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게이트는 리벨의 피에 반응하고 있었다.
게이트의 마력을 살핀 시스테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게이트 건너편과 통하는 마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뭬야?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설마 마력을 가라앉히는 체질 때문인가?
생각해 보면 시스가 가까이에만 있어도 영향을 받을 정도로 강력한 체질인데, 피까지 닿으면 마력이 가라앉는 건 순식간일 터였다.
잠깐, 그럼 그가 폭주할 때 내가 붙어 있을 게 아니라 피를 먹이면 진정이 되는 거?
사실 이거 원작에 히든 엔딩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시스테인이 뱀파이어가 되는 쪽으로…….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원작의 리벨 이벨라는 대공비가 되기는커녕 제 능력을 알아채기도 전에 세상에서 삭제되었으니까!
그럼 이건 뭔데?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제 피가 게이트에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죠?”
저들의 반역 계획의 중심인 게이트가 악영향을 받는다?
이건 리벨과 시스테인에겐 호재였다.
만약 내 피로 게이트를 없앨 수 있다면?
원작에서는 필레 공작이 반란에 이런 식의 게이트를 썼다는 내용이 없었다.
덕분에 어디 쓰는 게이트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일반적인 방식으론 열 수도 없는 게이트를 폼으로 만들었을 리는 없으니, 이 게이트를 없애면 그들의 반역에는 지대한 차질이 생길 것이다.
“예. 자세한 것은 분석해 봐야겠지만―”
시스테인이 말할 때였다. 리벨이 그를 홱 돌아보았다.
“혹시 칼 있어요?”
“……리벨?”
리벨은 되묻는 시스테인을 보면서 제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사인 그가 검을 안 들고 있을 리가 없다.
리벨이 그가 차고 있는 검을 가리켰다.
“이거 잠시 빌려줄 수 있어요?”
“리벨.”
시스테인은 그녀의 말에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무엇에 검을 쓰려는지 확실해진 탓이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의 그를 보다가 리벨이 게이트를 가리켰다.
“저도 피 보는 건 싫지만.”
더 많은 피를 내려면 상처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딱 봐도 이 게이트로 뭐 하려는 건데, 닫을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면 좋잖아요.”
리벨이 그의 푸른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원래 전자기기도 A/S 받으면 한 일주일은 지켜봐야 하잖아?
고치는 사이에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을지 모르니까.
복잡한 마법 술식으로 만들어진 게이트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였다.
지금 그녀의 피를 써서 게이트가 좀 이상해지더라도, 상대는 고치다가 뭐가 잘못됐겠거니 할 터였다.
그럼 그사이, 리벨과 시스테인은 게이트를 없애는 방법만 알아내고 빠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내시는 건,”
시스테인이 입을 떼었다. 하지만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피 낼 방법이 없잖아요.”
리벨은 난감함을 담은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대로 둘 수도 없고.”
리벨이 다시 게이트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에선 여전히 연둣빛의 빛 가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시스테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성적으로는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찰기사단장으로서도 이건 뜻밖의 기회였다.
황가에 알리지 않은 채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필레 공작의 비밀스러운 살롱.
그곳과 이어지는 게이트.
이 게이트가 어디에 쓰일지는 몰라도 현 황가, 그의 어머니와 그의 형에게 이롭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은 확실했다.
마력을 가라앉히는 그녀의 체질이 피를 통해 발현되면, 마법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충분히 이론적으로 유효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스테인이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는 최근 낯선 감정을 많이 느꼈지만, 지금만큼 제가 낯선 적이 없었다.
‘그녀의 피를 내어 게이트를 막아 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그저 ‘그녀의 피를 보기 싫다’는 감성적인 판단이 부딪히고 있었다.
싫다.
그는 명백하게 싫었다. 그녀가 다치는 것이.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이 낯설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리벨이 그의 검을 가리켰다.
“칼 안 주면, 내가 뺏을 거예요.”
“리벨.”
시스테인이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녀의 신체적 능력으로 그의 것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그럼에도, 검을 뺏기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걸 주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줏빛 시선으로,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명령 아닌 명령으로 저를 제압할 것을 알기에.
결국 그가 숨을 내뱉었다.
“……그럼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검을 다루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리벨은, 피를 조금 내려다가 잘못하면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야 제가 직접, 하는 것이 나았다.
비록 내키지 않더라도.
―스릉.
검집에서 살짝 빠져나온 그의 검이 검날을 한 뼘쯤 드러냈다.
리벨은 날카롭게 빛나는 검날을 보다가, 손을 슬며시 가져다 댔다.
아프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시스테인 역시 말했다.
“아플 겁니다.”
“알아요.”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호기롭게 피를 내겠다곤 했는데 막상 날카로운 검날에 손을 가져다 대려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헌혈할 때 굵은 바늘 들어가나 칼날 들어가나!
……가 아닌가?
리벨은 거의 울상이 되어 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시스테인이 말했다.
“차라리 눈을 감으세요, 리벨.”
주삿바늘 무서운 사람들이 주사 맞을 때 눈을 감는 경우도 많다고는 했다.
하지만 리벨은 고개를 홱홱 저었다.
“그럼 언제 아플지 모르잖아요.”
그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잖아!
그래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가 제 손을 잡을 때부터는 아예 눈이 아플 정도로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가 순식간에 검날에 손을 가져다 댈 것 같아서.
“다른 곳에 신경 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럼 더 아파요. 시스테인이 속삭였다.
“그건, 그건 아는데…….”
리벨이 마른 입술을 애써 축였다.
그게 마음처럼 되지가 않는다니까요?
리벨이 검을 내려다보기만 하자 시스테인이 움직였다.
“그럼 이렇게 하죠.”
어떻게? 리벨이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이었다.
―쪽.
그녀의 이마에서 달콤한 소리가 울렸다.
부드럽고 촉촉한 온기가 이마에 닿는 촉감이 선연했다.
짧은 입맞춤이었다.
?
???
지금 이 사람이 나한테 뭘 한 거지?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
손끝에서 따끔한 느낌이 났다.
“아,”
리벨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이 리벨의 손끝을 아주 살짝, 검에 스치게 했다.
그녀가 작게 신음하는 사이, 검에 맺힌 그녀의 핏방울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리벨이 제가 뭔 일을 당했는지 따질 틈도 없이, 변화는 바로 일어났다.
“……!”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는지, 검을 타고 두어 방울 흐르던 피가 눈부신 연둣빛이 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건 리벨의 상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우웅!
그리고 아까보다 월등하게 많은 양의 피가 흘러 들어간 게이트는 곧바로 반응했다.
그 모습에는 두 사람뿐만 아니라, 마님 유령에 이어 이마 키스까지 하는 단장님 유령까지 본 젠마저도 입을 떠억 벌렸다.
게이트는 작아지고 있었다.
“반응이 있군요.”
시스테인은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검을 집어넣었다.
―탁.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리벨의 상처를 지혈했다.
순식간에 주변을 감싸던 연둣빛이 사라져 버렸다.
“아야.”
리벨은 상처를 누르는 힘 있는 손길에 신음하면서도, 게이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이트는 분명히 아까보다 작아져 있었다.
더 많은 피가 들어갔다면 없어졌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시스테인의 물음에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당연히 괜찮은데…….”
리벨은 게이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스테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게이트의 크기뿐만 아니라 마력 파동 역시 약해졌습니다. 확실히, 반응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피가 더 나지 않도록 그녀의 손을 단단히 지혈해 주었다.
―찌이익.
그러다가 아예 손수건을 찢어, 그녀의 손끝을 감아 주었다.
“그렇게까지 할 정돈 아니에요.”
리벨은 난감한 얼굴로 웃었지만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제 손에 낀 장갑을 리벨에게 넘겨주었다.
―우우웅!
손 크기 차이가 심했지만, 사이즈는 약간의 마력을 가해 줄여 버렸다.
리벨의 손에 장갑까지 끼운 후에야 시스테인이 말했다.
“치료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하죠.”
여기서 더 치료를?
잠입 취재 하다가 얻은 다른 상처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스테인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안 그래도 진지한 사람이 더 진지해지자 무슨 중상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일단 살펴볼 것은 살펴보았으니, 물러나는 게 좋겠습니다.”
시스테인은 그녀의 손을 다시 한번 감싸 주었다가, 부드럽게 잡았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