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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19)화 (119/167)

119화

“일하다가, 힘들면 말하세요. 리벨.”

시스테인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긴 손가락에 진분홍빛 머리칼이 얽혔다.

“말……하면요……?”

리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스테인은 바로 답했다.

“지금은 당신의 취미가 수습 기자이니 용서할 수 있지만, 만일 당신이 힘들다면, 견디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때는,”

그그그그그그때는? 리벨은 슬그머니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매가 서늘한 호선을 그렸다.

“리벨과 제 복수를 해야겠지요.”

오.

리벨은 제 목이 풀스윙으로 날아가서 홀인원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시스테인의 얼굴에는 한겨울의 서리처럼 싸늘한 기운이 묻어나 있었다.

그건 명백한 분노였다.

리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인지, 그의 표정이 금세 얼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드러난 건 늘 그가 자신을 포장하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저러면 안 되는데.

리벨은 다시 한번 저를 조여 오는 방이 더 좁아지는 것 같았다.

결국 리벨이 입을 열었다.

“……시스.”

늦기 전에 말해야겠다. 그녀가 결심한 순간, 시스테인이 말했다.

“물론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리벨의 능력도, 직업도.”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감찰기사단의 서류에 조력자가 제공한 정보에 대해 서술하는 칸이 있습니다. 그곳에 원래 리벨에 대해 써야 하지만…….”

그는 서류에 거짓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진실을 숨겨 본 적도 없었다.

이 서류가 어머니인 황태후 리엔은 물론, 황제 카리스까지 본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쓰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숨기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물론 작업하다 온 그대로, 빈칸이 많은 서류를 황가에 넘길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가 정말 수습 기자라면, 답은 있었다.

시스테인은 틸라 저택에서 봤던 하인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사진을 찍으셨습니까?”

“네?”

인생과 거짓말과 양심의 버뮤다에서 헤엄치고 있던 리벨이 고개를 들었다.

“찍긴 찍었는데…….”

그건 갑자기 왜요? 이야기가 왜 이리로 튀어?

리벨이 눈을 깜빡일 때였다.

“그걸 잠시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스테인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걸? 여기서? 갑자기?

“서류 처리를 위해선, 필요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남의 정체 탐구하다가 일하기 있기 없기?

사실 내 정체는 관심 없고 그저 사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

리벨은 의아해하면서도 나인을 불렀다.

“나인.”

조금 큰 소리로 부르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

“내 방에서 그거 가져와.”

카메라라고 말하지 않아도 나인은 알아들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인은 잠시 답이 없었다.

시스테인과 함께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가져오라는 말은, 그녀의 직업을 들켰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았기에.

애초에 그림자들이 파견될 때 황태후 리엔에게 받았던 명령은, 리벨의 정체를 시스테인에게 숨기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어긴 셈이 되었으니 나인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리벨 역시 알고 있었다.

황태후 리엔은 ‘네 정체를 비밀로 해 주겠다’고 못 박으며 그림자들을 보내 주었으니까.

“……전하.”

주저하는 목소리에, 리벨은 결국 침대가의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끼익, 소리와 함께 나인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리벨이 작게 말했다.

“내가 말한 거야.”

사실 시스가 알아챈 거지만.

내가 줄줄 흘린 정보를 주워 담은 셈이니 내가 말한 거나 다름없지.

그녀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알겠습니다.”

나인은 결국 문을 닫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시스테인은 그가 닫은 문을 보다가 말했다.

“역시 리벨의 정체를, 그림자는 알고 있었던 거군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였다.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네.”

조금 머뭇거리던 리벨이 덧붙였다.

“황제 폐하와 황태후 폐하께서도 알고 계세요.”

그 말에 시스테인은 묘한 마음이 들었다. 이 감정은 최근에 한번 느낀 적이 있는 것이었다.

섭섭하다.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섭섭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을 저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그녀가 제게만 비밀을 감췄다는 것이.

“……제게만 말하지 않으신 겁니까.”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리벨은 좀 머뭇거렸다.

그 목소리에서는, 그가 섭섭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섭섭한 감정이 묻어났기에.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한 거예요.”

처음에는 무서워서, 지금은 당신이 상처받을 것 같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리벨은 두 손을 펴 보였다.

“제가 처음에 말한 건 아니고, 황태후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어요.”

“……아.”

시스테인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기자 벨에 대해서 조사했을 때, 제대로 정보가 나오지 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감찰기사단의 정보망을 피해 가는 기자라니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어머니 선에서 방해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독립적인 정보 집단인 황태후의 그림자와는 달리, 감찰기사단에는 황태후 리엔은 물론 황제 카리스도 손을 댈 수 있었다.

“직접 말한 건…….”

그때 리벨이 말을 이었다.

그가 섭섭해하는 것만큼은 풀어 주고 싶었다.

카리스에게는 직접 말했다.

“……황제 폐하께는 그랬는데, 내켜서 말한 건 아니었어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은 이마를 짚었다.

그가 의심 많은 카리스의 성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정확히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카리스가 어떻게든 ‘제가 관심을 가진’ 리벨에 대해 알아내려 했을 것도 짐작이 갔다.

“……고생하셨습니다, 리벨.”

고생은 자기 혼자 다 해 놓고 뭐라는 거야, 이 사람?

리벨은 다시 좀 더 가슴이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해야 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가 내켜서 말한 적은 없다는 소리예요.”

그 말에 시스테인은 리벨을 돌아보았다. 조금의 의아함을 담은 그 눈에, 리벨은 맹세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언젠가, 모든 걸 털어놓을게요.”

이건 확실하게 말해야겠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멈칫했다.

아직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시스에게만큼은, 모든 걸, 제 의지대로 털어놓을게요. 시스는 유일하게 제 입으로 진실을 듣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 될 거예요.”

시스가 알아봐야 좋을 것 없는 비밀인데도, 섭섭해하는 시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스가 원한다면요.”

그 말에 시스테인은 곧바로 답했다.

“원합니다.”

섭섭한 감정이 거짓말처럼 풀려 나갔다.

그와 함께 습관처럼 억눌렀던 감정이 조금 더 풀려 나왔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그 말에 리벨이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쿵쿵.

나인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그 목소리와 함께, 아주 잠깐 활짝 열렸던 시스테인의 감정의 문이 다시 움츠러들었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아, 들어와.”

리벨의 말에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탁.

그리고 문제의 카메라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나인은 다시 소리 없이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 리벨과 시스테인은 카메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 적 있는 카메라군요.”

시스테인이 뇌까렸다. 리벨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야 당연하다.

“틸라 저택에서요?”

“예.”

그랬을 것이다. 같은 카메라를 들고 갔으니까.

리벨은 그때처럼 카메라 필름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필름에 닿자마자.

―촤라라락!

그의 몸에 감도는 마력만으로 선명히 인화된 사진이 두 사람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이것도 그때랑 똑같다, 리벨이 생각했을 때였다.

“……이거, 그날 저택에서 찍으신 겁니까?”

시스테인은 사진 중 하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그 게이트를 고쳤던 수상한 자들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아스테아 백작 부인과 함께.

“네.”

와, 엄청 선명하게 인화됐네. 리벨은 그와 함께 사진을 살폈다.

오히려 그녀의 맨눈으로도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다 드러나게 인화된 듯했다.

순도 높은 마력으로 인화된 덕이었다.

“이 문양.”

그리고 그 덕에, 시스테인은 그 수상한 자들의 로브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마주치면 곤란하니 그들의 흔적이나 목소리만 들었던 시스테인은, 그들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수상한 자들의 로브에 그려진 문양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는 문양이에요?”

뱀 문양으로 보였는데. 리벨이 그와 함께 문양을 살폈다.

역시나 그녀가 현장에서 맨눈으로 봤던 것보다 더 선명하게 인화된 사진에는, 그자들의 로브 위로 금빛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문양이 보였다.

“예.”

시스테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리벨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알기론 뱀을 상징으로 삼는 가문은 제국에 없어요.”

그랬기에 리벨도 그 문양을 보고도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뱀은 제국에서 불길함의 상징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스테인은 문양을 알고 있다고 했다.

혹시 무슨 지하 조직의 문양 같은 건가?

감찰기사단장인 그가 아는 문양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스테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대공령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대공령에서? 디란타 대공령?

거기가 여기서 왜 나와? 혹시 디란타 부업 합니까?

리벨의 입을 떠억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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