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내가 처리할 테니.’
리벨은 카리스가 그렇게 말했던 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에 쥬리 백작 영애를 쫓아가느라 크게 신경 쓰진 않고 있었지만.
그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리벨은 떠억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크라이베리 신문을 보고 있었다.
[블레어 디망 경, 쥬리 백작 영애에게 파격 청혼]
그래, 물론 성인 남녀 사이에 청혼이 있을 수도 있지.
문제는 청혼한 사람과 청혼받은 사람, 그리고 이 일에 의견을 얹은 사람이었다.
일단 청혼한 사람, 블레어 디망.
이 사람은 황제 카리스와 시스테인과 육촌 관계인 기사였다. 원작에서 조명조차 안 됐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당연히 권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신전으로 들어가 사제가 되고 싶어 했으나, 황가의 피를 타고난 자는 신전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신전의 반대 때문에 거절당했다.
그러고 나서 하는 게 기사였다. 황가의 기사.
황족의 피를 짙게 잇고 태어났지만, 황위 계승 서열상 위에 시스테인과 필레 공작까지 있다 보니 그에게는 황위 서열이란 아주 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덕분에 그의 옆엔 사람들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작위를 받는 것조차 거절했다.
‘속세를 벗고 신전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자택에서나마 신을 모시며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제국의 기사가 되었다. 그런 그가 파격적으로 청혼을 한 것이다.
쥬리 백작 영애한테!
[지난 9일, 서부 사교계의 작은 살롱에서 파란이 일어났다.
막 성인식을 하는 기사들 사이에 나이 든 기사가 섞여 든 것이다.
그 기사의 이름은 블레어 디망.
충성의 의미를 담는 정열적인 붉은 꽃이 아니라, 청혼의 의미인 하얀 꽃다발을 든 블레어 디망 경은 돌연 쥬리 백작 영애에게 다가가 청혼했다.
“제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현장에서의 쥬리 백작 영애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다. 쥬리 백작가의 공식적인 입장 역시 발표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대해 쥬리 백작 영애와 블레어 디망 경의 지인들은 “두 사람이 원래 제국 아카데미에서부터 알던 사이”라며, “블레어 디망 경은 오래전부터 쥬리 백작 영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는 등, 증언을 쏟아 냈다.
한편 블레어 디망 경은 현 황제 폐하의 육촌 형제지간으로, 결혼을 위해서는 황가의 윤허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의전원에서는 “아직 황가의 입장을 발표하기는 조심스러운 상황”이라면서도, “황제 폐하께서는 블레어 디망 경의 오랜 짝사랑이 이루어질지 주목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정말 쥬리 백작 영애가 블레어 디망 경의 오랜 짝사랑인지는 모르겠고, 이 기사의 핵심은 마지막 줄이었다.
이거 누가 봐도 카리스가 입김 넣은 거잖아!
하지만 아무리 작위가 없다고 해도 블레어 디망 경은 엄연히 황가의 인물.
쥬리 백작가에서 또렷한 이유 없이는 이런 공개적인 청혼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차라리 잘된 일이긴 했다.
쥬리 백작 영애의 기사에 황제의 의견이 실린 이상 그녀는 반역에 함께할 수 없다.
당연히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 필레 공작은 그녀를 피할 것이다.
쥬리 백작 영애를 황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접촉해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정말…… 깔끔하게 처리했네…….”
사실상 황가의 인물이 청혼한 셈이니 모두가 쥬리 백작 영애를 우러러볼 것이다.
그녀는 원하는 대로 황가의 인물을 남편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녀가 생각하던 황위 계승 서열과는 쪼오오오오금 많이 멀어지겠지만?
목 안 달아난 거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리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조사하려던 건 해야지.”
리벨은 신문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원래 원작에서 필레 공작의 세력이 급격히 커지는 건, 그와 쥬리 백작 영애가 마음을 확인했을 때였다.
물론 남녀로서의 마음은 아니고, 반역을 도모한다는 생각이 일치한다는 걸 알았을 때.
수도 근처에 세력이 모여 있는 필레 공작과는 달리, 쥬리 백작 영애는 제국의 변방에도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이 있다며 그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급격히 세력이 커져 그들의 반역은 위협적인 규모로 자라나……는 게 원작의 진행이겠지만?
어? 쥬리 백작 영애가 필레 공작이랑 손도 못 잡아 봤죠?
이러면 필레 공작은 십중팔구 수도의 전력만으로 승부를 봐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 위협은 많이 줄어든 셈이다. 필레 공작이 다른 수를 쓰지만 않는다면.
“흐음.”
리벨은 턱을 매만졌다. 대공비로서의 업무에 한동안 치중했으니, 슬슬 다시 기자 일을 할 때였다.
그녀의 목적은 이거였다.
필레 공작을 일단 턴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
“……아니.”
먼지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 있긴 했다. 리벨은 시스테인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정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간혹 있긴 한데, 어쨌든 필레 공작은 털면 먼지가 풀풀 날릴 것이다.
털기가 힘들 뿐이지.
뭐든 하나 건수만 건져서 크라이베리 신문에 띄우면, 순간적으로 필레 공작에게 시선이 확 쏠릴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필레 공작의 반역 도모에는 비상불이 켜질 터였다.
―탁.
대략적인 계획을 세운 리벨이 목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도 가고 길바닥도 밟아 보고 그러는 것이지.”
그러면서 흔적도 남기고, 응?
아무리 감춘다고 해도 반역이란 자고로 명분, 군사, 자금 세 박자가 다 받쳐 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의심 자체를 받지 않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조사를 받지 않는 것.
하지만 이미 리벨은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이곳저곳을 조사해, 딱 한 가닥의 정보라도 잡아낸다면 성공이다.
그곳을 통해 반역에 대한 정보는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올 테니까.
* * *
잠입 취재를 가기 위해 가장 먼저 넘어야 하는 벽은 시스테인이었다.
때마침 잘된 일이었다. 그의 얼굴에 자꾸만 이렇게 홀려서는 곤란했던 참이었다.
“리벨?”
……그래, 저렇게 웃으면서 쳐다보는 저 얼굴! 저 얼굴에서 좀 자가 격리될 필요가 있었다.
리벨은 아침 시간에 그에게 말했다.
“저, 일이 있어서 며칠 동안은 외근해야 할 것 같아요.”
원래 몸이 멀어져야 마음이 멀어지는 법!
일단 시스테인의 마음은 둘째 치고 제 마음부터 떼어 놔야 할 판이었다.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외근이십니까?”
“네.”
외근이야 꽤 잦은 일이었으니 시스테인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스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얼굴에 조금 기묘한 감정이 떠오르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리벨은 그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들여다보다가, 문득 롤란드의 사진을 떠올렸다.
시스테인은 롤란드가 보내온 내 사진을 보고 화냈다고 했지.
마력이 폭주했었고…….
리벨이 뒤늦게 입수한 롤란드의 그 빌어먹을 사진들은 모두, 리벨 자신이 다른 집에 밤늦게 들어가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진들이었다.
그가 화낼 만도 했지. 리벨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요.”
리벨은 그 직후 제 입을 찰싹 때릴 뻔했다.
아니, 내가 이 얘길 왜 하고 있지?
“예.”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바람직한 경청의 자세로 이쪽을 쳐다보는 시스테인에게는 뭐라도 말해야 할 터였다.
“그,”
리벨이 머뭇거렸다. 사진…… 혹시 그걸 보고 오해했으면 말인데, 난 아무것도 안 했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가 제게 정이 떨어지게 하려면 오해받아야(?) 좋은 거 아닌가?
아니, 그러면 정이 아니라 내 목이 떨어지게 되나? 리엔 황태후께서 가만히 계시지는 않을…….
“리벨?”
침묵이 길어지자 시스테인이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긴장한 리벨은 우르르 말을 뱉어 버렸다.
“이상한 거 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
“…….”
“…….”
순간 어색한 침묵이 지나갔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가볍게 답했다.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리벨은 그 말에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이 사람, 내가 뭔 얘기 하는지는 아는 건가?
그녀가 보기에도 롤란드의 사진은 의심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누가 봐도 그녀의 직업을 모른다면, 몰래 외근 핑계로 집을 나와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고 오해할 법했다.
“그, 전에 롤란드가 사진……을 보냈다고 해서 하는 말이에요.”
결국 리벨은 말을 덧붙여 버렸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하게 꼬여 버렸다.
의심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의심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이 부딪혀 머릿속은 이미 전쟁터였다.
―탁.
그리고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의 식기가 멈추자, 리벨의 머릿속 전쟁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사진이라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시스테인의 담담한 말이 다시 떨어졌다.
그게 진짜 내 직업 모르면 의심하기 딱 좋은 사진인데? 리벨이 다시 물었다.
“……정말요?”
그 말에 시스테인이 리벨에게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제가 의심하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그으으럴리가요!”
그 말에 리벨은 벼락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차 했다.
그게, 의심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의심했으면 싶은 것이…….
으아아으! 리벨의 머릿속 전쟁터는 이제 완전히 개판이었다.
사람한테 정떨어지게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단 말인가?
그때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리벨이 다른 자들을 만나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리벨은 그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설마, 기자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시는 건 아니죠?
그런데 시스테인은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 생각해 봐, 리벨!
기자란 걸 이미 알고 있었으면 벨에 대해서 묻거나, 아니면 날 묻어 버리지 않았을까?
다시 과거의 업보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리벨은 울고 싶어졌다.
근데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그는 그녀가 기자라 의심하고 있진 않은 듯했다.
그럼 대체 날 뭐로 보고 있는 거지?
“그리고 만일, 리벨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리벨은 그 푸른 눈동자에 대고 제 직업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식당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살짝 가려졌다.
요컨대 그는 웃고 있었다.
그래서 리벨은,
“날 이렇게 볼 때마다 볼을 붉히시면, 의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어진 그의 말에 표정 관리를 하는 것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