀란 리벨이 눈을 떴다.

아까보다, 그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리벨이 멍하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제가 쥬리 백작 영애와 있는 것에.”

아니, 틀림없이 가까워졌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숨결이 닿아 오는 듯했다.

더 이상 테라스의 찬 바람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목가에서 시작된 열기가 등허리를 타고 흘러, 찌르르한 감각이 온몸을 뒤흔들 정도로.

“아니면,”

그녀가 멈칫했을 때였다. 시스테인이 그녀에게 반걸음 더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물러서려는 그녀의 몸은, 그의 팔에 막혀 버렸다.

두 사람의 몸이, 아주 약간의 틈을 두고 얽혔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물었다.

“의심하셨습니까?”

그것만큼은 아니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와중에도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제가 그녀와 긴밀한 시간을 가지겠노라, 할 것 같으셨습니까.”

리벨은 그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에 제가 비치는 게 보였다.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상상도 못 했을 정도로 부드럽게 녹아내린 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눈.

그를 그렇게 녹아내리게 한 건 명백히 그녀였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이렇게 마주할수록 그 사실만 짙어져 갔다.

리벨이 원하면서도 원치 않는 그 사실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욕심이면, 이대로 멈춰 버려도 좋을 것 같다.

“무엇을 우려하여 이렇게 급히 테라스에 오셨는지는……, 감히 짐작하여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울렸다.

뭐 때문에 이렇게 급히 들어왔는지, 그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리벨의 얼굴이 조용히 달아올랐다.

쥬리 백작 영애가 돌아 버렸거나 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면 초면에 그에게 반역 이야기를 꺼냈을 리 없다.

그냥 친분만 먼저 쌓으려고 했겠지.

하지만 그것조차 리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작에서처럼 그가 쥬리 백작 영애에게 상처받을까 봐 두려웠다. 그 때문에 급히 쳐들어온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뒤덮고 있던 건 걱정이 아니라 화였다.

리벨은 그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를 원하는 쥬리 백작 영애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 사실을 거듭 깨달은 리벨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 사람하고는 안 되는데.

이 사람이 내게 마음을 열면 안 되는데. 적어도 나는 이 사람을 당당히 사랑할 수가 없는데.

리벨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시스테인이 속삭였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몰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리벨.”

그의 온기가 온통 그녀를 감쌌다.

“나는 아직, 당신 앞에서만 웃을 수 있으니.”

푸른 눈동자가 웃음기를 담아 반짝였다. 정말 눈부신 미소였다.

저 말은 사탕발림이 아니라 진심이며 진실일 것이다.

아직 억누른 감정을 풀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에게, 폭주를 두려워하는 그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곳은 리벨 자신의 옆뿐일 테니까.

그래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리벨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뜬 것처럼 생생히 그가 느껴졌다. 웃음 짓고 있는 그가.

세상에서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제 옆에서만 이리 편하게 웃을 수 있다는 그가, 그 귀한 미소를 짓고 있을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그러겠습니다, 리벨.”

그래야 당신이 편하다면요. 그가 꿈처럼 속삭여 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어떻게 거리를 두지?

리벨은 그 말에 다시 한번 그에게 훅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조금만 더 이성을 잃으면 이기적인 욕심이 이겨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중심을 잃고, 과거는 모른 척 그에게 쓰러져 안기면, 행복할 것 같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