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리벨이 이번에 변신한 건, 평범한 하녀의 모습이었다.
평소의 진분홍빛 머리칼이 아니라 검은 머리칼을 목 뒤로 넘긴 그녀는 이내 방을 나섰다.
“모시겠습니다.”
그런 그녀를 모시는 건 그림자 엘브였다.
“이미 아스테아 백작 부인이 어디로 그 사람들을 데리고 갔는지 파악한 거지?”
“예.”
엘브는 사람이 없는 복도로 움직이며 정중하게 답했다.
“2층의 외진 곳에 있는 방입니다.”
“2층…….”
홀이 1층인 걸 생각하면 생각보다 멀리 가진 않은 셈이었다.
그냥 개인적인 손님인가?
리벨이 생각할 때였다. 엘브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방 안쪽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하나도요.”
그…… 보통은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리진 않는단다…….
리벨은 볼을 긁적였다.
“이 건물이 방음이 그렇게 잘 돼?”
그 말에 엘브가 고개를 저었다.
“방음에는 확실히 신경을 썼습니다만, 저희들이 문 너머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뭔가 마법적인 장치가 있는 듯합니다.”
“흐음.”
그럼 비밀 얘기 하는 거 맞나 보네.
리벨은 하녀복 주머니에 숨긴 카메라가 잘 들어 있는지 확인하며, 엘브를 따라 재게 걸음을 옮겼다.
“안 들리면 볼 거라도 있겠지.”
“그 바로 옆방이 비어 있습니다. 방에 딸린 드레스룸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 방과 가장 얇은 벽 하나를 두고 마주하게 됩니다.”
엘브가 말을 이었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로 가자.”
“예.”
엘브가 리벨을 데리고 간 곳은 그녀의 말대로 말 그대로 2층 복도의 외진 곳이었다.
마치 없는 것처럼 불 하나 켜지지 않은 깜깜한 복도 끝에, 방 두 개가 있었다.
리벨은 발소리를 죽인 채 그 옆방으로 들어섰다.
―…….
엘브는 기술 좋게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리벨이 문 쪽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
그녀는 제자리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
분명 올 때는 엘브 한 명이었는데 어느새 나인이 함께 있었다.
깜빡이! 튀어나올 땐 깜빡이 켜고 튀어나오라고!
그녀가 놀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인이 보고를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예사 인물들이 아닙니다. 이곳 근처가 강력한 방음 마법으로 감싸여 있습니다.”
“방음 마법?”
리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옆방으로 통하는 벽 쪽을 살폈다.
당연히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는 그냥 벽이었다.
“드레스룸이 이쪽이지?”
리벨은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여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느리게 걷지 않고도 인기척을 내지 않을 수 있는 그림자들은 앞서가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드레스룸은 기묘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탁.
리벨이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드레스룸 벽에 귀를 대어 본 순간이었다.
「……는 것이 다소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아직도 그게 준비가 안 됐단 말이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잘 들리는데?”
리벨이 거의 제 입 안에서만 맴돌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그 말을 그림자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
“?”
그림자 엘브와 나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리벨보다 훨씬 뛰어난 청력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엘브가 입을 열었다.
“저희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뭐?”
“아무래도 마님의 특이체질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틸라 저택에서의 마력장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 것처럼요.”
나인이 작은 목소리를 쏟아 냈다.
“아…….”
마력을 가라앉히는 체질 말인가? 리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근데 내가 마력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걸, 그림자들에게 내가 말해 줬던가?
리벨이 그들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림자들은 고개를 깍듯하게 숙여 보였다.
그들이 리벨에 대해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직접 말해 주지 않더라도, 나인도 막아 버린 틸라 저택의 마력장에 그녀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들어간 것부터가 이상했다.
게다가 지금 방음 마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까지.
못 알아채는 것이 이상했다.
그녀에게 마력이 통하지 않는 특이체질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번 것을 고치는 데에는…….」
그때 건너편에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리벨이 두 사람에게 급히 검지를 들어 입에 대 보였다.
중요한 이야기 한다! 조용!
「술식이 복잡하지만 체계가 잘 잡혀 있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술식? 체계? 리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말을 하는 자의 목소리는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래가 끓는 듯한 탁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휴,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공손하게 받는 건 아스테아 백작 부인의 목소리였다.
리벨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를 들어 보면 아스테아 백작 부인은 상대를 명백히 저보다 높은 사람으로 모시고 있는 듯했다.
아스테아 백작가 정도라면 어지간한 가문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위세 있는 가문인데도.
“…….”
리벨은 홀에서 멀리 보였던 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은 로브를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자들은 귀한 신분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뭘 고친다는 거지?
리벨은 좀 더 귀를 기울여 보았다.
「어쨌든 좀 번거로운 방법으로 알리시는 통에, 늦게 오게 되었소. 이해해 주시오.」
「아시다시피 ‘살롱의 주인’께서만 당신들께 직접 연락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감찰의 시선을 피하려면 그분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여야 하니…….」
아스테아 백작 부인은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받고 있었다. 리벨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살롱의 주인.
저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살롱과 관련된 자들인 건 확실했다.
그것도 그 살롱의 주인인 필레 공작과만 은밀하게 연락하는 자들.
다시 말해 필레 공작이 세운 반역 계획의 주축이 될 자들이 분명했다.
이건 중요한 정보다.
리벨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도 모르고 벽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초대장을 살롱 사람들에게만 뿌리는 게 아니라 귀족가에도 뿌리는 이유가 뭐요? 그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야 저도 살롱의 가족들이 누구인지 모두 알진 못하니까요. 게다가 특정 인물들만 부를 경우에 감찰의 시선을 받기가 오히려 쉬워집니다.」
아스테아 백작 부인의 말에 상대들은 불편하다는 듯 크흠, 큼, 하며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백작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없을 겁니다. 어차피 지금까지 그랬듯, 신호를 알아차린 자는 살롱 사람들뿐일 테니까요. 초대장을 불태우는 자가 이 사교계에 있을 리가 없으니.」
미안하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게 나다!
리벨은 슬그머니 손을 들어 보였다.
「흐음.」
그러는 동안, 한참 불편한 티를 팍팍 내던 수상한 자들이 결국 말했다.
「어쨌든 고치러 왔으니 한번 가 보지. 고치고 바로 떠날 테니 배웅은 필요 없소이다.」
「알겠습니다.」
아스테아 백작 부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반면 상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오만함이 엿보였다.
뭘 고치러 왔는진 몰라도 고칠 자신은 있는 듯했다.
―달칵.
얼마 안 있어, 옆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그리고 그 순간, 리벨은 마치 높은 곳에 있다가 내려온 것처럼 귀가 먹먹해진 것을 느꼈다.
리벨이 침을 삼키며 귀를 몇 번 두드렸다.
“방음 마법이 풀렸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나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가 먹먹한 게 방음 마법이 있어서 그랬나?
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잠깐만.”
리벨은 재빨리 하녀복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엘브가 소리 없이 문을 살짝 열었다.
그 문틈으로, 리벨의 카메라가 내밀어졌다.
―또각, 또각.
찰칵.
그리고 리벨은 아스테아 백작 부인의 걸음 소리에 맞추어 사진을 찍어 냈다.
물론 셔터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소리가 나는 곳을 막은 채였다.
―…….
엘브가 문을 다시 소리 없이 닫는 사이, 리벨은 사진을 확인했다.
들키지 않으려고 거리를 좀 두고 찍었지만, 그래도 보일 건 다 보였다.
검은 로브를 후드까지 뒤집어쓴 수상한 자 세 명.
그리고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아스테아 백작 부인의 얼굴.
무엇보다 그들의 후드 뒤통수에는 괴이한 금빛 뱀 모양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런 문양을 가진 가문이 있었던가?
리벨이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계단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상층부로 가는 듯합니다.”
그사이 엘브가 보고했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좀 있다가 따라가자.”
저들이 살롱과 관련된 사람인 이상, 저들이 뭘 고치러 왔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위하겠습니다.”
나인이 리벨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런데 나인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는 제 움직임을 알아차리실 수 있습니다.”
리벨은 그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시스테인은 이들이 그림자라는 걸 모두 알고 있을 터였다.
시스테인이 나인을 알아차리는 건 상관없다.
내가 들키는 게 문제지.
그에게서 인기척을 숨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정답은 외형을 바꾸어 가는 것뿐이었다.
그럼 혹여 시스테인과 마주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쪽의 정체를 모를 테니까.
하지만 그림자들이 정작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감찰기사한테만 들키지 마.”
그들은 나인이나 다른 리벨의 호위기사들이 그냥 기사인 줄로만 알고 있을 테니까.
황태후의 그림자 역시 당연히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안 되는 신분이었다.
아니, 이쪽은 오히려 더 심했다.
‘소용’이 없어지면 리엔이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삭제시켜 버릴 테니까.
물론 감찰기사가 그림자들의 정체를 안다고 해서 다른 곳에 불고 다니진 않겠지만, 대놓고 밝힐 수 없는 신분임은 분명했다.
“주의하겠습니다.”
나인과 엘브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감찰기사가 눈치챌 거 같으면 뒤로 빠져. 알았지?”
리벨의 말에 나인이 거듭 고개를 숙였다.
“예.”
거참, 잠입 취재 한번 하는 데 감출 게 왜 이렇게 많지?
리벨은 머릿속이 영 복잡했다.
그나저나 시스랑 마주치진 않겠지?
리벨은 검게 변한 머리칼을 매만졌다.
어차피 시스도 잠입한 입장이니, 이 저택의 하녀 복장을 한 리벨과 굳이 마주치려 하진 않을 터였다.
“…….”
문제는 이 빌어먹을 체질인데. 리벨이 눈살을 찌푸렸다.
방음 마법이 안 통하는 거야 좋았다.
그런데 무슨 모습으로 변하든 마력을 가라앉히는 이놈의 체질 때문에 시스테인이 눈치를 챌 거라는 게 문제였다.
“……아냐.”
리벨은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그림자들에게 조사시켜 본 결과, 리벨과 비슷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시스도 그 서류철을 보았으니 알 터였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마주치지 말자…….
새삼 다짐하며, 리벨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탁.
어느새 하녀 차림으로 변한 엘브와, 그림자 속에서 그들을 호위하는 나인과 함께 리벨이 닿은 곳은 신기한 복도였다.
3층과 4층 사이의, 천장이 매우 낮은 비밀 통로 같은 곳.
한눈에 봐도 수상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짓 하려고 만든 통로다!
리벨이 카메라를 꽉 쥐며 복도에 들어섰을 때였다.
“근처에 누군가 있습니다.”
나인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