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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96)화 (96/167)

제96화

아직 연회는 끝나지 않았다.

때문에 테라스를 나와서도, 리벨은 시스와 함께 연회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대공 부부께서 아주 금실이 좋아 보이세요.”

“결혼식 때부터 워낙 좋으시지 않았나요?”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하는 건 모두 그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귀부인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결혼할 때만 달달하면 뭘 하나요? 내 남편은 지금은 완전 벽돌이에요, 벽돌.”

“뭐라고요, 부인?”

그러다가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들이 구석으로 가서 하는 일들을 보면, 부인의 말처럼 그렇게 사이가 안 좋진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대공가의 초대장을 받고 꿈인 줄로만 알았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꿈이 아니니, 이곳에서 즐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을 오히려 리벨보다 잘 받아 주는 건 시스테인이었다. 그 덕분에 리벨이 피곤할 일은 없었다.

“…….”

리벨은 담담한 얼굴로 사람들의 말을 받는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잠시 시선이 닿는 사이에, 그의 눈가에 부드러움이 스쳤다.

그녀가 아니면 착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녀를 위로하듯 손을 꼭 잡아 준 시스테인이 다시 사람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젠가 한번 저희 별장에도 놀러 오시면…….”

온갖 제안을 해 오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답하는 건 어지간한 심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시스테인은, 이런 일 싫어할 텐데.

“리벨이 허락한다면,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겉보기에는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먼 곳에 보이는 카리스의 얼굴에는 점점 화사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저 사람 아무래도 오해하는 것 같은데? 우리 진짜 아무것도 안 하거든요?

리벨이 불안한 마음에 그의 손을 꼭 잡았을 때였다. 시스테인은 쏟아지는 질문 세례 사이로, 자연스럽게 제 말을 끼워 넣었다.

“리벨이 다소 피곤해하는 것 같으니,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

귀족 사회에서 이렇게 직접적인 이유를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700명이나 되는 손님이 온 대규모의 연회에서 두 사람은 테라스에 잠시 간 것 말고는 쉬고 온 적이 없었다.

“앗, 실례했습니다.”

“저희가 너무 들떴던 모양이에요.”

사람들은 다행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리벨과 시스테인에게 길을 터 주었다.

“…….”

리벨은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비교적 사람이 없는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스테인은 지치거나 지겹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아까까지, 리벨이 이야기를 받아 주다가 지칠 땐 그가 말을 받고는 했다.

“리벨.”

어느새 연회장 구석의 테이블에 도착한 두 사람 앞에 잔이 놓였다.

긴장을 풀어 주는 데에 도움이 되는 가벼운 와인이었다.

시스테인은 잔을 들어 리벨에게 건넸다.

“아, 고마워요.”

잔을 받는 리벨의 손이 그의 손과 닿은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이 속삭였다.

“……이런 자리는 싫어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리벨.”

그 말에 리벨은 아주 살짝 움찔했다.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잔 속의 와인이 출렁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덕에 시스테인의 시선이 그녀의 잔에 한번 닿았다 떨어졌다.

“원래,”

리벨은 간신히 입을 뗐다. 이런 자리는 당연히 싫다.

그녀는 전생에서부터 늘 이야기를 달고 다녔다. 자신은 태생적으로 내향적 인싸라고.

관심받는 건 좋지만, 내 기사가 관심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실제 생활에서까지 관심받는 건 질색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답할 수 없었다.

……이미 반쯤 망한 것 같지만!

리벨은 이 작전의 목적을 아직 상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괜히, 연회 시작부터 맞지도 않는 진상 짓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

“싫어했는데, 몇 번 해 보니까 괜찮더라고요.”

리벨은 와인을 찬물처럼 원샷할 뻔했다.

하지만 안 된다. 침착한 척!

“이런 데 오면 대우받을 수 있잖아요. 누가 개최한 연회든 대공비인 내가 주인공이 되고. 사람들은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고.”

리벨이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나와라, 사회적 미소!

꼴같잖은 편집부장에게도 웃을 수 있었던 내가, 시스테인 앞에서 못 웃는 게 말이 되냐!

그 생각 덕인지 미소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게 쾌감이 느껴져서요. 저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대하든, 저 사람들은 나한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게.”

이거 말하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마인드다? 리벨은 생각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이거 롤란드 마인드 아니냐?

사실 천생연분은 롤란드와 쥬리 백작 영애가 아니었을까요?

순간 토가 쏠릴 뻔했지만 리벨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렇습니까.”

시스테인은 그 말에 저 역시 잔을 기울였다. 리벨은 그런 그를 흘끗 살폈다.

그녀의 방금 대사 역시, 원작에서 그와 교제하던 쥬리 백작 영애가 했던 말이었다.

당연히 시스테인의 정이 뚝 떨어지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

하지만 시스테인은 왠지 평온해 보였다.

늘 담담한 사람이니 크게 티는 안 나겠지만.

……먹힌 건가? 혹시 제가 밥맛으로 보이진 않으세요?

그를 흘끔 살펴봐도, 리벨은 알 수가 없었다.

*  *  *

연회는 여차저차 끝이 났다.

물론 리벨은 정신이 없어 연회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다.

연회의 주인으로서, 정말 기계적으로 일한 것 같았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한 것 같지만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시스테인의 미소, 단 하나.

밤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던 그의 얼굴.

“…….”

아니, 사람 이렇게 본격적으로 홀리는 게 어딨어?

내가 그 사람이 신경 쓰여서 더 이러나?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원래 저렇게 막 꿀 떨어지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

열 살 때의 폭주만 아니었어도 이 사교계에 그에게 홀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리벨이 주접인 줄도 모르고 주접을 떠는 동안 연회는 끝이 났다.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대공비 전하.”

“다음에 또 봐요, 부인!”

하나둘씩 손님이 빠져나가는 동안, 카리스는 그 유리벽 너머의 방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하인을 통해 ‘따로 인사하고 나갈 필요는 없다’는 말을 연회장에 전했을 뿐이었다.

덕분에 연회의 분위기는 다소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점점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당연히 리벨이었다.

“…….”

“…….”

리벨은 무심코 유리벽 너머를 보았다가 카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사람들이 다 나갈 때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또각, 또각.

걸음 소리를 굳이 숨기지 않은 그는, 시스테인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리벨과 시스테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덕분에, 잘 즐기다 가는군.”

골방에서 술 마시는 건 황성에서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정말 연회 끝날 때까지 알차게 감시만 하고 가잖아!

“쿨럭.”

리벨은 카리스의 기습 아닌 기습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카리스는 그들을 지나쳐 가면서 말했다.

“아, 따라 나올 필요 없어.”

그러고 무심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사레가 들린 리벨을 챙겨 주는 시스테인은 제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

“…….”

이…… 기묘한…… 뻘쭘함은 뭐지?

카리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따라 나올 필요가 없다고 한 건 그 자신이었으니 물릴 수도 없었다.

“그럼.”

시스테인의 짧은 묵례를 받은 카리스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자리를 나섰다.

일단 이번 연회에서 수상한 구석은 없었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콜록, 콜록!”

리벨은 그가 사라지는 사이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괜찮으십니까?”

시스테인은 그녀를 가까운 의자에 앉혀 주었다.

리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좀처럼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카리스가 가는 길에 해사하게 미소 짓고 가는 걸 보았던 것이다.

결국 이번 연회에서 남은 건 미소밖에 없었다.

시스테인의 달콤한 미소와,

카리스의 살벌한 미소.

아니 누구 아들들 아니랄까 봐! 리벨이 머리를 붙잡았다.

*  *  *

리벨은 이번 연회 작전(?)이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다.

일단 시스테인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사실 그가 변하길 바라면서 그 온갖 진상 짓과 맞지도 않는 대사를 쳐 댔던 거지만 그는 정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원작의 그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 겁니까? 예?

……그렇게 묻기엔 그 심경을 변화시킨 원인이 저였으니 따지기도 뭐했다.

하지만 아예 실패한 건 아닌 듯했다.

뒷걸음질로 뭐 잡은 격이었지만, 쥬리 백작 영애에게는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쥬리 백작 영애의 행동 패턴이 달라졌습니다. 그녀가 제도기사단과 대공 전하의 주변에 심어 둔 사람들을 일제히 철수했습니다.”

며칠 후, 나인의 보고를 들은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잘됐네.”

잘됐나? 잘된 거 맞겠지? 일단 시스테인한테 관심은 끈다는 의미였다.

그가 더 이상 반역에 연루될 일도 없고, 혹시나 원작에서처럼 그녀와 얽혀 상처받을 일도 없다는 걸 뜻했다.

무엇보다 리벨은 개운했다.

마치 길 한가운데를 막은 거대한 바위를 박살 내 버린 통쾌함이 느껴졌다.

“다행이네.”

리벨이 거듭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가 웃는 채로 얼굴이 굳었다.

잠깐.

그럼 다음 차례는 필레 공작이겠네?

“혹시 걔가 다른 쪽에 사람 붙이진 않았니?”

나인은 그 말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쓰는 대신 직접 움직이려 하는 듯합니다.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사들이고 있습니다.”

“그럼 사교회에 가겠다는 건데.”

사실상 이번 사교 시즌의 백미는 디란타 대공가의 연회였다.

그 백미에 감히 참여도 못 한 디엘렌 백작가와 알레로 자작가까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번 사교 시즌은 끝나고 있다고.

그런데 굳이 지금 드레스를 새로 맞추고 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필레 공작의 그 수상한 살롱이었다.

“그, 참 피곤하게 사는 영애야.”

아주 끝내줘. 리벨은 고개를 흔들었다.

굳이 그 반역 해야겠니? 원작에서처럼 목이 날아가고 싶어?

굳이 황좌라는 권력을 쥐어야 할까요? 원래 권력이란 복잡다단한 것이라 가진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닐진대, 그냥 소박한 삶 누리면 안 되겠니?

그럼 네 목도 안전하고 나도 안 귀찮아지는데?

“쥬리 백작 영애가 이번 주에 나갈 사교회를 다섯 개 이상 잡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리벨의 염원과는 다르게, 쥬리 백작 영애는 점점 더 설치기 시작했다.

딱, 카리스의 ‘처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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