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원래대로라면 두 사람은 연회장에 끝까지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저택에 수상한 마력이 감도는 지점이 있다는 걸 안 순간, 계획은 바뀌었다.
그 지점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마력에 민감한 시스테인뿐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시선을 끄는 사이 다른 기사들이 저택을 1차적으로 점검하고, 수상한 곳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시스테인에게 보고한다.
그러면 그곳을 중심으로 시스테인은 저택의 수상한 점을 조사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당연히 시스테인의 대역이었다.
“잠시 리벨의 호위이자, 제 대역을 맡게 될 겁니다.”
시스테인이 리벨에게 감찰기사를 소개했다. 근데 그 감찰기사는 리벨도 아는 얼굴이었다.
“레오 경?”
그는 다름 아닌 디란타 대공가의 기사이기도 했으니까.
감찰기사 레오가 멈칫했다.
“……기억해 주실 줄은.”
“내 가문의 기사도 못 알아보면 어떡해?”
리벨은 눈을 깜빡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시스 근처에 감찰기사들이 더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디란타 대공가 기사들 중에도 있었던 거야?
리벨은 그 디란타 대공가의 기사들 전체가 감찰기사일 거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보통 많은 귀부인들께서는 가문의 기사들에게까지 관심을 주지 않으십니다.”
레오가 난감한 얼굴로 말하자,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그래? 난 관심 많은데.”
그렇게 가볍게 말한 리벨이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가면을 건네주고 가야 할 그는 왠지 뜸을 들이고 있었다.
“시스?”
그리고 그답지 않게, 리벨의 부름에야 정신을 차렸다.
“……아.”
그는 레오에게 검은 가면과 가발을 건넸다.
“그럼,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시스테인의 짧은 말에 레오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발을 쓴 레오가 리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가면을 쓰니 목소리가 좀 다르게 들리는 듯했다. 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소리가 바뀌었네?”
시스랑 닮은 목소리였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모를 만큼.
이 세계에도 성대모사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리벨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전하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최대한 말수는 줄이겠습니다.”
들킬 수 있으니까요. 레오는 신중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시스테인의 목소리와 더 비슷하게 들렸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리벨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레오가 순간 움찔했다.
“?”
눈을 깜빡이던 리벨은 뒤늦게 그의 입장을 이해했다.
하긴, 결혼한 귀부인을 미혼 남자가 에스코트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지.
리벨은 굳은 것 같은 감찰기사의 등을 팡팡 두들겨 주었다.
“괜찮아, 일이야 일. 긴장 풀어. 응?”
허, 참. 감찰기사들은 대부분 연기도 잘한다는데 이 사람은 그런 과가 아닌가?
혹시 특기가 성대모사에 특화되어 있는 쪽?
“…….”
하지만 레오는 억울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리벨이 생각하는 ‘연기에 특화된’ 감찰기사 중 하나였다.
문제는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테인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
레오는 리벨의 손을 잡은 제 손이 불탈 것 같다고 생각했다.
특히 에스코트한다고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은 아예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흘끔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
늘 서늘한 벽안에서 안광이라도 번뜩이는 것 같았다.
―꿀꺽.
레오는 바짝 긴장했다.
하긴 세상 어떤 남편이 제 부인을 다른 남자가 에스코트하는 걸 좋아하겠는가?
―스르르.
레오는 슬며시 리벨의 어깨를 감싼 제 팔을 내렸다.
시스테인의 표정이 조금 펴지려는 순간이었다.
“어휴, 일이라니까, 일!”
리벨이 레오의 손을 덥석 잡아 제 어깨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시스테인의 심기가 다시 심히 불편해졌다. 그리고 레오는 전 같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는 단장님 앞에서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도 긍정적인 감정도 아니고 살기에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을, 제게 쏟아 내고 있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시스는 항상 내 어깨를 감싸고 있다구.”
이 기사, 이래서 연기할 수 있겠어?
리벨은 가면을 다시 쓴 채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레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 밖에서, 시스테인의 서늘한 시선까지 받는 레오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대공비 전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간, 제 목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레오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럼, 가자!”
그렇게 몸을 돌린 리벨은 가면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못 봤던 시스테인을 이제야 발견했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아직 안 갔어요, 시스?”
“……조심해야 할 겁니다.”
시스테인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저도 모르게 이글거리던 시선은 없던 것처럼 거둔 채였다.
―쿵.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시스테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레오와 리벨 두 사람만 남았다.
리벨이 머리를 긁적였다.
“난 홀에만 있는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잠입하는 사람이 걱정이지. 리벨이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레오는 입이 바싹 마르고 있었다.
조심해라.
그 말은 리벨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대공비 전하께 실례를 저지르지 말라는 단장님의 경고였다.
그그근데 저 실례한 거 없는데요?
그냥 에스코트했을 뿐인데요? 이거 대공비 전하 말씀대로 일이잖아요?
하지만 믿기지 않게도, 그의 주인인 시스테인은 그가 리벨을 에스코트하는 것을 명백히 불쾌해하고 있었다.
‘야, 기사관에 오셨던 가주님께서 웃으셨다는데.’
‘그 감정 없으신 분이? 차라리 한여름에 눈싸움을 하자고 해라.’
그때 레오는 디란타 저택에 최근부터 돌기 시작했던 괴소문을 떠올렸다.
그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했지만, 지금은 슬슬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진짠가?
진짜 전하께서 웃으셨나? 그리고 방금은 화내신 건가?
“안 가?”
그때 리벨이 그를 채근했다.
“이렇게 연기 어색하면 우리 들켜. 잘하자. 응?”
심지어 잔소리도 했다.
감찰기사단의 잠입 및 연기 기본을 가르치는 선임 기사이기도 한 레오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연기가 어색하다는 말은 그의 감찰기사 인생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 * *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시스테인은 곧 감찰기사들이 말한 ‘수상한 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두 곳은 감찰기사들이 미리 조사해 본 결과, 비싼 마력석이 박혀 있어 경계가 삼엄한 것이었다.
시스테인이 저택의 이곳저곳에서 마력 파동을 느꼈던 것도 그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남은 한 방은 일단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3층과 4층 사이의 복도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요컨대 3.5층 정도 되는 복도를 따로 만들어 그 방에 무언가를 숨겼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귀족가에 이런 공간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각 가문의 가주만 알고 있는 비밀 통로의 일종으로, 비상시에 사용하는 곳들.
하지만 그런 곳에 거대한 마력이 담긴 무언가를 심어 놓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경우였다.
―…….
시스테인은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움직였다.
그는 연기는 몰라도 잠입엔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미 감찰기사들이 만들어 온 대략적인 지도를 보며, 그가 빠르게 움직였다.
“…….”
그리고 3층과 4층 복도 사이. 벽처럼 보이는 곳을 보던 그는 감찰기사의 보고대로 튀어나온 벽돌 두세 개를 건드렸다.
―달칵.
그러자 열쇠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또 다른 복도로 향하는 문이 드러났다.
정상적인 층이 아님을 증명하듯, 이 저택의 다른 층 복도보다 훨씬 낮았다.
시스테인이 높이 뛰어오르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
“……퇴로가 없는 공간이군.”
시스테인이 뇌까렸다. 이런 공간은 빨리 조사하고 나가는 게 좋다.
그는 여러 문을 가로질러 문제가 있다는 방 앞에 도달했다.
“문은 잠겨 있습니다.”
그를 소리 없이 따라온 감찰기사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열쇠구멍도 없는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마력에 예민한 시스테인의 눈에는 눈앞의 문을 잠가 둔 마력의 형체가 보였다.
“마력으로 잠긴 거다.”
그렇게 말한 그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감찰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원래 단장님께서 마력을 이렇게 세심하게 조절하실 수 있으셨던가?
시스테인 폰 디란타는 기본적으로 검사였다. 아주 간혹 마력을 폭발시키듯 사용하고는 했지만, 그건 마법사로서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마력을 마구잡이로 폭사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순수한 마력으로 파괴만 시키는 것.
하지만 방금 문을 연 건 분명 ‘마법’이었다.
단장님은 마법사가 아닌데?
게다가 이렇게 마법으로 잠긴 문을 이번 한 번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때마다 시스테인은 마법을 쓸 수 있는 단원을 불러 문을 열게 했다. 그 자신이 문을 열 수 없었으니까.
“마법을…… 쓰실 수 있으셨습니까?”
그 말에 시스테인은 짧게 답했다.
“최근에. 조금씩.”
마력이 원래 있었던 사람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찰기사들은 그가 마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력을 쓰면 몸에 무리가 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상태는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이었다.
어떤 계기도 없이 이렇게 되기는 힘들었다. 대체 어떻게 되신 거지?
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시스테인이 감정과 함께 마력을 억누르느라 마법을 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끼익…… 쿵.
그러거나 말거나, 시스테인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방 안에는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거울 같은 것이 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게이트였다.
비록 인간이 통과하기엔 너무 작아 보였지만, 분명히 그건 게이트였다.
강력한 마력을 숨기기 위해 방 안에 한 겹의 결계를 걸어 놓은 듯, 방 안의 공기는 답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그것보다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북쪽으로 향하는 게이트인데.”
마력의 흐름이 분명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아스테아령의 북쪽에는 공교롭게도, 카실라 대장간이 지어지고 있는 공사 현장이 있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