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나나나지금얼굴빨개졌니?
얼굴에 피가 몰린 게 느껴질 정도였다. 목가가 확 더워졌다.
지금 나 쥐어짜면 붉은 물감도 나오겠다?
아니, 그 비슷한 건 원래 사람 쥐어짜면 나오는…… 아니……
―쨍그랑!
리벨은 결국 식기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니, 근데! 아니!
리벨은 발을 동동 굴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짧은 기럭지 덕에 그녀의 발은 허공을 마구잡이로 걷어차고 있었다.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담담하게 하세요?
―탕!
리벨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격리! 격리가 필요하다!
“다, 다녀올게요!”
“예?”
시스테인답지 않게 당황한 목소리가 리벨의 뒤를 울렸다.
리벨은 그렇게 아침 식사도 내팽개치고 조사를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덜컹!
마차를 타고 저택을 벗어나면서도 리벨의 심장은 진정하지 못했다.
정체를 들킬 거라고 생각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거칠게 뛰고 있었다.
“위험해, 요주 인물이야.”
리벨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저 사람, 나하고 정 뗄 생각이 없어 보여!
연회 때 그런 진상을 부렸는데 내가 아직도 좋으세요? 예?
인간적으로 정 좀 떨어져야 정상 아니야? 입 밖으로 그런 말 뱉는 나도 막 나한테 정이 떨어지려고 하던데?
―쿵! 쿵!
리벨이 머리를 마차 벽에 들이박았다.
―히히힝!
놀란 마부가 마차의 속도를 줄였지만 리벨이 외쳤다.
“멈추지 마! 달려!”
아주 날듯이 달리라고!
그녀는 저택에서 최대한 빨리 멀어지고 싶었다. 그에게서 떨어져야 했다.
* * *
당연히 그녀는 이번 조사도 나인과 다른 그림자들과 함께했다.
그래도 조사를 시작하자, 시스테인의 웃는 얼굴이 불쑥불쑥 생각나는 중증은 조금 줄어들었다.
리벨은 애써 머리를 팽팽 돌렸다.
“기사단으로 침투하는 것도 불가능, 지도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 비밀 통로는 당연히 알 수도 없고 저택도 오래된 데다가 저택 지은 사람들은 모조리 실종.”
리벨의 말에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건 방금 나인이 길게 보고한 것을 요약한 말이었다.
―콩, 콩.
리벨은 임시 숙소에 비치된 나무 탁자를 두드렸다. 그곳은 그림자를 위해 준비된 안가였다.
제국 각지에 황태후의 손이 안 닿은 데가 없다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조사하고 돌아가자.’
‘저택으로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나인의 질문에 리벨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나 며칠 동안 저택 못 들어가.’
‘예?’
‘절대 안 돼. 못 가.’
그 결과 오게 된 곳이 이곳이었다. 리벨은 안가에 준비된 육포를 뜯으면서 생각했다.
“쉽진 않을 것 같긴 했어.”
리벨은 평소 취재에도 열정적인 사람이었지만, 나인과 다른 그림자들이 보기에 그녀는 오늘따라 유독 열정적이었다.
당연히 그림자들도 일에 임하는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공작가에 직접 침투하는 건 어쨌든 불가능하다는 거지?”
“예. 죄송합니다.”
나인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럴 것 같았어.”
반역 직전의 공작가가 쉽게 뚫리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아무리 이쪽이 황태후의 그림자를 쓰고 있다고 해도.
황가에 덤빌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그에 준하는 병력이나 인력이 있을 테니까.
“그럼 다른 걸 먼저 뒤져야지. 일단 근 몇 년 동안 필레 공작가하고 새로 거래를 뚫은 상단이 있는지 알아봐.”
“아, 그건 이미 조사했습니다.”
조금 얼굴이 밝아진 나인이 다른 그림자에게 손짓했다. 그 조사를 담당한 그림자인지, 다가온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리벨은 그림자가 자기소개를 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넬 맞지?”
그림자 넬이 멈칫했다. 리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이름 붙여 줬는데 까먹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상단은?”
“아, 일단…….”
넬은 멈칫했던 것도 잠깐, 긴 보고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의 보고에는 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근 몇 년간 거래가 늘어난 상단도 많고, 거래 물품도 많은데…….”
리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군수물자가 아니라고?”
“예. 대부분 생고기나 곤충의 사체, 동물의 내장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보통 군수물자 중에서 식량으로는 저런 것을 사지 않는다.
생고기야 훈제하거나 육포로 말리면 그만이지만, 사실 만들어진 걸 사는 게 더 싸고 쉽고 빠르다.
게다가 곤충의 사체를 사람이 먹을 일도 없고, 동물의 내장은 뭘 어떻게 하든 금방 썩어 버린다.
“이 동네에 곱창볶음 맛집이 있을 리도 없고…….”
리벨이 중얼거린 말에 그림자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이 곱창볶음이 뭔지 알 리가 없었다.
“내장은 금방 썩을 텐데, 뭐에다 쓰려고 사는 거지?”
“그에 대해서는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그 모든 물자는 이미 필레 공작가에서 소비되었습니다. 썩은 내나 그 비슷한 것을 맡았다는 자가 일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림자 넬이 바로 답했다. 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맛집이 아닌가 본데.”
곱창 한번 먹으려면 반나절은 기다려야 한다는 ‘세상에 이런 밥이’에 나온 전설의 50년 전통 곱창집도 1년에 이만큼은 안 살 거다.
넬의 보고에 따르면 필레 공작가로 들어간 동물의 내장은 올해만 해도 거의 1,000수레 이상이었다.
삼시 세끼 간식 애피타이저까지 곱창볶음 곱창전골로 파티라도 한단 말인가?
이 정도면 필레 영지의 모든 영지민이 모여 파티를 연다고 해도 소비하기 힘든 양이었다.
“근데 내장을 이렇게 샀는데 사람들이 의심은 안 해?”
쓸모 있는 물건을 많이 사도 문제지만, 쓸모없는 물건을 많이 사도 당연히 시선은 쏠리게 된다.
리벨의 말에 넬이 답했다.
“모두 필레 영지의 목축업자들이나 다른 영지민들의 이름으로 사들여진 것이었습니다.”
“동물 내장 먹이는 목축업도 있어?”
종에 따라 고기를 먹이기야 하겠지만 내장만 굳이 골라서 먹일 이유가 있나?
“‘카이사’ 같은 사냥용 매를 기르는 몇몇 업자들이 대량으로 사들이고는 합니다만, 필레 영지에 있는 업자들은 대부분 몇 년 사이 새로 일을 시작한 자들이었습니다.”
“새로?”
이거 또 냄새가 나는데? 리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 그들을 조사 중입니다만 그들 대부분이 소비된 내장의 양에 비해 적은 카이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카이사는 수백 마리씩 기를 수 있는 종이 아니기도 합니다.”
나인이 말을 덧붙였다. 리벨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일단 공작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내장을 사고 있는 건 맞다는 거네.”
왜? 거대 카이사라도 키우나? 아니면 진짜 곱창파티란 말인가?
“더 조사해봐. 뭐든 작은 거라도 좋으니 수상한 것이 있으면 모조리 다.”
리벨이 손짓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 * *
며칠 동안을 더 조사했지만 그림자의 정보력으로도 필레 공작에 대해 수상한 점을 찾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동물의 내장 같은 비정상적인 것들이 몇 개 발견되더라도, 그걸 어디에 썼느냐를 알아내려면 결국 필레 공작가에 침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의 일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필레 공작가만 집중적으로 조사한 덕에, 공작 영지를 중심으로 한 상거래의 흐름이 슬슬 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필레 공작가는, 어딘가 익숙한 가문의 영지나 그 가문과 관련된 곳에서만 수상한 물건을 얻어 내고 있었다.
“동물 내장은 아샤스 가, 곤충 시체는 카닐라 가.”
이 가문들은 모두 그 살롱에 있던 사람들의 가문이었다.
“자꾸 이름이 겹치는 게 우연은 아닐 거야.”
거대 카이사를 같이 키우든 곱창 파티로 내실을 다지고 있든, 이 내장을 이용해서 뭔가를 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리벨이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으면 왜 진작 안 그랬지?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 아냐?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경계가 철저합니다만, 꼭 원하시는 정보가 있다면 뚫어 보겠습니다.”
나인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리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정보를 구하는 대신 제 목숨은 못 구합니다, 뭐 이런 전개는 아니지?”
“…….”
그 말에 나인은 입술에 순간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진짜였냐!
리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사람 죽을 가능성 있는 계획은 모조리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너희 죽일 거였으면, 황태후 폐하 앞에서 그 재롱 아닌 재롱을 부렸겠니? 그렇게 간 크게 입을 놀렸겠냐고!
물론 저들을 살리려고 가져온 핑계가 이거냐고, 짱돌 굴리지 말라는 걸 고상한 말투로 들었지만.
아무튼 리벨은 그림자들을 죽일 생각은 절대 없었다.
누가 죽는 건 절대 보고 싶지 않아.
이 세계 사람들은 사람을 죽고 죽이는 데에 익숙한지 몰라도, 리벨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었다.
그게 제가 아는 사람들이면 더더욱 그랬다.
“죽고 다치는 것 빼고. 방법이 없을까?”
리벨의 말에 나인과 그림자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그림자 중 하나인 미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공비 전하.”
“응?”
심각한 얼굴의 미엘이 입을 떼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애초에 암살을 위해 길러진 인력입니다. 잠입이나 정보 수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만, 차라리 대상을 죽여 버리는 것에 더 익숙합니다.”
그건…… 그랬지. 리벨은 볼을 긁적였다.
사람 죽인다는 살벌한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그것이…… 저희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에도 더 이롭습니다.”
한마디로 정보 수집보다는 사람 목 따고 오는 게 그림자들 입장에선 더 쉽고 안전하다는 소리였다.
리벨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필레 공작을 죽여 버릴 수는 없잖아.”
어차피 죄 지을 사람이긴 한데, 아직 죄가 안 드러난 게 문제다.
게다가 그는 한 나라의 공작이었다.
그를 죽이길 사주한 사람이 대공비이며, 그를 죽인 자들이 황태후의 그림자라는 사실까지 어쩌다가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귀족가는 그야말로 뒤집어질 것이다.
아무리 현 황제와 황태후가 폭정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표면적인 이유도 없이 귀족을 죽이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것도 귀족 중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는 공작을 그렇게 이유도 없이 죽였다?
이건 필레 공작 무리가 아니라 모든 귀족이 뭉쳐 반역을 일으켜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리벨의 반응을 살피던 나인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방법이 있긴 있어?”
리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쪽 사람도 안 죽고 필레 공작도 안 죽지만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그녀의 질문에 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잠입 수사에 특화된 인력을…… 요청하면 됩니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요청? 어디―”
그렇게 말하던 리벨은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이 나라에서 황태후의 그림자보다 훨씬 잠입에 특화된 인력?
왜 생각나면 안 되는 집단이 생각나는 것 같지?
리벨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감찰기사단?”
그 말에 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누굴 피해서 여기로 왔는데, 지금!
그와 동시에 리벨의 머릿속에 비명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